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파라

출처 : 국방일보 / 조선일보 : 필자. 안상윤 (저널리스트)

by 조 씨

‘ 공주골’서 1930년대 경성 젊은이들의 ‘핫플’

[경정공주 궁터에 세워진 황궁우(왼쪽)와 조선호텔]

소공동은 작은 공주 골’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해 소공주동을 거쳐 소공동이 됐다.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1387~1456)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조선 3대 왕 태종은 재위 3년인 1403년 둘째 딸을 영의정 조준의 아들 호군 조대림에게 서둘러 시집보냈다. 명이 공주와의 정략결혼유 요구하고 있었던 까닭에 마음이 급해진 태종은 조대림이 모친상을 당한 직후였지만 3년 탈상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결혼을 진행했다. 애지중지하는 딸을이였기에 보기 싫었던 것이다.
형제의 난을 정도로 강한 카리스마를 비쳤던 태종도 명의 횡포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경정공주는 이곳에서 네 딸을 낳았다.
그리고 태종은 딸을 보러 자주 이곳에 행차했다고 전해진다.
1897년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스스로 화제에 오르면서 제국의 상징인 환구단 이곳에 세워졌다. 광무 3년이던 1899년에는 황궁우 도 지었다. 국운이 쇠퇴하면서 환구단은 1913년 철거되고, 이듬해 그 자리에 6700평 규모의 한국 세 번째 호텔 조선호테루가 들어서면서 공주골은 모습이 바뀐다.
8각 3층의 황궁우 만이 남아 당시의 흔적을 전한다. 조선호텔이 생기자 호텔 커피숍은 단연 서울의 명소가 됐다.
소공동입구 우측 팔레스 호텔이 낙랑파라 자리다
1902년부터 시작했다가 사라진 옛 손탁 호텔 커피점 이후 이 위상은 1930년대 명동과 소공동, 충무로, 종로 일대에 다방이 들어설 때까지 지속됐다.
아이스크림도 최초로 팔았다. 우리나라 기업 ‘빙그레’가 생산하고 출시하기 전까지는 이곳 아이스크림이 유일했다.
조선호텔은 1914년 조선철도 호텔로 바뀌아으며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정 사령부로 쓰이다가 1948년 정부수립 후 ‘조선호텔’로 개명했다.
일제강점기에 가장 고급스러운 숙박시설이었던 까닭에 이곳에는 유명 인사가 많이 거쳐 갔다.
경성에서의 생활을 자서전 형식으로 편집된 ‘호박 목걸이’의 저자 메리 테일러가 목격해 전한 바로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을 작곡한 신비주의자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로비에 나타나 바이올린 연습을 했다고 한다.
1920~1930년대 미국의 카우보이이자 유머 작가, 사회비평가 겸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린 월로 저스가 로비에서 밧줄을 던져 조각상과 샹들리에 위에 올가미를 씌우는 묘기를 보이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런던 ‘메일리 데일’지의 언론인과 이탈리아 전기 공학자, 영국 출신 용병으로 중국 동북의 군사고문인 대령 등도 투숙했다.
유명 인사들은 일본 온 김에 경성으로 들어온 언론인, 예술가, 영화배우 등 셀럽 밎광산 매입을 위해 날아온 투기성 사업가가 대부분이었다.
소공동 조선호텔 앞에는 청계천 지류가 흘렸으며 일제강점기 장곡천이라 부른 이 하천은 1930년대 조선 젊은이들 사이에 힙’한 거리였다.
그 중심에 시인. 이상이 아지트로 삼았던 다방 ’ 낙랑파라(parlour)’가 있었다

[1930년대 예술가들의 아지트, ‘낙랑파라’]
[낙랑파라 전경. 출처 :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종로 4가 뒷골목 한편에 자리 잡은 낙랑파라는 1932년 7월 7일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맞은편 장곡천정 105번지에 개업했다.
단순한 커피집이 아니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검은 커피를 앞에 두고 문장을 고민하던 시인들, 화선지 위의 기류처럼 서로의 사상을 교류하던 화가들, 그리고 이름 없는 청년 예술가들이 매일같이 출입하던 예술가의 거실’이었다.
낙랑파라의 ‘파라’는 응접실, 거실을 뜻하는 단어 ‘parlour’의 일본식 표기에서 왔다.
일본에선 양과자와 음료수를 주로 파는 경양식 음식점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됐다고 한다.
낙랑파라는 2층짜리 한양 절충식 건물이었다. 1층은 다방, 2층은 화실로 꾸몄다.
목조로 뼈대를 만든 후 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에는 기와를 얹고, 양식 유리창을 설치했다. 밖에서 보면 양식 건물로 보였을 것이다.
실내엔 등나무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야자수를 들여놓아 이국적 분위기를 냈다. 당시 일본과 유럽의 고급 호텔이나 카페에서 사용한 인테리어 아이템이었다.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앞 낙랑파라 단골 멤버들.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이다. 낙랑파라는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이 다방의 개업자는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한 화가 이순석이었다.
고약 왕’ 이명래의 동생으로 동경미술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이순석이 1932년 세웠다.
이순석은 졸업 후 화신 백화점에서 쇼윈도 배치, 광고 도안 등을 맡았다. 해방 후 서울대학에 미대가 만들어지자 응용미술학과를 개설해 상품 도안과 실내디자인등 자신이 배운 실 용미술을 가르친 인물이다.
다방 ‘낙랑파라’는 종전 경성에는 없던 스타일의 공간이었다.
1920년대 평양부근에서 대대적인 조사를 벌이던 낙랑유적에서 영감을 얻어 이름을 ‘낙랑”이라 짓고 , 시대 유물들을 카피해 인테리어 장식을 했다.
이것이 빼앗긴 시간을 살던 당대 젊은이들의 의 식과 부합되면서 일약 명소로 부상했다.
내부를 찍은 1934년의 사진에는 파초와 선풍기, 왕골 의자, 테이블 등이 있어 당시 일반적인 경성 다방의 풍경과는 차이를 보인다.
미술을 공부했던 그가 차린 공간은 단숨에 문화 예술계의 중심이 되었고, 낙랑파라는 화가, 문인, 지식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살롱으로 기능했다.

‘더치 페이‘의 선구자, 이상?!
‘한 테이블에서 같이 차를 마실 때, 그중 하나가 찻값을 치른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겨우 하나 남은 염치요, 관습이다. 그러나 34~5년 전 그 시절에 이상은 이미 그런 폐습을 탈피한 선각자였다고 볼 수 있다.
희희낙락 담소하다가도 일어설 때는 제가 마신 찻값으로 10전 경화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상이 ‘더치 페이’ 선구자였던 것이다.
1932년 7월 7일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건너편 장곡천정(현 소공동) 105번지에 문을 연 ‘낙랑파라’는 요즘 말로 모더니스트들의 ‘핫플’이었다.
이상, 박태원 등 구인회와 구본웅, 길진섭, 김용준 등 목일회(木日會) 멤버들이 단골로 모였다. 예술을 운동의 도구로 여기는 프로문학, 프로예술과 거리를 둔 모더니스트들의 아지트였으며 지금 플라자호텔이 들어서있는 소공로 입구다.
1933년 10월 삼천리 잡지에 박옥화는

‘인테리어 청년 성공직업‘, 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남국의 파초, 축음기, 커피로 도회적, 이국적 분위기-


‘대한문 앞으로 고색창연 옛 궁궐을 끼고 조선호텔 있는 곳으로 오다가 장곡천정(町) 초입에 양제(洋製) 2층의 소서한 집 한 채 있다. 입구에는 남양(南洋)에서 이식하여 온 듯이 녹취 흐르는 파초가 놓였고, 실내에 들어서면 대패밥과 백사(白沙)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다가 슈베르트, 데도 릿지(독일여배우 마들레네 디트리히) 등의 예술가 사진을 걸었고, 좋은 데생도 알맞게 걸어 놓아 있어 어쩐지 실내 실외가 혼연조화되고 그리고 실내에 떠도는 기분이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준다. 이것이 ‘낙랑 팔라’다.


커피, 홍차 1잔에 10전, 토스트도 팔아
낙랑파라의 분위기는 단골 박태원 덕분에 소상하게 알 수 있다.
1934년 8월 1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엔 낙랑파라가 자주 등장한다. ‘다방의 오후 2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이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백수나 다름없는 인텔리 청년들이 커피를 마시며 소일하는 곳이었다. 박태원 친구였던 이상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삽화를 그린 덕분에 낙랑파라의 내부를 더 알 수 있다.
낙랑파라 메뉴는 커피와 홍차, 소다수, 아이스크림, 칼피스 등이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토스트를 먹는 손님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간단한 음식도 팔았던 모양이다. 낙랑파라의 커피, 홍차 가격은 10전이었고, 아이스크림, 코코아, 칼피스는 15전 정도였다.


예술가들의 살롱
낙랑파라가 우리에게 '질문하는 장소'였다.
예술이 무엇인지, 언어는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조용히 커피 한잔을 올려놓는 방식으로 말이다.
특히 시인 이상은 거의 매일 들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인맥을 형성하고, 본인의 작품 세계를 더 넓혀갔다. 종종 자신이 쓴 시나 산문을 낙랑파라에서 낭독하거나,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할 원고를 이곳에서 마무리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단순한 조선의 찻집이 아니라, 근대성과 모던보이-모던걸 문화, 그리고 식민지 경성의 복잡한 감정들이 얽힌 중간지대였음을 상징한다.
진한 커피 향과 담배 연기, 그리고 반쯤 번역된 시어들이 섞여, 이곳은 사람을 끝어들이는 공기'를 만들어냈다.
다방 문화는 당시 경성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단순한 소비 공간이 아니었다.
인쇄소에 원고를 보내기 전 마지막 수정을 하는 곳, 문학잡지나 동인지의 기획을 논하는 회의실, 때로는 시의 낭독이 일어나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전근대의 서원이나 서재에서 벗어난 근대적 ‘공론장’으로서의 다방은, 특히 조선의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표현의 플랫폼이었다.
서울 다방 문화의 시작점 종 하나로 기록되지만, 동시에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커피와 예술이 뒤섞인 이 비좁은 공간은, 시대의 정서와 감각을 품고 있었고, 문학사와 미술사의 중요한 출발선이 되었다. 이후 종로 일대에는 수많은 다방이 생겨났지만, 낙랑파라처럼 예술가들의 감정을 농축하고 나눈 공간은 드물었다.
시인 김소운(1907~1981)이 이곳에 모이던 이상, 구본웅 등 모더니스트들의 면면을 소개했다. 박태원의 소설 ‘구보 씨의 일일! 에는 이곳에서 토스트를 먹는 모습이 묘사 돼 있다.

[시인 이상이 그린 ‘낙랑파라’ 삽화. 박태원이 쓴 신문연재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들어있다.

낙랑파라 내부를 묘사했다.

등나무 의자와 커피, 음료수 잔 뒤로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무료하게 앉아있는 마담의 모습이 보인다. ]

[조선중앙일보 1934년 8월 14일 자]

1935년 이순석은 ‘낙랑파라를 여배우 김연실에게 넘긴다. 김연실은”나운규의 영화 ‘잘 있어 라’로 데뷔한 후 여러 영화에 출연하면서 인기가 높았다”라고 전해진다. 동생이 촬영감독 김학성이고, 올케가 배우 최은희였다.


“귀여운 외모에 노래도 잘해 못 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였다”라고 전한다(삼천리).
“일을 가지지 못한 피로한 젊은이들도 등의자에 앉아 레코드를 들었다.”

(소설가 구보시의 일일!)


실내장식은 구본웅의 계모였던 변동욱이 말아했다. 이 변동욱의 열아홉 살 아래 여동생이 이상 전처였다가 김환기의 부인이 된 변동림이다. 변동림은 김환기와 재혼하며 ‘김향안’으로 했다.
낙랑파라는 커피만 파는 게 아니라 서구의 살롱처럼 문화예술 이벤트를 열어 품격을 높였다.

[낙랑파라에서의 이상, 박태원, 김소운(원쪽부터 ).]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앞 낙랑파라 단골 멤버들.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이다. 낙랑파라는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투르게네프 50년제, 길진섭 소품전시회 열려
낙랑파라에선 ‘삼천리’ 소개처럼 미술전시회, 출판기념회, 음악회 같은 이벤트가 수시로 열렸다. 1933년 8월 22일 저녁 8시,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 50주기 기념제가 이곳서 열렸다.
(‘투르게네프 50년祭 기념’, 조선일보 1933년 8월 22일)
1936년 3월 15일 서양화가 길진섭 소품전이 열린 곳도 낙랑파라였다. 낙랑파라 주인인 이순석이 친구의 곤궁한 생활을 도와주기 위해 마련한 작은 전시였다. 길진섭(1907~1975)은 길선주 목사의 막내아들로 193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화가였다. 정지용 첫 시집 ‘정지용시집’(1935)과 ‘백록담’(1941), 이육사의 유고집 ‘육사시집’(1946)을 디자인하고, 요절한 이상의 데스마스크(안면상)를 떠 준 마당발이었다.

도쿄미술학교 도안과 출신 이순석
‘낙랑파라’ 주인 이순석(1905~1986)은 광복 후인 1946년 서울대 미대 교수로 부임해 1970년 정년퇴임까지 후학을 양성한 디자인, 석조 공예분야 1세대다.
1931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이순석은 그해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국내 첫 공예 도안전을 개최했다.
화신백화점 대표 박흥식에게 스카우트 돼 광고부 주임으로 일하다 1년여 만에 관두고 낙랑파라를 차렸다. 당시 덕수궁 박물관에 수시로 다니면서 공예공부를 했는데, 근처에 화실을 낼 겸, 카페를 낸 것이다.

‘삼천리’에 따르면 매달 매상은 300원에 비용이 200원쯤 들고, 순수입은 불명(不明)이라고 썼다. 이순석은 ‘프랑스 파리에 유행했다는 살롱과 비슷해서 문인, 화가 등 예술가나 예술가 지망생들이 주로 모여 고전음악을 감상하면서 예술을 논하고 작품 구상을 하는 등 일종의 예술가들의 집회소 구실을 했다’
(‘노교수와 캠퍼스와 학생’ 141, 경향신문 1974년 3월 11일 자)
회고했다.
경영이 시원찮았던지 이순석은 1933월 겸 배우 김연실에게 넘긴다. 김연실은 가게 이름을 ‘낙랑’으로 바꿨지만, 그 후에도 종종 ‘낙랑파라’로 불리기도 했다.

복혜숙의 ‘비너스’, 유치진의 ‘플라타느’
카페는 1920년대~1930년대 도회적 분위기를 즐기는 곳이자, 모던의 상징인 ‘핫플’로 떠올랐다. 예술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끽다점, 카페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영화감독 이경손이 차린 ‘다방 카카듀’(1927년 개업), 영화배우 복혜숙의 ‘비너스’(1928년 개업), 영화배우 겸 미술감독 김인규의 ‘멕시코’(1929년), 이상의 ‘제비’(1933)는 종로의 명물이었고, 극작가 유치진의 ‘플라타느’가 낙랑파라와 함께 소공동을 지켰다.

카페의 르네상스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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