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문화의 지배

20세기 미국 미술 : 리사 필립스

by 조 씨

팝아트는 반동적이라기보다 혁명적인 최초의 구상주의운동이었다. 이미 1920년대와 30년대에 미국의 상업문화를 찬미한 바 있기 때문이다.
팝아트 작가들은 미국적 특징이 온전히 드러나는 독창적인 양식을 창조하기 위해 대중문화나 인조 환경에서 특별할 것이 없는 통속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했다.
예술가들이 반응한 것은 미국의 새로운 시각적 풍경들, 즉 광고, 대형 광고판, 상품, 자동차, 노천 상점, 패스트푸드, 텔레비전, 쪽 만화 등이었다. 인쇄물, 영화, 텔레비전 등 각종 미디어에 기반한 현실로부터 다양한 이미지를 선택해 여러 가지 기계적인 방식을 통해 예술로 변환시켰다. 이들 작품은 이미지의 이미지, 복사물의 복사물인 경우가 흔했다.

이런 이중 과정은 대량생산, 중매체, 마케팅이 구사하는 기법에 조우하는 것이다.

이들이 보여준 상업성에 기초한 기법과 이미지들을 생각할 때, 다수의 팝아트 작가들이 광고 일러스트를 제작하거나, 레이아웃 디자인, 광고판 도색 등을 하며 상업 미술가로 일했다는 점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작가들은 이런 상업적인 경험을 통해 디스플레이 기법뿐만 아니라 전시 효과의 중요성을 체득하게 된다.

이들에게 미술이란 소비사회의 풍경 속에 자리한 하나의
상품일 뿐이었다.

팝아트와 연관된 기계적이고 비개성적인 양식은 그것의 역사를 따지기 힘들게 만든다. 사실 초기 팝아트 작품들(1958-62)은 비교적 느슨하고, 손으로 칠해졌고, 종종 제스처적인 특징을 띠어 추상표현주의와의 관련성
이 엿보인다. 앤디 위험은 춤 동작 도표, 쪽 만화. 광고 등의 초기 이미지들을 직접 손으로 그렸다. 손작업은 제스처적인 양식, 즉 '환경'과 해프닝부터 1960년대 초반 채색 석고 조각과 짐 다인의 오브제가 부착된 모노톤 회화까지 이어지는 작품 스타일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역시 초기 만화 드로잉에서 표현주의적인 제스처를 사용했다. 이들 팝아트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1950년대에 이미 미국 국기와 코카콜라 병처럼 대중적인 아이 콘을 물감을 올리거나 얼룩지게 하는 등의 연금술을 발휘해 변형시킨 라우 센 버그와 존스였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대중문화와 광고의 영향력에 둔감하지 않은 덕에 '여인' 연작 초기 습작 가운데 하나에 카멜 담배 광고에서 잘라낸 여성의 입을 콜라주로 붙여 넣은 액션페인팅의 대가 월렘 드 쿠닝도 빼놓을 수 없다.
추상표현주의적 회화 방식과의 연결 고리는 1962년 워홀과 라우센버그 가 사진 실크스크린 기술을 도입하면서 끊어졌다. 이 기법으로 사진 이미지를 곧장 캔버스 표면으로 전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실크스크린 전사법이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기원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워홀이 자신이 직접 발명한 것이라고도 했고, 라우센버그로부터 기본적인 아이디어로, 또는 고속 윤전기에서 나온 인쇄 교정지 같은 격자형 구조로 반복 배치했다.

또한 캔버스에 '멀티플'들을 찍어내듯 같은 이미지를 끝없이 변형했으며, 이 기법을 벽지에도 적용했다.
위홀은 조수들을 고용해서 개인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충심으로 거부했다. 기계적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최종 작품에 조수들이 워홀보다 더 많이 '손'을 대곤 했다. 이는'제스처'를 통해 캔버스 위에 실존주의적 불안을 표현하며 화실에서 홀로 힘들게 작업하던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신화 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위홀과 조수들은 '팩토리', 즉 공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맨해튼 이스트 47번가 작업장에서 조립 생산 방식으로, 어떤 때는 하루에 80개나 되는 작품을 기계적으로 찍어냈다.

팝아트와 같은 시대에 등장한 순수 기하추상 미술은 당시 커지던 사회적 위기를 더욱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트' '제1의 구조물' '시스템 미술' '구체 오브제' '단일상 미술' 등 다양하게 묘사되었지만 결국 통용된 이름은 '미니멀리즘'이었다. 미니멀리즘은 조각가와 화가를 망라한 전국적 현상이었다. 이들의 작품은 극도로 단순화된 포맷과 기본적인 기하 구조를 통해 물리적 실재를 주장했다.
미니멀리즘은 팝아트와 정반대인 듯 보이지만 형식적 특징과 기법을 일부 공유했다. 반복과 연속 형태, 기계 미학, 차갑고 무표정한 표현법이 그러하다.

또한 팝아트가 대량생산된 소비품들을 포용했듯이 미니멀리즘 조각은 대량생산된 산업적 재료들을 사용해 공장에서 생산된 이미지들을 제조 단위로 전환했다. 미니멀리즘 역시, 비록 나름의 방식이기는 했지만 물질주 의를 찬미했다는 접에서 팝아트와 비슷하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재료 그 자체의 성질과 견고한, 경험적인, 그리고 직접적인 세계에 몰두했다. 구체성의 강조는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을 많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 자신의 이미지를 '상호연관적'으로, 즉 색채와 형태가 서로 연관되게 균형을 이루도록 인식한 작가들로부터 분리시켰다.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의 입장에서는 시각적 효과를 위해 자의식을 가지고 구성을 조작하는 것만큼 의심스러운 짓은 없었다. 그러한 조작은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행위로, 미술가라는 페르소나의 강요로 인해 작품에 내재한 즉자적인 사물성을 훼손시키는 행동으로 여긴 것이다.

캔버스 위에는 물감 이외에' 아무것도 없으며 '당신이 보는 것이 바로 당신이 보는 것이다.'라고 한 프랭크 스텔라의 세로줄 흑색 회화는 이런 새로운 창작 태도를 최초로 표명한 사례 중 하나다. 그의 후색 회화는 합리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질서를 표방하고 있다. 줄무늬 형상은 이 그림의 구조, 즉 캔버스 뒤를 받치고 있는 십자형 지대와 그것이 캔버스 가장자리와 맺는 관계와 일치한다. 스텔라의 진술은 거의 같은 시기 "내 그림과 영화, 그리고 나의 표면만 보라. 거기 내가 있으니.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라던 앤디 워홀의 말과 그리 멀지 않다.
팝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은 작가의 유일성과 자아 표현 모두를 부정하고자, 다시 말해 미술가들을 미술의 고려 대상에서 제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표준 단위를 도입했다.
미니멀리즘의 연속적 체계와 반복적 구조는, 워홀의 실크스크린 회화 연작과 모조품을 쌓아 만든 작품처럼, 작가의 권위에 맞서는 캠페인을 선동했다.
스텔라, 놀런드 외 작들은 일련의 연관된 작품들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자주 반복하면서 단순한 형태를 사용했다. 도널드 저드의 층층이 쌓은 상자처럼 하나의 작품 속에 연속물이 포함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구조적 연속성은 대개 수학, 언어,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미니멀리즘의 발전을 견인한 원칙이 되었다.
미니멀리즘 작품 몇몇은 기본 단위로 구조화된 웅집물을 이용해 놀라울 정도로 복합적이면서 눈부신 지각 경험을 산출해 냈다.
즉,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전체 이미지는 그 구성 요소인 격자형 화소로 분해되는 것이다.
구성의 원칙과 제작 과정으로서 율동적인 구조와 같은 반복의 개념은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 1950년대 선사상의 영향이 반복 전략의 기용을 촉진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워홀은 미디어 이미지의 반복이 감각을 마비시키는 효과를 전기의자나 인종 폭동같이 무거운 소재가 가진 힘을 중화시키는 동시에 이를 보는 관람객의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데 이용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계속 반복해서 본다면 실제로는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반복은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이 공유한 대량생산 미학의 핵심 요소였다. 워홀이 '팩토리'에서 실크스크린 그림을 제작하기 위해 친구와 조수들을 고용했듯, 저드는 업자들에게 작업지시서를 보내 아연 철판과 스테인리스 스틸로 작품을 조립하고 만들도록 했다.
작품에는 손댄 증거가 거의 없고, 예술가는 그저 재료나 색채, 전체 형태를 디자인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결정만 내리는 미술감독이나 건축가처럼 작업할 뿐이었다.
미니멀리즘에서 수작업의 배제를 더욱 심화시킨 요인은 통상적으로 쓰이는 산업 재료들을 빈번하게 사용한 것이다. 개중에는 광택 나는 알루미늄 아연 도금한 강철, 플라스틱, 섬유 유리, 벽돌, 포마이카, 플랙시글라스, 베니어판, 산업용 법랑, 형광등, 동판, 콘크리트처럼 새로 시판되는 제품들이 포함되었다. 게다가 미술가들은 이들 재료를 공장에서 생산된 표준 단위의 모양과 크기 그대로 사용하곤 했다. 비록 재료가 가진 담백하고 비개성적 성질에 가치를 둔 것이지만, 이들 산업재는 미니멀리즘 작가의 눈을 플 만한 고유한 색깔과 감각적인 결을 지니고 있었다.
도널드 저드의 층층이 쌓은 상자나 솔 르윗의 <미완성의 열린 입방체들>처럼 하나의 작품 속에 연속물이 포함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구조적 연속성은 대개 수학, 언어,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미니멀리즘의 발전을 견인한 원칙이 되었다. 미니멀리즘 작품 몇몇은 기본 단위로 구조화된 웅집물을 이용해 놀라울 정도로 복합적이면서 눈부신 지각 경험을 산출해 냈다. 무한 확장이 가능한 격자 형태를 기본 단위로 반복시킨 솔 르윗의 벽화는 이러한 효과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심지어 사실주의 미술가인 척 클로즈도 거대한 포토리얼리즘 초상화를 구축하는 데 화소를 이루는 격자형 포맷과 반복적 구조를 사용해서 미니멀리즘의 특징인 사실적 현장감과 비개성적인 표면을 갖게 되었다.

댄 플래빈은 쉽게 구할 수 있는 표준 형광등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하안 형광등 하나를 45도 각도로 벽에 배치했고, 다음에는 다채로운 배열과 색깔이 조합된 다른 형광등을 선보였다.

플래빈은 동료인 칼 안드레처럼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들의 기하학적 이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1950년대에 토템 같은 나무 조각으로 출발한 안드레의 경우 이후 10년간 표준화된 산업재로 급격히 선희 하는데, 처음에는 벽돌을 바닥에 줄지어 놓거나 충충이 쌓았고 그다음에는 금속판을 바닥에 일렬로, 혹은 격자로 깔아 놓았다. 안드레를 비롯한 다른 미니멀리즘 작가들에게 조각이라는 행위는 형태의 창조가 아니라 선택과 배치에 있었다. 안드레는 작품에 고귀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또한 이런 조각에 대한 '체험'에 관객을 좀 더 가까이 끌어들이기 위해, 관람객이 바닥을 따라 러그처럼 늘어놓은 작품 위를 걸어가는 것을 허용했다.
미니멀리즘의 철학적 엄정함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이는 조각가 도널드 저드이다. 정확한 형태, 기법, 예리한 문제의 대가인 그는 1959년과 65년 사이에는 프랭크 스텔라, 댄 플래빈, 존 체임벌린 같은 몇몇 지인들에 대한 최초의 비평문을 쓰면서 미술평론가로 생계를 유지했다. 회화를 공부했음에도 1961년에서 62년경에 채색 부조를 만들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주로 빈 상자를 변형시킨 입체 형태로 방향을 들었다. 그는 상자모양 단위체를 벽을 따라 수평으로 진행하거나 바닥부터 천장까지 균일하게 배치해 충충이 쌓아 올렸다. 저드가 강조했던 점은 질량에 반대되는 공간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움푹 빈 공간은 아무것도 감춰질 수 없다는 그의 신념에 호소력을 더했다. 1965년 저드는 환영주의를 타파하는 수단으로써 '실제 공간'을지지하는 명확한 사물들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썼다. 그는 내적인 구성 모티프들이 예컨대 스텔라의 흑색 그림들처럼, 들의 가장자리와 조웅 하면서 전체적인 형태, 그리고 구조와 분명한 관성을 가질 때에만 수용했다. 저드는 미술이 가진 순수한 조형적 본성이 강조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공간에 대한 환영주의를 제거하는 것이 요구된다던 클레먼트 그린버그의 처방에 동의했다. 그러나 정작 그린버그는 미니멀리즘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것이 단지 하나의 관념적 차원에 머문 관념, 즉 "느껴지거나 발견되는 대신 추론된 어떤 무엇"일 뿐이라 간주했다. 저드는 단호하고 권위적이었다.
1950년대의 감정적이고 개방적인 용접 조각이나 즉흥적인 정크 조각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1920년대 미국 정밀주의자들의 미학이나 혹은 이전의 '재료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던 '미술과 공예' 운동의 윤리에 더 가까이 있다. 사실상 미니멀리즘 조각은 건축, 특히 '적을수록 좋다.'라는 국제주의 양식의 모토, 명확하고 엄정한 기하학, 마르셀 브로이어가 1966년 완공한 건물로 미니멀리즘 전시와 이상적으로 어울리는 휘트니미술관 같은 신브루탈리즘 건축과 공통점이 더 많은 듯했다.
건축가로 훈련받은 토니 스미스는 비록 다른 미니멀리즘 작가들과 같은 시기에 전시회를 가졌지만 이미 미니멀리즘의 발전을 예견했던 노장 예술가였다. 건축가로서 스미스는 국제주의 양식의 특징인 구조적 규칙성과 일면적 대칭성은 물론이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기본 단위시스템, 일본 주택의 다다미 깔개가 가진 구조적 단순성에 매료되었다. 그는 초기 회화 작업에서 기하학적 기본 단위를 실험했고, 이어서 조각 작품에도 기본단위 구조들을 사용했다. 작품 경력이 20년이나 된 그였지만 1963년에 가서야 대중들에게 첫 선을 보였고, 1966년에는 미니멀리즘 조각이 처음으로 제도권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된 뉴욕 유태인미술관의 중요한 전시에도 포함되었다.
스미스는 이 같은 감정과 산업의 접합을 통해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했다.
미니멀리즘의 대다수는 난해하다. 퉁명스러움은 적대적으로, 거대함은 거만함으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쉼 없이 커져 나간 스케일은 건축의 위상을 동경했으며, 종종 집이나 미술관에서 수용하지 못할 만큼 일부러 과대하게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도전의 몸짓이자 비타협적 신념의 표현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미니멀리즘은 재빨리 비즈니스 세계에 받아들여졌다. 미니멀리즘이 보인 명쾌함, 솔직함, 자신감이 기업 권력의 특사로서 완벽한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에 특정한 주제가 없다는 점은 기업이 수용하는 데 안전장치가 되었고, 기업의 시각 디자인이나 로고와 결합해 전 세계 수출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이 점이 이중의 아이러니인 이유는 작가들이 상품화에 반대했다는 점, 심지어 이들 스스로가 보통 사람들의 시학을 발전시키는 프롤레타리아적 의미의 '노동자'로 여겨졌다는 점 때문이다.
작가들은 추상표현주의의 제스처는 의도적으로 자제하면서도, 마크 로스코 외 다수가 보여준 숭고한 회화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는 표면 굴절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 이어 갔다. 빛과 공간의 형이상학적 차원은 1960년대 로스앤젤레스 미술가 그룹에 의해 한충 깊이 탐구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가면 미니멀리즘 운동은 주요 기관에 의해서 대부분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안치되었다.
미니멀리즘 실행자들은 팝 미술가들처럼 상품에 얽히는 것을 회피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들은 자기 작품 전시를 위해 깨끗하고 밝은 공간과 통제된 환경을 제공해 주는 상업적, 공공적 공간에 훨씬 많이 의존했다. 한때 공허하고 비개인적이며 지루하다고 여겨졌던, 그중에 서도 가장 엄정한 미니멀리즘 작가들조차 오늘날에는 우아하고 세련되고 평온하다고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미니멀리즘의 편협함과 건실하고 청교도적인 성향은 세월의 변호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비평가 그레고리 배드콕은 '실제적인 것의 미술'

전의 평문에서 '컬럼비아대학교 학생들이 항의하는 타깃 중 하나가 진정한
책임감과 의미 있는 행동에서 벗어나 보려고 현대 미술 기관 내부에서 자행되고 있는 바로 이런 종류의 관료주의 남용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쓸모없는 기관들'을 비난하면서 이 전시
야말로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된 서구 역사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최후의 전시가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모더니즘의 최후 지점인 미니멀리즘은 이제 시대에 뒤처진 한물간 여러 예술적 실천과 자세와 엮이게 되었다. 미술의 역할이 재평가받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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