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와 정치권력

인상주의 -제임스 H 루빈

by 조 씨

권력 시스템 안에서 생산되며 어느 정도는 거기에 동참하거나 저항하기 때문에,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는 정치와 무관한 주제를 미술계와 정치계의 주도적 기득권층에 대한 반감과 대립시키는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적 예를 들면 마네의 공화주의와 피사로의 무정부주의를 공개적으로 표출한 작품들은 화가의 의도는 예술의 근거에 있는 정치의 한 측면 일 뿐이다. 화가들이 무엇을 실행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회피하는지도, 그리고 화가들이 무엇을 그리지 않는지도 그들의 정치적 태도를 짐작케 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애국심이나 민족적 자존심 같은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어서, 화가도 감상자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도 이것과 관련된 문제이기는 하지만, 같은 문제는 아니다.


정치가 행동의 영역이라면,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념 또는 가치의 체계다.


개개인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여 가장 평범한 행위를 지배하는 경우에도 정치 시스템의 토대를 이룬다.


인상주의가 어떤 생활방식을 은연중에 찬양하거나 비판함으로써 그 생활방식의 전제를 정당화하거나 공격하는 한, 인상주의는 정치적 논쟁에 참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상주의 화가 마네는 확고한 공화주의자였고, 1851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정을 무너뜨린 나폴레옹 3세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경멸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태도는 늘 조심스러웠고, 반어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았다.


(풀밭에서의 점심)에 내재해 있는 기본원리가 동시대의 역사화에 효과적으로 적용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서사를 억제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전통 기법을 피했기 때문에, 화가는 냉철한 관찰안이라는 미술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화가는 시각적 볼거리를 기록하는 데에만 관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렇게 무관심을 가장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치적 발언이 아닐까?


그렇다면 마네의 태도는 보들레르의 ‘플라뇌르’와 비슷하다. ‘플라뇌르’가 보여주는 경멸의 철학은 공적 생활에 부조리와 진부함이 늘어나는데 대한 부질없는 방어 수단이다.


마네에게는 사적이고 미적인 것만이 합리적인 피난처였고 든든한 발판이었다.


그것은 정치와 무관한 정치이고, 그 핵심에는 소외되고 고독한 현대인의 냉소적인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플라뇌르 :배회자, 산책자, 활보자, 보행자 또는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


하지만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라는 주제를 다룬 것만으로도 정부는 마네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고, 1869년 살롱전에서 그 그림을 낙선 시쳤을 뿐 아니라 석판화로 인쇄 제작하는 것도 금지했다.


정부 당국에서 보면 이런 작품은 국민들이 빨리 잊어주었으면 싶은 문제를 되살릴 뿐이었다.


따라서 당국의 검열은 인상주의 미술에 정치적 주제가 비교적 적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인상주의는 프랑스 근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의 하나인 1871년의 파리 코뮌 진압과 때를 같이하여 형성되었음에도, 인상주의 회화는 그런 사실을 거의 말해주지 않는다.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기간에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혀 퇴위한 뒤 국민의회가 수립되었다.


공화정부 정부는 1871년 2월 16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파리의 노동자들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티에르 정권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파리 국민군과 합세하여 국민의회를 베르사유로 쫓아냈다.


파리 시민들은 코뮌이라는 사회주의적 자치위원회를 선출했고, 이것이 프랑스 코뮌의 충격은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제2제정 때만 해도 번영을 구가하며 자신감에 차 있던 프랑스 사회의 심각한 붕괴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이센에 항복함으로써 평판과 신뢰감을 상실했던 부르주아가 코뮌 진압을 계기로 다시금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희생자에 대한 승리자들의 죄책감만이 되찾은 자존심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전란기에 인상파 화가들은 대부분 파리를 떠나 있었다.


르누아르, 드가, 마네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에 입대한 경우도 있었고, 모네와 피사로처럼 런던으로 피신한 경우도 있었다.


세잔은 애인과 함께 마르세유 서쪽의 레스타크라는 어촌에 숨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파리에 코뮌이 수립되자, 마네는 남서부에 있는 가족과 합류했고, 드가는 노르망디로 떠났다.


인상파전에 참여한 화가들 중 코뮌에 가담하여 평의회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들 중에는 유명한 코뮌 지도자가 있었다.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렇다. 그는 방통 원기둥(나폴레옹 기념비) 파괴사건에서 맡았던 역할이 언론에 의해 과장 보도되는 바람에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그에 대한 재판과 추방은 공식적인 보복의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시기에는 상징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초기 인상주의는 사실주의 의한 갈래로 여겨지고 있었던 까닭에. 인상파 화가들은 쿠르베와 결부되었고. 따라서 좌익으로 간주되었다.


반대자들은 인상주의가 당연히 정치적 강령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파리 코뮌이 무너진 뒤로는 미술가들이 공공연한 정치적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짓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물리적, 심리적으로 프랑스를 재건하는 것만이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인상파 화가들 가운데 코뮌을 직접 언급한 사람은 마네뿐이었다.


그는 석판화 두 점을 제작했는데 (내전)에서는 앞쪽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 한구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등장하는 멋진 투사는 하나도 없다 가 부질없음을 암시하고 있고, 바리케이드에서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에 등장한 총살대의 일부를 재활용하여 프롤레타리아 동포들을 처형하는 베르사유 정부군 병사들을 묘사했다.


대다수 화가들은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과거를 잊어버리기로 작정했다.


카유보트, 드가 같은 그림들은 한때 코뮌에 점령되었던 도시 공간을 되찾은 부르주아의 ‘정신적 회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평화롭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부르주아를 묘사하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기억을 지워주었다.


당시 정부에 배신감을 느낀 코뮌 가담자들은 파리 한복판의 공공 광장에서 재집결지로 삼았다. 따라서 드가의 민족주의적 풍자는 제2제정에 대한 향수와 짝을 이를 수 있었다.


반란이 계속된 1870~71년에 병영과 포로수용소를 짓고 일감을 얻기 위해 불로뉴 숲의 수천 그루 나무가 조직적으로 벌채되었다.


우익 진영은 몇 차례 자유선거에서 승리한 데 힘입어 티에르 대통령에게 저항한 끝에 결국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코뮌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원수를 그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왕당파인 그의 권력에 불편함을 느꼈던 1878년에 모네와 마네가 그린 몇몇 작품의 특징을 이룬다.


우익연합은 바스티유 습격으로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날인 7월 14일을 기념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1878년 선거에서 승리한 공화파는 이런 조치에 대한 도전을 강화했다.


타협책으로, 어느 쪽에도 불쾌감을 주지 않는 6월 30 일이 공화정 기념일로 채택되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묘사한 비슷한 그림이 그해의 인상파전에서 가장 인기를 얻은 모양이다.


마네는 정치를 타락하고 잔인한 장난질로 규정하고, 정치에 계속 거부반응을 보인다.


산업 부흥의 증거를 담고 있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민족적 자부심의 형상화였다


암시적인 모티프를 선택한 경우에 대한 추론으로 이어진다.


무엇이 이보다 더 정치적으로 결백해 보일 수 있을까?


포플러가 프랑스혁명 당시’ 자유의 나무’로 선정되어 (프랑스어에서 ‘꾀플리에’는 ‘인민의 나무’를 뜻한다) 프랑스 전역에 수천 그루가 심어진 사실을 상기한다.


하지만 바로 그 선택을 통해 모네와 혁명가들은 프랑스풍에 대한 근본적인 자부심을 표현하고, 그들에게 편안합과 만족감을 주는 대상을 예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모네가 화폭에 담아 기념한 포플러는 인근 도시가 경매에 부칠 예정이었다. 모네는 경매에 참가하여 포플러를 매입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국가 유산의 일부를 지킨 셈이다.


르누아르는 불안정한 정국을 바로잡을 치유책으로 왕정복혁을 지지했다.


피사로는 반부르주아적 예술가 동맹에 잠깐 가담했다.


1878년에 세잔은 인상파전에 계속 참여하려면 예술가동맹을 탈퇴하라고 그를 설득했다.


재판을 받은 뒤 스위스로 망명한 쿠르베는 프랑스의 모든 전시회에서 추방당했다.


피사로는 인상파 그룹을 좌익 이론가들이 주장한 것과 같은 일종의 노동조합으로 생각했다


피사로의 후기 작품은 전보다 현대성에 대한 언급을 덜 하고 있지만, 여전히 시골을 이상화했다. 1884년에 그는 지소르 바로 북쪽에 있는 에라니읍으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풍투아즈보다 두 배나 멀리 떨어져 있는 농촌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곳에서 그린 시장 풍경은 1891년의 유토피아적 환상 뒤에 숨어 있는 목가적 향수를 반영한다.


화가들끼리의 협력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피사로는 프랑스에서 유서 깊은 정치적 이상주의를 반영한다.


쿠르베가 박람희장 근처에 사실주의 전시관을 따로 마련한 것은 정부가 주관하는 관전에 대항하기 위해 개인이 자비로 전시회를 여는 이른바 개인전의 효시가 되어 1870년대 작품에서 피사로는 산업과 전통적인 노동, 노동자와 부르주아가 공존하는 지방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은 현실을 기록할 뿐 아니라 소망을 반영하는 만큼, 피사로의 정치적 견해는 거기에 이미 드러나 있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좀 더 솔직히 밝히게 되었지만, 여전히 회화적으로 완곡하게 표현되었고 언제나 비폭력적이었다


드가의 입장을 검토하지 않고 인상주의와 정치에 관한 논의를 끝낼 수는 없다.


피사로는 예술적 권위를 경멸한 드가에게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면서,


“그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지독한 무정부주의자(물론 예술에서)라고 말했다.


실제로 피사로와 드가는 부르주아적 패권주의를 싫어했다.


하지만 드가의 정치적 입장은 좌익이 아니라 우익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드가에게 있어, 유토피아는 아버지의 은행이 파산했을 때 함께 사라져 버렸다.


생계를 도맞게 된 처지는 그에게 잃어버린 특권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물론 드가는 자기 예술에 열정적으로 몰두했다. 운명이 갑자기 바뀌었는데도, 과학적 관찰과 새로운 기법에 대한 집착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조차 그의 재치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차별을 집대성한 데에서 삐뚤어진 적개심을 보았다. 매춘부 연작에서 보이듯, 그는 관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점잖음을 쾌활하게 조종할 수 있었다.


그는 모델들을 모질게 대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모델이었던 알리스 미술은, 그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려고 했을 때 그가 어떻게 감정을 폭발시켰는가를 토로하고 있다.


피사로는 미술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력을 느꼈고, 제3공화정은 공립학교 교과과정에 미술 과목을 도입하여 그 생각을 조장했지만, 드가는 거기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드가의 비난은 미술과 정치에 대한 관점이 결국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의 정치적 이상은 사회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라고는 전혀 없는 과거의 불평등 사회였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를 르누아르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르누아르도 평등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화가라는 직업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고 했다. 르누아르는 과학기술의 영향을 개탄하고, 거기에 희생되는 노동자들의 분노를 두려워했다.


그의 시각은 전원적이고 목가적이었으며, 충돌이나 기계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서 르누아르에게 보수주의는 그가 힘겹게 얻은 지위를 지키는 것이었다.


드가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일화는 드레퓌스 사건 때 군부를 지지한 일이었다.


1894년에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의 서류철에서 프랑스인에게 건네받은 기밀문서가 발견되었다.


프랑스 육군 방첩대는 필적의 유사점을 근거로, 알자스(독일에 할양된 지방) 출신의 유대인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간첩혐의로 체포했다.


드레퓌스는 군사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고 계급을 박탈당한 후 ‘악마의 섬’으로 알려진 프랑스령 기아나로 유배되었다.


2년 뒤., 방첩대장 피카르 중령은 독일 무관인 헝가리 태생의 프랑스 육군장교인 에스테라지 백작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에스테라지의 필적 견본을 보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한 피카르는 재심을 요구했지만, 1898년에 에스테라지는 무죄판결을 받았고, 피카르는 좌천되어 알제리로 전속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한 세대 전체를 특정 지은 유명한 재판사건이 되었다.


그의 무죄를 주장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졸라였다.


1898년 1월 13일 자유주의적 신문인 “오로르, (새벽) 1면에 실린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적 논설로 꼽힌다.


마네를 옹호한 이후 투철한 정의감으로 명성을 얻은 졸라는 1년 징역형과 3천 프랑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드레퓌스 파일에 위조문서가 덧붙여진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육군은 1899년에 재판 결과를 재학인하고, 우익은 자살한 문서 위조자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싸움은 한 남자의 운명을 뛰어넘어, 전통과 군대의 명예를 옹호하는 기득권 진영 대 아웃사이더 진영, ‘벼락부자’ 대 좌익의 대결로 발전한 지 오래였다.


드레퓌스가 명예를 회복한 것은 1906년에 이르러서였다.


보수적인 시골 사람과 노동계층은 돈을 손아커에 쥐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질적인 집단을 불신했다. 르누아르의 반유대주의는 바로 이 불신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계다가 그것은 우익만이 아니라 좌익에도 풍토병처럼 번져 있었다.


드가는 많은 유대인 친구를 갖고 있었다.


그의 가족과 친하게 지낸 교양 있는 친구들과 그 자신의 후원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드가의 반유대주의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뿌리 깊은 자기혐오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위선적인 성격 때문에 유대인에게 더욱 지독한 반감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1880년대에 금융계에서 일어난 스캔들도 반유대주의의 원인이 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많은 프랑스인들이 자신을 규정하는 계기가 돼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인상파 화가로서의 드가를 해명하는 데 어명게 도움이 되는지에 초점을 갖추어야 한다.


드가는 유대인의 특징을 한 것 과장하고, 매부부리코에 하이라이트를 주어 그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른바, 현실을 미술이 어떻게 구축하는가를 염두에 두면, 인종차별론에 근거한 드가의 자연주의가 유대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어떻게 영속화했으며, 그리하여 우익 정치에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외모를 미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심스러운 속삭임과 은밀한 공간, 가려진 시야로 메의 사업에 무언가 구린 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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