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르, 비평파 주장에 대하여

출처 : 앵그르의 예술한담

by 조 씨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Jean-Auguste Dominique Ingres]

1780년 8월 29일 프랑스 몽토방에서 태어났으며 19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앵그르는 역사화에서 니콜라 푸생과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전통을 따랐으나, 말년의 초상화는 위대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16세 때 파리로 나왔고 1801년 (아가멤논의 사절들)로 로마대상을 받았다.

[아가멤논의 사절들 1801]
(어린 시 절 이탈리아 미술에 영향을 받는다.

아가멤논 사절들 그림은 라파엘로에 작품과 흡사하다)


1806~1824년, 18년간 이탈리아 로마에 체류하면서 고전회화를 연구했으며, 특히 라파엘로에 심취했다.
이 시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목욕하는 여자) (유피테르와 테티스) (라파엘과 포르나리나)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1824년 파리로 돌아와 ‘고전파의 대가’로 환영받으며 르누아르 드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루이 13세의 성모에의 서약)을 살롱에 출품해 이름을 알리게 되고. 들라크루아가 이끄는 신흥낭만주의 운동에 대항하는 고전파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1834년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 관장으로 재직하다 1841년 파리로 돌아와 (나폴레옹 1세 예찬) (잔다르크) (샘) (터키 목욕탕) (박사들과 함께 있는 예수) 등의 길 작을 남겼다.
(그랑드 오달리스크) (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호메로스의 예찬) (리비에르 부인상) (베르팅씨의 초상) (자화상)등 19세기 고전주의의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육자 시선의 예술론 : 비평파 주장에 대하여

알 수가 없는 성공이 증명하는 총체적 결과는 있다. 하지만 그 완성작의 세부 사항들, 그 많고도 많은 고귀한 선들, 혹은 그들이 치러야 했던 모든 것이 그들이 전혀 내놓지 않았던 것은 소수의 감식가들만이 은밀히 알아차리고 음미할 수 있다. 대중의 박수갈채는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 질시는 항상 그 얘기를 숨기고 무지는 결코 그 얘기를 들을 수 없다.
만약 그런 얘기가 제대로 알려진다면 진정한 재능의 첫째가는 보상이 될 것이다.


“세상의 위대한 일들은 대개 다수의 편견과 싸우든가 편견을 제공하든가 하는 단 한 사람의 재능과 결의가 이루어낸 것이다.”
볼테르 (1694–1778)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알려져 있는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보지 못하고 1778년 5월 30일에 죽었다.

그렇다, 그 재능이 양호하다면 잘된 일이다.
그러나 재능이 형편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야만, 아름다움과 참에 영원히 거하는 것을 반대하는 부조리, 말라붙은 영혼과 마음, 무(표), 공허, 황무지의 황량한 적막에 이르고 말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정당하게 심판한다
마땅찮은 작품들이 거짓되지만 황홀한 선으로 한 세기를 현혹할 수는 있다.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세를 따르게 마련이다.
확고한 취향이란 거의. 진정한 재능만큼이나 드문 까닭이다. 취향이라!
취향은 드러난 장점을 음미할 때보다 결점들로 빽빽하게 뒤덮여 있는 장점을 알아보고 찾아낼 때 제대로 발휘된다.
어떤 작품들은 작업한 지 얼마 안 된 불분명한 토대만으로도 완성작보다. 탁월한 완벽성을 보여준다
좋은 취향과 좋은 행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슷한 데가 있다.
좋은 취향이란 운 좋게 타고났을 뿐 아니라 자유로운 교육을 통해 계발된 탁월한 조화 감각이다.
예술계에는

ㅡ 회화뿐만 아니라 시와 음악에서도 ㅡ

다수에게 자연스레 영합하는 저열한 스타일밖에 없다.
예술의 가장 숭고한 노력은 교양 없는 이들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우아하고 섬세한 취향은 교육과 경험의 결실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에는 그러한 취향을 우리 것으로 삼고 계발할 가능성만 지닌다. 처음부터 사회의 규범을 배우거나 그 규범에 맞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는 가능성만 가지고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취향을 타고난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이 선까지만 유효하지, 결코 그 이상은 아니다.
예술적 걸작에 대한 연구 혹은 관조는 자연에 대한 연구를 한결 풍부하고 수월하게 하는 밑거름이라야 한다 그러한 연구가 자연에 대한 연구를 저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걸작은 자연에서 도출되고 자연에 기원을 두기 때문이다.


회화가 중요한 대상으로 여기는 이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다른 그 어느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어떤 별개의 아름다움, 자연이 선사하는 아름다움보다 한층 우월한 아름다움을 생각해 내고 육감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모든 관념은

ㅡ 올림포스 산에 대한 관념,

거기 거하는 신들에 대한 관념까지도 ㅡ

순전히 지상의 사물들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방대한 예술 연구 일체가 이 사물들을 모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회화의 가장 주되고 중요한 부분은 자연이 이 예술에 가장 합당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냈음을 깨닫고, 그것들을 통해 옛사람들을 느끼게 하는 방법과 취향을 좇아 선택하는 데 있다

가장 빼어난 조각상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ㅡ특히 각기 떼어놓고 보면 ㅡ

결코 자연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하라 우리의 생각이 그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고양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기껏해야 아름다운 것들을 조합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을 뿐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리스 조각상들이 자연을 넘어선다면 그건 자연이 한 개체에게 한꺼번에 다 주지 않는 여러 아름다운 부분들을 조각상에 모아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는 자연의 성소(뿌미)에 받아들여진다. 그는 신을 알현하고 더불어 대화하는 영광을 누린다 그는 ‘피디아스(그리스의 조각가)’처럼 신의 영광을 보고 고대 신의 언어를 배워 인간들에게 전한다.
참된 이는 늘 아름답다.

여러분이 범하는 모든 과오는 취향이나 상상력이 모자라서 빚어지는 게 아니다.
자연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했기에 과오를 범하는 거다. 라파엘로와 저기 저것(살아 있는 모델, 즉 자연)

다르지 않았다.
라파엘로가 어떤 길을 택하였더냐? 그 자신은 무척 겸손하였다.
라파엘로라는 사람은 온전히 복종하였다
그러니 우리도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할 것이다. 조각은 준엄하고 완고한 예술이다.
또한 고대 사람들이 종교에 바쳤던 예술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연연치 말아라. 자기 할 일만 신경 써라.

그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만 해라. 알을 밴 개미를 보라.

개미는 멈추지 않고 제 길을 다 간 후에야 비로소 다른 개미들이 어디 있나 살핀다.

여러분이 좀 더 나이를 먹고 나면 이 개미와 같이 남들을 살필 수 있을 것이요,

자신의 작품과 라이벌들의 작품을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오직 그때에만 전체를 보아도 괜찮다. 그때가 되어야 전체의 가치를 제대로 가능할 것이다.

나쁜 감식가, 나쁜 예술가는 땅속에서 튀어나온 악마들 같다.

그들은 모든 것을 뒤엎고 파괴하고 지배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념이 있고 그들보다 정신력이 강하다.
그들은 눈이 멀었으나 우리는 선명하게 보니,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불행하다.

(1866)


지금 이때까지 나는 세간의 말이 두려워한 발짝이라도 물러선 적이 없다.
나로서는 오랜 신념을 충실히 지키는 것만 한 명예가 없기 때문이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 신념은 결코 저버리지 않으리라.

(1866)

아름다운 모델들을 자주 관찰한 결과를 미의 전형이라고 부른다. 가령, 굵은 목은 십중팔구 풍채 좋은 사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목은 남성미의 조건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모델의 목이 가늘더라도 굵게 고쳐 그리지는 말라. 그러나 그 가느다란 느낌을 과장하는 것도 삼가라.
특징을 잘 표현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과장은 허용된다. 특히 아름다움의 요소를 확 터뜨리거나 부각하는 것이 중요할 때가 그렇다.

수녀들은 모두 고와 보인다.
내 경험상 수녀나 수도사의 단순하고 수수한 옷차림이 풍기는 인상의 절반은 인공적인 장식이나 공들여 꾸민 태가 없다는 점에서 나온다고 본다.

또 나는 종종 교회에서 독실한 신자들의 얼굴이 풍기는 자애로운 느낌을 포착하고 음미했다. 그들이 성모상이나 성인상을 마주할 때의 신심은 분명 가없는 만족감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그들의 마음 상태가 부러웠다.

달콤한 감정들은 다 죽여버리고 무미건조한 승리와 냉대로 우리를 스토아적인 아파테이아 상태에 빠뜨리는 이 철학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저주해 마지않았다.
내면의 고요와 평화가 띠는 겉모습을 모방하고 연구하는 것만큼 예술에 요긴한 밑거름이 있을까!

여기에는 영혼에 줄 수 있는 위안, 용기가 되는 본보기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가히 주목할 만한 볼거리까지 모두 다 있다 참이라는 관점에서는 다소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조금 더 나아가는 편을 나는 좋아한다.
내가 아는 바, 진정한 참과 있을 법한 것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대개 머리카락 한 올만큼만 더 나아가주면 그걸로 족하다
실생활에서 지혜가 영혼의 가장 고상한 표현인 것처럼, 예술로 표현한 인간의 이미지에서 차분함은 육체의 첫째가는 아름다움이다.
참된 것을 기꺼이 나타내고자 힘쓰자 사람의 마음은 식초(엄격함)가 아니라 꿀과 설탕(자발적 즐거움)으로 얻는 것이다
추한 작품이 나오는 이유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 앞에 전율하라! 두려워 떨되 의심하지는 말라!
예술은 자연 그 자체로서 취할 수 있는 자연과 심히 닮아 있을 때에만 매우 높은 완성도를 지닐 수 있다. 예술의 가장 큰 성공은 예술이 감취 져야만 이루어진다.
참된 것을 사랑하라. 참된 것은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이 능히 그것을 분별하고 감지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안목 통찰력 있는 눈을 갖추자.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뿐이다. 여러분이 이 다리를 추하다고 한다면 나도 그렇게 볼 만한 이유가 있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여러분이 내 눈으로 이 다리를 본다면 이 또한 아름답다 할 거라고.

예술은 둘이 아니다. 예술은 오직 하나다.
영원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초석으로
삼는 단 하나의 예술. 다른 데서 더 치명적인 방법으로 구하려는 자들은 실수하는 거다.

예술가를 자처하는 그들은 ‘새로움’의 발견을 설파하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새로운 것이 뭐라도 있긴 한가?

모든 것은 이루어졌고, 모든 것은 발견되었다.

우리의 소임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거장들을 본받아 자연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제시하는 이 전형들을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을 우리 진심을 담아 표현함으로써 아름다운 작품에 필수적인 이 순수하고 건실한 스타일로 그것들을 드높임으로써 마땅히 할 바를 다하는 것이다.
고전 작품들에 대한 모방과 연구가 타고난 재주와 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치 않다!

독창적 전형으로서의 인간은 항상 여기 있다.
고전파가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고자 한다면 그 전형을 참조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수단을 써서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 전형을 참조하라.
우리가 할 일은 아름다움의 원칙과 조건을 발견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뭔가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원칙과 조건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그것들을 적용하는 거다.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새로움이 끼어들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족하다.

그러나 인간은 변화를 좋아하고 예술에서의 변화는 대개 퇴폐의 원인이다.
무지한 백성은 움직이는 대상들을 마주 할 때나 그림의 특징이나 효과를 가늠할 때나 늘 취향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폭력 흑은 과장을 목도해야만 흥분하고 전율할 것이다. 예술에서 그는 늘 부자연스럽고 경직된 자세들, 눈부신 색상을 우리가 고대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고귀한 단순성, 평온한 위대함보다 선호할 것이다.


지고한 아름다움은 아무리 사랑하고 찬탄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름답다는 꽃 중에서 어느 꽃이 장미와 견줄 만하고, 창공을 누비는 새 가운데 어떤 것이 제우스의 독수리에 비교될 수 있을까?
호메로스의 작품, 피디아스의 조각상 라파엘로의 그림, 글루크의 서정비극 하이든의 사중주나 소나타에 비견할 것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보다 더 아름답고, 더 거룩하고, 따라서 더 사랑할 만한 것은 없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을 뜨뜻미지근하게 칭송하면 되레 모욕이 된다
예술의 걸작들을 통해서 취향을 부단히 갈고닦아야 한다. 그 외의 것들에 매달려봤자 시간 낭비다.

저열 한아름다움에 시선을 던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연구해서는 안 되며. 모방해서는 더욱더 안 된다. 옛사람들은 여행을 가거나 시골로 내려갈 때 항상 예술품, 그림, 조그만 청동상 따위를 가지고 갔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항상 제욱시스나 아펠레스가 퀴벨레 신전 사제를 그린 작품을 가지고 여행길에 올랐다.

우리도 일상생활을 하는 장소에서 벗어날 일이 있으면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그린 크로키나 복제화를 지참하자. 우리의 취향을 갈고닦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유혹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하자 벗들을 아름답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벗들이 거짓에 빠졌을 때만은 예외다.

그런 때에는 아름답고 선하고 유익한 모든 것에 대한 진실하고 현명한 권고로 그들의 영혼과 마음을 지원하고 군에게 하는 것이 참다운 우정이자 자비다.

(뭔가를 쥐어주는 것만이 자비를 아니다)


거들먹대는 자, 무지한 자를 추어올려봤자 격려가 되기는커녕 몇몇 과오를 불러일으키고 많다.

벗들의 비판에서 좋은 열매를 거두려면 그들의 성격, 취향, 정신적 습관을 잘 파악하여 그들의 관찰이 얼마나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 알아들필요가 있다.
한 인간의 예술성을 발휘하게 하는 통찰력은 학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의 판단에도 어긋나지 않는 용법으로 그를 이끌어야 한다. 예술가를 인도하고 작품의 제작을 주관한 그 순정한 취향이 위대한 예술과 스타일의 비평가에게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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