비트 문화

20세기 미국 미술 : 리사 필립스

by 조 씨


1950년 다른 어떤 집단보다 비트족은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미국의 이상이 충족되지 못한 징후가 미국 문화의 순웅성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에 도전하는 삶의 방식과 문학 작품을 통해 반기를 들었다.
비트족은 1950년대 초 언더그라운드에서 소규모 시인과 작가로 출발, 미국인들이 조국을 사랑한다면 반항아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비트라는 운동은 1940년대 중반 뉴욕에서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와 잭 케루악, 시인 알렌 긴스버그가 만나면서 시작된 것이다.
10년 후 비트족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1940년대부터 활동하던 또 다른 언더그라운드 운동인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와 접점을 갖는다.
비트족은 샌프란시스코의 커피하우스,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 로스앤젤레스의 깊은 협곡에서 검열, 군비 경쟁, 기업 가치와 소비주의에 맞섰다. 또한 물질주의와 노동윤리를 내장한 부르주아 문화를 거부하면서 평범한 것과 비천한 것에서 희열과 경이를 발견했다.
비트의 시는 광범위한 자료와 경험을 끌어들였다.
비속어를 시작으로 마약 문화에서 선불교, 할리우드 영화와 쓰레기까지, 서로가 맞서면서 그러나 서로를 구제하는 사실주의 안에서 융화되었다.

비트족은 미국 자체의 소재를 기념하는 우연히 발견한 사물, 단어, 소리를 결합해서 흔해 빠진 것들의 미덕을 표현했다.
한편 비트족의 시인인 긴스버그는

<울부짖음>에서 모든 것은 신성하다고 외쳤다.

"세상은 신성하다! 영혼은 신성하다! 피부는 신성하다! 코는 신성하다! 혀도, 종도, 손도, 똥꼬도 신성하다!"


저급하고 폐기된 것에 대한 비트족의 찬양은 새롭게 등장한 사실주의 소설과 리빙시어터 등 여러 극단의 저항적 실험 연극과 같이한다.
삶과 예술 간의 완전한 접속의 신호탄이 된 것이 바로 1957년 출간된 케루악의 (길 위에서)로, 이후 비트 세대의 선언문이 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광적인 집중력으로 3.6미터 두루마리 용지에 3주 남짓 쉬지 않고 타이평해 완성했다. 이런 작법은 '최초 생각이 최고 생각'이라는 케루악의 모토를 반영한 것이다. 그의 창작 스타일은 비밥 재즈의 즉흥적인 리듬과 빠른 속도로 반복되는 악절의 영향을 받아 '자발적 비밥 시형론'이라 불렸다. 글을 쓰는 행위는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예술과 삶은 서로 얽혀 있으며, 이는 음악, 대화, 음주, 독서, 노동, 흡연, 섹스, 여행 등 카니발적인 혼합물이었던 것이다.
비트족은 하나의 문학 운동에서 출발했지만, 모두를 포용하는 태도가 분야 간의 시너지를 촉진했다.

비트 세대의 탄생과 질주

흔히 비트족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은 대개 작가, 미술가, 영화 제작자, 티셔츠 차림에 염소수염 같은 턱수염을 기른 '카페 죽돌이' 등을 포괄하지만, 1940년대와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소수의 창립 멤버들밖에 없었다.
비트 세대'라는 신조어는 1948년 존 케루악에 의해 효시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칼럼니스트 의해 비트닉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비트 운동은 전국 차원의 대중적 현상이 되었다. 옷차림부터 약물 사용, 청소년 문화까지 나름의 모델을 제시하고 실천한 비트 시인들은 상아탑의 아카데미 학파보다는 록스타 같은 대접을 받았다.
문학 미학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친밀함과 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서로를 끌어당긴 비트족이 하나의 문화 운동으로 선명해진 계기는 1944년 컬럼비아대학교 학생이 서로에게 소개해 주면서부터였다. 이들은 서로에게 섹스 파트너, 저작권 대행인, 멘토가 되어주었고, 무엇보다 기성 문단에서 아직 후원을 받지 못하던 상태에서 각자의 작품을 돌려 읽으며 창작을 독려하는 작가 양성인으로 종사했다.
1940년대 중반 긴스버그가 발표한 자신들의 '새로운 비전'은 이후 이들의 저작 생산물의 특징을 정의한다.
하나, 검열 없는 자기표현은 예술 창조에 필수적이다. 둘, 창조성은 반이성 적인 수단과 감각의 교란 즉, 환각, 환상, 약물, 꿈을 통해 확장된다..
셋, 예술은 관습적인 도덕의 전횡을 파기한다.
1950년대 중반 비트 세대의 양대 축은 로버트 크릴리와 존 와이너스를 필두로 한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랙마운틴 칼리지 출신 시인들과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를 창시한 자가들 등 샌프란시스코 그룹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는 5년남짓 비트 세대와 보조를 맞추며 카페와 시티 라이츠 같은 서점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이처럼 미 서부 해안의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1958년 로렌스 펄링게티의 마음속 코니아 일랜 들어가 출간되었고 이는 20세기 미국에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 시집이 되었을 뿐 아니라 언더그라운드 영화 제작자에게 영향을 주었다. 비트 세대가 그러했듯,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 멤버들을 결집한 동력 역시 정신적이기보다 물질적이고, 창조적이기보다 순응적으로 보이는 세상에 집단적으로 대항하려는 굳은 의지였다.
비트 세대 문학은 자전적 이야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대륙횡단 여행, 동성애, 헤로인 중독 같은 개인적 삶의 사건들이 비트 교과서 탄생의 모태가 된 것이다. 개인적 솔직함이 작품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작품은 문학적 주제 언어, 비유적 표현을 중시하면서 전기적 혹은 역사적 관점은 배제했던 신비평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미국의 빈틈없는 문학적 관습을 파열시키기에 이른다. 비트 작가와 처음 대면했을 때 많은 비평가는 이들을 문학과 도덕을 파괴하기로 작심한 비행소년처럼 묘사했다. 이런 근시안적 관점은 비트 문학이 고전 작가와 현대 작가 모두에게 가진 왕성한 관심과 솔직한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새로운 도덕성을 마련하려 던 욕구를 무시한 것이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북부 해변 클럽들에서는 종종 비트 시와 재즈 연주를 결합한 공개 퍼포먼스를 시도했는데 이 개념은 고대 음유시인의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이었다. 비트 시는 자연의 정신, 불교와 명상의 엄격함, 원주민들의 현존성을 환기했다. 비트 시인들은 일상적인 구어체 언어를 사용하면서 재즈의 즉흥성을 반영하는 여러 가지 운율을 개척했다.
비트 세대는 대중문화 및 문학 영역에서 많은 가능성을 이후 세대에게 열어주었다. 그중 하나로 상업성을 꼽을 수 있다. "케루악은 백만 개의 카페를 열었고, 남녀 공히 백만 벌의 청바지를 팔았다."
라는 버로스의 지적처럼 말이다. 하지만 더 지속적인 비트 세대의 영향은 이들이 울부짖음. 과 네이키드 런치. 에 대한 음란물 혐의를 무산시켜 문학 작품에 대한 법적 검열을 무효화시켰을 뿐 아니라, 언어와 삶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미래 세대가 미국의 국민임과 동시에 우주의 시민으로서 제 역할을 모색하는데 모델과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아상블라주. 콜라주. 정크 조각 미 서부 해안 시각 예술가들은 비트 시인들과 사회적, 철학적인 면에서 긴밀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비트 시인처럼 주로 길거리나 비밥의 '쿨' 비트에서 우연히 발견한 재료를 주워 모으는 데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일상 오브제를 집적해 아상블라주를 만들었다

("'아상블라주'라는 용어는 프랑스 미술가인 장 뒤뷔페가 자기가 덕지덕지 붙인 구조물들을 칭하기 위해 1953년 처음 사용했다).
이 작업은 캘리포니아 예술가들이 이에 영감을 받았다.
미술가들이 아상블라주 작업에 끌린 이유는 창작 과정에 어느 정도 자발성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값싸고 구하기 쉬운 재료를 활용할 수 있었기 때
문이었다. 더욱 중요한 매력은 현실에 초연하고 내면을 중시한다고 여겼던 추상표현주의와 상반되게 현실 세계의 요소를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버려진 스타킹, 납은 사진, 깃털, 시킨 레이스 등이 섬 뚝하고 음습하며 변태성욕적인 작품에 결합되는 식이다. 제이 드패오는 당대 가장 야심 찬 아상블라주인 (장미)를 제작하는 데 1958년부터 1966년까지 7년 동안 몰두했다. 이랑을 이루며 융기한 거대한 부조는 높이가 3미터가 넘고 중심부가 30 센티미터 두께로 부풀어 올라 있으며, 원자탄폭발이나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선들이 중앙에서 방사형으로 퍼져나간다.
게다가 물감이 1톤이나 쓰였고, 작품 속에는 많은 물건과 다양한 캔버스들이 묻혀 있다. 이 걸작은 회화와 조각, 유기체와 우주의 결합체라 할 수 있다.

미 동서부를 가릴 것 없이 시각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에 결합할 법상한 물건을 찾기 위해 거리를 힘쓸고 다녔다. 정크 조각이라고 알려진 이 양식은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콜라주 전통을 3차원으로 연장한 것이다. 이들 작품은 벽에 걸려 있더라도 대결적인 방식으로 관람객의 공간으로 쳐 들어간다.
아상블라주 예술가들은 애당초 작품이 팔리거나 제도적 후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없이, 때로는 미술계의 기성 권력 조직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감을 품고 창작에 임했다. 이들 작품은 수명이 짧고 쉽게 퇴폐하는 재료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몇몇 미술관 큐레이터들은 미술가들의 무관심, 취약한 재료, 통속적인 소재에도 개의치 않았다. 점차적으로 아상블라주는 스스로 도전했던 바로 그 기성 미술계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했다. 196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한 '아상블라주 예술' 전은 아상블라주에 부여된 최고의 제도적 승인이 라할 수 있다.

미국을 보는 새로운 렌즈

전후 뉴욕학파 회화와 나란히 발전했던 뉴욕 사진학파 작가들도 비카 낭만적인 인생관을 갖고 '진짜' 미국을 찾아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다큐멘터
리 저널리즘 기법에 기초했지만, 일화적으로 묘사된 사진을 거부했고, 대신 실존주의 정신을 할리우드 누아르 필름과 혼합한 양식을 도출해 냈다. 또한 초기 사진작가들의 형식적인 겉치레 대신 아상블라주 미술과 비트 문학이 중시한 '발견된 재료'의 대웅물이라 할 수 있는 '스냅숏 미학'을발전시켰다.

이들 작품 역시 당시 도시 생활의 고립감, 소외감, 조급증, 팽배한 사회적 무기력감 등을 담아냈다.
자발적이고 정직한 자세로 길거리 풍경, 범죄 장면, 지하철, 서커스 구경거리, 코니아일랜드를 사진에 담았다. 개별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도 이들 작품은 품격 있는 스타일부터 너저분 한 것까지 카메라에 담으면서 도시적 삶의 다양성을 포착했다. 여기에 로이 디캐러바의 작품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통상 뉴욕 사진학파에 포함 되지는 않지만, 그룹의 많은 사진작가와 사회적 교분을 맺고 있던 그는 뉴욕, 특히 할렘가의 삶에 관한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사진을 찍었다. 보통사람들 팬만 아니라 재즈음악가들의 모습이 포함된 디캐러바의 사진은 탁월한 시각적 기록을 만들어내면서 책이 출간될 때 디캐러바의 사진 몇 장이 함께 실리기도 했다.

스위스 태생인 로버트 프랭크는 1950년대 주로 뉴욕에 근거를 두었으나 미 대륙의 광활한 공간을 무뚝뚝하면서 정직한 렌즈로 담아냈다.
1955년 프랭크는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아 미 전역을 가로지르며 미국 국민을 사진에 기록했다. 그 결과물로 발표한 (미국인)이라는 사진집(그리고 사진 연작)은 일상의 아름디움을 찬미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체적 삶이 담겨 있는 탁월한 초상화라 할 수 있다. 고상하거나 세련된 사람들, 부자와 가난뱅이, 흔해 빠진 것과 이국적인 것, 다양한 인종, 황량한 전원과 무질서한 도시의 풍경 등이 한데 담겨 있다. 프랭크는 뉴욕의 음키퍼, 시카고 정치 집회 할리우드 영화 개막식, 몬태나주 뷰트의 해군모집본부 등 집과 탄광촌 같은 낡은 것부터 주크박스와 드라이브인 영화관 같은 새로운 뉴욕 현대 미술까지 넘나 든다. 프랭크의 사진이 가진 숨김없는 성격, 거기 담긴 삶의 단면이 보여주는 사실성은 상당 부분 각 피사체의 중심부를 벗어나 의외의 지점에 초점을 맞추는 프레임 구성에서 기인한다. 일부 사진작가들은 이런 기법에 대해, 마치 아상블라주와 비트 문학이 순수 예술의 규범을 깨뜨린 것처럼 전문 사진이 갖춰야 할 기준에 대한 반칙으로 여기기도 했다.
프랭크는 미국이 가진 꾸밈없는 다양성을 재현했고, 그의 사실주의는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대중적인 주류 사실주의를 대표한 사진작가는 195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인간 가족'이라는 획기적인 사진 에세이 전시를 연 에드워드 스타이켄이었다. 68개국 사진작가로부터 받은 503장의 사진들을 모은 거대한 설치 작품을 통해 스타이켄은 "삶의 일상성에 담긴 보편적 요소와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상으로, 전 세계를 통틀어 인류가 근본적인 단일성을 갖고 있음을 반영하는 거울상으로 인식" 하도록 했다. 그는 인간의 경험 영역에 대해 장대 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언술을 펴기 위해 전 세계 사진작가들이 보내온 이미지를 추려내는 과정에서 문화적 차이를 의도적으로 희석했다. 프랭크는 좀 더 거칠고 불안하게 하며, 복잡 미묘한 장소에 대한 시적 감성을 창조하기 위해 미국이라는 특정한 나라의 모든 단면을 파헤쳤다. 프랭크에게 미국은 도시의 리듬과 탁 트인 도로에서 오는 황량한 고독감의 광활한 대지가 공존하는 나라였다.
로버트 프랭크는 다음 세대로 이어질 일종의 포토리얼리즘 의출발점이었다. 게리 위노그랜드는 회화적 구성을 중시하던 기존의 사진 관습을 깨고 무작위로, 효과를 우연에 맡긴 채 북적대는 파티와 거리를 촬영했다. 리 프리들랜더는 상접 전면과 쇼윈도, 길거리 광고 등 도시의 무표정한 모습을 담은 사진을 통해 혼란스럽고, 중심이 없으며, 대개 초현실적인 미국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사진은 다른 이들이 간과했던 삶의 풍경과 세계의 모습을 냉정하게 관찰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강력했다.

콜라주와 페인팅의 결합을 더욱 밀고 나간 라우센버그가 후기에 선보인 3차원 '콤바인 페인팅' 작품은 다양함과 무작위적 배열의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며 관람객의 공간까지 홀러 침투한다.
내용은 물론이고 형식에서도 세상을 자기 예술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포용적인 비전을 소유했던 그는 관대하고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말했다. "회화는 예술과 삶, 둘 다에 관계한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만들어질 수는 없다.
비트 동료들처럼 라우센버그 역시 사회적 금기를 거스를지라도 인간의 경험과 감정의 모든 영역을 표현하고자 했다. 라우센버그의 작품은 버려진 간판이나 무너져 내리는 벽의 아름다움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함으로써 일상적 경험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라우센버그는 선불교에서 유래한 미학을 가진 케이지에게 많은 것을 배운 바 있다. 선배 사상은 인과론보다는 우연을 중시하며, 선과 악, 추함과 아
름다운의 양극성을 부정한다. 삼라만상은 절대적인 단일체에 포용된다.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우월한 것은 없기에 위계와 판단을 내리는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예술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예술은 삶과 유리된 특권적 활동이 아니라, 삶 안에서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
1913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다다 Dad='라는 반예술 운동을 벌인 뒤샹은 자전거 바퀴, 포도주병 건조대, 소변기같이 비카예술적인 물건을 단지 예술이라고 호명하는 것만으로 예술품으로 만든 '레디메이드'를 창안했다.
케이지의 레디메이드 음악은 뒤샹의 ' 발견된 오브제'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으며, 케이지 자신은 예술 작품이 관객에 의해 완성된 디는 뒤상의 개념을 전달하는 중요한 회로와 같았다.
레디메이드 사상은 우연과 반효위계적인 미학을 중시하는 선사상과 더불어 예술의 기능, 의미, 배경에 대한 선험적 개념을 뒤집어 놓는 데 일조했다.
블라우센버 그는 코뮌, 즉 공동체이자 삶의 실험자 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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