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

벨 에포크 (아름다운, 좋은 시절) 1871~1900

by 조 씨

벨 에포크
(Belle Époque [balepak])
(아름다운, 좋은 시절)
1871~1900
19세기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유럽이 번성했던 시대를 말한다.

주로 19세기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914 년)까지 프랑스가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 발전으로 번성했던 시대를 일컫는 데에 회고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벨 에포크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말, 에드워드 시대와, 독일의 빌헬름 시대와 대응하는 프랑스의 시대를 의미하나, 대부분의 유럽 국가의 이 무렵 시절을 말할 때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표현이기 도 하다.
이 표현은 1930년대에 전쟁 전 15년간을 일컫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역사학자 도미니크 칼리파에 의하면, 앙드레 알레 오가 1940년 11월 라디오파리 에서 진행한

“아 좋은 시절! 1900년의 음악 크로키”

라는 이름의 라디오 방송이 확실한 첫 용례라고 한다.
이 회고적인 명칭에는 현실적으로 그 시대를 보여주는 측면(팽창, 무사태평, 발전의 연속, 쾌활 등)도 있으며 꿈같던 시절을 회상하는 측면도 있다.
역사학자 장 가리그, 필리프 라콩브라드, 도미니크 루존 등에 의하면, 이 표현은 더 이른 1919년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
( Alexandre Gustave Eiffel)
1832년 12월 15일 ~ 1923년 12월 27일

그는 프랑스의 건축가, 구조 공학자이다.
프랑스 파리의 에콜 상트랄에서 공과대학원 과정을 이수한 이후 다리 놓는 기술을 익혀 가라 비 고가교, 두로강 철교 등을 만들었다.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를 위해 에펠탑을 건축하였다.
에펠탑은 완공 시점부터 1930년까지 41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으며 오늘까지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화 상징물로 여겨진다.

그 외에도 파나마 운하의 수문 공사,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등 여러 나라의 유명한 건축 물들의 설계에 관여하였고 1823년 12월 15일 프랑스 디종에서 사망하였다.

-생애-
1871년 6월 에펠은 그 어떤 자유를 위한 계몽적이고 공화적인 사업보다도 자기 회사의 재정적 전망에 훨씬 더 집중 되어 있었다.
에펠은 대단히 실제적인 사람으로, 서른아홉의 나이에 이미 성공을 이루고 이제 필생의 사업이 될 일을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스스로 숙부의 식초 공장을 운영하는데 평생을 바칠 뻔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진로를 위해 그는 야금학, 기계학, 토목공학 등의 분야를 포기하고 화학을 공부했 는데, 결국 그가 엔지니어로서 성공한 것을 생각하면 어이없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집안의 분란 때문에 젊은 에펠은 식초 공장을 물려받지 못했고, 그 덕에 자유롭게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처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운이 좋게 집안의 연줄 덕분으로 그는 생라자르역 근처에 있던 샤를 네뵈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때는 1856년, 네뵈의 철공소는 급속히 발전하는 철도 사업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고 에펠이 면접에 긴장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매형이 운영하는 파리 인근의 주물공장에서 잠시 일한 적은 있었지만, 그의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았다. 재능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듯 에펠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에 싫증을 냈고 그리 잘 해내지도 못했다.
간신히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파리의 콜레주 생트바르브 등록했을 때도 권위 있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들어갈 만한 성적에는 못 미쳤다.
대신에 그는 토목공학을 가르치는

에콜 상트 랄 [중앙 공과 학교]을 선택했는데,

이 학교는 당시

토리니가 3번지 살레관 (오늘날의 피카소 미술관)

안에 있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학교에서 그는 값진 실무 교육을 받았다. 그래도 네뵈가 에펠을 개인 비서로 고용했을 때, 그는 그의 학교 성적보다 자신이 본능에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청년의 앞에 놓인 눈부신 경력을 짐작게 할 만한 것은 달리 없었으니 있었던 것은 아마도 가문에 흐르는 기업가 정신과 탁월 한 장인 포스 기질이었을 것이다. 에펠의 아버지 쪽 선조들은 베스트팔리아의 아이펠 지방에서 파리로 이주하여 직조공으로 또 타피 스리 제작자로 성공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집안의 진짜 원동력은 에펠의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디종의 성공한 목재상의 딸이었던 그녀는 집안의 석탄 사업을 물려받아 그 지방의 주요 석탄 공급 자가 되었다. 결혼도 출산도 사업을 중단시키지 못했고, 그녀는 성실하게 그 일을 해나갔다. 에필의 집안이 부유해진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별로 유망하지 못한 군대 경력을 포기한 후 지방정부의 행정관으로 눌러않아 있었다. 젊은 에펠은 디종에서 외할머니의 손에 자라다가 학업을 마치기 위해 파리로 상경했다.

파리 생활은 즐거있지만 취직 문제는 잘 풀리지 않다가 스물세 살 때 샤를 네뵈와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 만남 이후 마치 그의 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갑자기 점화 된 것처럼, 젊은 천재성이 급속히 개화하기 시작했다. 에펠은 회사의 광범위한 사업들을 파악해 가는 한편, 따로 경제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철강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며 경험을 쌓아나갔다.

얼마 후 네뵈가 회사를 벨기에의 큰 회사에 팔았을 때, 에펠은 거기서도 중요한 자리를 얻었다. 바야흐로 명소 엔지니어 에펠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보르도의 가론강 위에, 폭이 넓고 물살이 빠른 그 강에 철도를 놓아야 했을 때, 네뵈는 에펠을 조수로 삼았다. 그러고서 그에게 2년 기한의 사업을 남겨놓은 채 곧 은퇴해 버렸는데, 스물다섯 살 난 엔지니어는 이 도전에 멋지게 능력을 발휘했다.
신기술을 도입하는 한편 탁월한 경영 능력을 입증하며 약속한 기한 내에 아무 사고 없이 사업을 완수한 것이다. 대단한 업적이었다. 이 일에서 에펠은 여러 가지 재능을 드러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한 가지는 건자재로써의 강철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설계와 건축 방법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아본 것이었다. 목재와 석재는 건축 과정에서 임기응변을 허용하기에, 이전 수세기 동 안 대성당이나 성은 짓는 동안에 다시 의논하고 고쳐가며 짓는 것이 가능할 뿐 만 아니라 때로는 바람직한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펠은 이런 시행착오적 접근을 완전히 배제하고, 자기 사업의 모든 구성 요소를 현장에서 변경하거나 조정하는 일 없이 미리 준비하여 조립하는 방식을 추진했다.
이 혁신적인 방식은 정확한 수학적 계산에 기초한 것으로 당시의 수많은 사람을 곤혹에 시달렸음을 짐작하지만, 에펠이 지은 철교나 건물은 곧 정확성과 신뢰성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그 놀라운 경쾌함과 우아함을 감탄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결혼한 후 에펠과 그의 아내(디종 양조업자의 손녀였던)는 파리북서부의 큰 집에 살림을 차렸다.
그는 몇 번 이사하기는 해도 평생 그 지역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인 1866년에는 자기 사업을 시작해, 파리시 경계 바로 바깥인 오늘날의 르발루 아-페레 지역에 작업장을 열었다. 사업은 빠르게 확장되었고, 곧 그는 전 세계의 다리와 건물들을 짓게 되었다. 하지만 1871년 6월, 그는 아직 미래를 내다볼 수 없었고 프랑 스 경제의 취약성도 그를 우려케 했다. 예측할 수 없는 국내 경제 상황에 대처하여 에펠은 의욕적으로 해외 계약을 맺고, 자기 회사의 간부들을 라틴아메리카로 보내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지 에서 큰 계약을 따내게 했다.
루마니아에서 카이로, 러시아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전 세계의 일거리들이 속속 뒤따라왔다 부와 명성이 날로 쌓이며 번창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에펠의 명성으로 말하자면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르발루아-페레에 있던 작업장에서 귀스타브 에펠은 혁신적인 사업을 계속하여, 이번에는

헝가리의 페스트(현재 부다페스트) 철도역에 강철과 유리로 된 대담한 건물을 설계 중이었다.
귀스타브 에펠은 샹 드 마르스와 트로카데로를 잇는 새로운 다 리의 설계 및 건축 공모전에 웅모했다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박람회의 다른 건물들을 짓는 일에 충분히 관여하고 있었으므로 전반적으로는 성공적인 점수를 얻은 셈이었다.
그 무렵 그는 형가 리 부다페스트의 뉴가티역을 완성했는데, 노출 철골 구조에 과감 히 유리를 사용한 놀랄 만큼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장래의 사업을 내다보며 에펠은 박람회에 그 역의 사진과 도면을 전시했다.
-자유여신상의 탄생-
이후 몇 년 동안 대서양을 건너 성공한 파리 사람이 미합중국에서 청중을 모으는 동안, 몽소 공원 바로 북쪽 샤젤가 25번지(17구)에 위치한 가제 & 고티에사의 주물공장에서는 자유의 여신상 제작이 재개되었다.
1880년 무렵에는 프랑스 시민 각자가 이 조각상의 설계와 제작뿐 아니라 뉴욕으로의 운송을 위해 상당한 돈을 투자한 터였다
(조각상의 좌대는 미국인들이 부담하기로 했다).
프랑스 쪽의 성금이 거의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중요한 이정표가 마련되었지만 이제부터는 그 거대한 구조물의 실제 제작이 문제였다.

1879년 설계자 비올레-르-뒤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따라 바람의 저항이라는 문제의 전문가에게 그 일을 맡겼으니, 바로 승승장구하던 귀스타프 에펠이었다.
다리와 수로를 만들어본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에펠은 자유의 여신상 내부 구조를 비올레-르-뒤크가 구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 르게 변경했다.

모래로 채운 통 대신에, 에펠은 형 뜬 동판들을 이어 붙여 만든 조각상의 외형을 떠 받칠 거대한 철탑을 고안했다
그리고 동환들을 철탑에 연결할 대체할 골조를 설계했는데, 이것은 조각상이 설치하게 될 항구의 온도 번화나 강풍을 버터벌 수 있게 하는 혁신적이고 유연한 구조물이었다
자유의 여신상의 외형을 만드는 것이 비쌌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구상을 다져왔고, 거듭된 스케치와 작은 연구 모형들을 거처 점차 더 큰 모형들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1미터가 넘는 테라코타 모형에서부터 시작하여, 최종 버전의 16분의 1, 좌대 올려 3미터에 이르는 모형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이것을 네 배로 확대한, 10미터가 넘는 모형을 만든 다음, 이 확대된 모형을 부분들로 나누어 각기 최종 크기로 확대했다. 팔과 횃불 부분을 포함하여 총 46미터나 되는 거상이었다.
제작 공정 자체도 엄청난 일로, 파리의 미술공예 박물관에 그 공정이 보존되어 있다.
자유의 여신상의 축소 모형 곁에는 바르 톨디가 최종적인 거상을 만들어낸 파리 주물공장의 작은 모형 두 점이 놓여 있는데, 하나는 조각상의 머리 부분을 확대하는 장인들을 묘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 부분을 최종적으로 짜 맛 추는 공정을 보여준다. 박물관에는 자유의 여신상 인지새의 실물의 복제품도 전시되어 있다
이 사업 전체가 워낙 놀라운 것이었으므로, 파리 사람들은 가제 & 고티에사의 주물공장을 찾아가 일이 진행되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차츰 조각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파리의 지붕 들 너머로 접차 솟아오르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1886년 8월에는 자유의 여신상 외부의 주형 뜬 구리판들을 내부 골조에 연결하는 힘든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여러 달이 걸렸지만, 1886년 1월 무렵에는 거의 완성되었고 10월 28일에는 헌정식을 할 준비가 되었다. 바르톨디는 물론이요 페르디낭 드 레셉스와 기타 인사들도 헌정식을 위해 뉴욕에 와 있었다. 부듯가의 대대적인 가두 행진에 100만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섬 자체에는 2천 명의 손님밖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열성적인 구경꾼들의 무리는 작은 배들을 타고 섬의 물가로 모여들었다. 비구름이 다가오는 가운데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자유와 우정의 이 특별한 상징에 대한 미국 인들의 감사를 표하며, 미합중국은 언제까지나 그것을 소중히 간 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밖에도 많은 인사들이 연설을 했는데 바르톨디는 기회를 사양하고 나서지 않았다. 연설은 정치가들에게 맡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일찍 그는 이미 <뉴욕 타 임스 Nw York Timer)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다며 심경을 술회한 바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영 구히 남을 것입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파나마 운하-
1880년 말 사크레쾨르가 지어져 올라가는 동안, 수천 명이 새로 생긴 대서양 연결 운하 주식회사의 사무실로 들어가려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 전도양양 한 사업에 너도나도 주식을 사려는 것이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운하로 연결한다는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 아닌 대담한 것이었지만, 그의 수많은 열렬한 지지자들은 대담한 자가 목표를 쟁취하는 법이라고 서습없 이 믿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 운하의 재정적 수익은 엄 청날 것이었다.
파나마지협을 가로지르는 72킬로미터의 운하를 짓겠다는 기획은 특히 귀스타브 에펠은 이 수평식 운하에는 갑문이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에펠은 이 운하를 짓는 시간은 예견한 것보다 훨씬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며 인적. 재정적 자원도 더 많이 소요되리라고 예견했다.
하 지만 그 시점에서는 아무도 전문가들의 말을 귀담아든지 않았다. 대중은 명성과 전에 없던 부를 획득할 기회에 넘어가다만 한 주식이라도 얻으려고 회사에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파나마 대운하 사업이 시작되었다
귀스타브 에펠은 사크레코르의 세속적 라이벌이 던 자유의 여신상의 내부 골조를 완성했고, 동시에 크레디 리오 네 은행의 파리 건물도 짓고 있었다.
공장에 열광하고 깊이 관여했던 또 다른 파 리 사람은 다름 아닌 귀스타브 에펠로, 그의 유명한 작업장들도 그 지역에 있었다.
에펠은 오래전부터 작업장에서 가까운 파리 북서쪽에 살았으며, 몽소 지역으로 이사한 것도 좀 더 좋은 동네로 옮기되 자유의 여신상이 올라가고 있던 가제 & 고티에사의 작 업장에서 가까운 곳에 살기 위해서였다.
르발루아-페레 지역은 변두리의 불모지에서 급속히 고급화하여 가제 & 고티에사의 주물공장 같은 공장들이 차츰 밀려나는 형편이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계속 올라가 그 머리가 지붕들 너머로 놀랍게 솟아오를 무렵, 몽소 지역의 작업장 시절은 이미 끝나 가고 있었다.
1884년 자유의 여신상의 골조를 만드는 작업을 마친 그의 회사는 피에르-프르미에-드-세르비로 16구 현재 파리시 유행 박물관 철골조를 제작 중이었다
-천문대 설계-
1884년에 에펠의 관심이 쏠린 곳은 샤를 가르니에가 시작한 야심 찬 기획이었다. 파리 몽수리 공원의 기상관측소에 자금을 됐던, 천문학에 관심이 많은 부유한 은행가가 니스에 더 큰 천문대를 짓기로 했던 것이다.
가르니에는 건축가로서 계약했고, 에펠에게 천문대의 육중한 쿠폴라 구조 설계를 의뢰했다. 그때까지 가르니에와 에펠은 서로의 작업을 눈여겨보고는 있었지만,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가르니에는 특히 에펠이 파리 관속소의 돔 재건을 위해 제출했던 설계는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고, 물론 에펠도 가르니에가 파리 오라의 건축가로서 누리는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니스 천문대의 쿠폴라는 파리 팡테옹의 쿠폴라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예정되었다.
완성되기만 하면, 지지대 없는 돔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 될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회전해야만 했다. 이 핑장한 구상에 전혀 새로운 시각을 도입한 에펠은, 그런 유형의 좀 더 작은 구조물에 흔히 사용되어 온 롤러 대신 부양장 치를 도입하기로 했다.
그러면 총 110톤이나 되는 몸의 무게가 부동액의 원형 저수조로 떠받쳐질 것이었다. 완성된 돔은 불과 몇 분 안에 어렵잖게 바퀴를 온전히 돌아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에펠의 승리였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1887년 공사가 끝날 무렵, 그와 가르니에는 더 이 상 친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니스 천문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은 충분히 잘되었고 에벨이 샹드마르스에 지으려는 엄 청난 탑 때문이었다.
-대혁명 100주년-
1880년부터 질 페리 정부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100주 년을 기념하여 파리에 또다시 만국박람회를 열자는 바람을 블러 일으키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1855년, 1867년에 이어 1878년에 도 만국박람회가 열렸으니, 1889년의 박람회는 이전 박람회들과 딱 알맞은 간격을 두게 될 터였다. 또한 대혁명 100주년이라는 것도 새 공화정부에는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을 경축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달가운 일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그 계획의 초점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많은 사람에게 가능한 한
호소력 있는 박람회가 되게 하자는 데 모아졌다. 거기에 뭔가 진짜 볼만한 것 을 내놓자는 자연스러운 바람이 더해져, 일찍이 지어진 어떤 것 보다도 높은 (300미터짜리) 거대한 탑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었다.
이 철탑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내놓은 것은 에펠의 조수들인 에밀 누기에와 모리스 쾨클랭이었다. 1884년 6월, 이들은 네 개의 격자형 들보가 “기초에서는 따로 서 있다가 족대기에서 모이는” 구조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규칙적인 간격으로 트러스를 배치해 그 들보들을 고정시킨다는 것이었다. 건축가 스테팡 소베스트르는 이런 설계를 변경하여 기초 부분의 네 개 들보를 직선 대신 거대한 아치로 대체했다. 과감하지만 실현 가능한 설계로, 이 탑은 에펠 팀에 익숙한 다리의 교각들과 뚜렷한 유사점을 지니게 된 것이다.
전통주의자들로서는 경악할 일이지만, 사실 탑을 설계하는 데 심미적인 요소는 거의 작용하지 않았다. 모든 형태가 압력과 무게와 중력과 풍력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신중한 계산의 산물이었다. 멋지게 벌리고 선 탑의 네발도 바람의 저항을 견디 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놀랍게도 에펠 자신은 처음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설계도를 본 그는 심드렁했지만, 그래도 누기에와 쾨클랭에게 그 아이디어를 좀 더 진척시켜 보라고 허락했다.
그들은 곧장 강베타 정부의 예술부 장관이었고 당시 박람회 행정 위원회의 장을 맡고 있던 앙토냉 프루스트에게 소베스트르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설계 도면을 본 프루스트는 크게 흥분하여 공개적으로 전시해야 한 다고 주장했는데, 아마 이 시점에 에펠도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재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설계안의 진두지휘를 맡은 에펠은 1884년 말 누기에, 쾨클랭, 소베스트르로부터 그 배타적 특허권을 사들였다. 그것은 이제 에펠의 탑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구태의연한 방식을 고수하던 수많은 비평가들을 격앙시키게 될 시작이었다.
-에펠의 설계안 -
1886년 오늘날에 ‘에펠탑’은 파리 박람회를 위한 300미터 거탑 건립에는 다른 경쟁자들도 있었다. 그중 가 장 유력한 후보는 유수한 건축가 질 부르데로, 그는 가브리엘 다 뷰와 함께 1878년 파리 박람회 때 트로카데로궁을 설계한 바 있었다.
석조물의 대가였던 부르데가 제안한 탑은 전부 화강암으로 지어진, 거대한 5층짜리 웨딩 케이크 같은 형태였다. 위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층마다 장식 기둥과 조각상들로 꾸며지고, 꼭대기의 막강한 전등은 그 강력한 빛줄기로 밤의 파리를 고루 비출 등 대가 될 것이었다
1884년 말 철탑 아이디어를 학보 한 에펠은 그것을 만국박람회의 입구에 세울 작정으로 산업 및 상업부 장관을 설득하여 공모전을 열게 했다. 그리하여 1885년 5월 1일 “샹 드 마르스에, 밑변 125미터 정사각형 대지에 높이 300미터짜리 철탑을 지을 가능성을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모전이 고시되었다.
에펠은 물론 전설적인 ‘강철의 마법사’로 지구상의 그 누 구보 다도 강철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돌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확신했다. 에펠에 따르면, 석제의 가능성은 중세 성당 건축의 시 대에 이미 절정에 달했다는 것이었다. 더 높이. 더 크게 짓기 위해 서는 강철을 사용해야만 했다. 부르데는 에펜이 제안한 탑을 “천박하다”라고 했지만, 에펜은 조용히 현실적인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그런 높이의 탑은 돌로 만들 수 없을 뿐 아니라 정한 기한에도 맞출 수 없다고 그는 장담했다. 그 절반 크기밖에 안 되는 위싱턴 기념탑을 짓는 데도 수십 년이 걸린 터였다. 뿐만 아니라 에펠의 타당한 지적대로, 부르데는 바람의 저항도 제대로 계산하지 않았고 기초공사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그의 석조 거탑은 끝바로 지상에 지어지게 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최종 결정을 맡은 위원회는 부르데의 설계안이나 그의 주장에 흔들리지 않았고, 1886년 6월에는 에펠이 제안한 탑이 무난히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다리들과 자유의 여신상 내부 골조를 만들었던 귀스타브 에펠이 이제 세상에 서 가장 높고 가장 불만한 구조물을 짓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기대를 자아냈지만, 모든 사람이 그 결과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특허 에펠의 과거 동료였던 샤를 가르니 에는 철탑 설계안에 분개하며 어떻게든 그것을 중지시키려 했다.
일 또한 상당한 위업이었다. 1886년 4월에 좌대가 완성되었고, 그런 다음 좌대와 기초에 기둥과 철근을 박아 에펠이 설계한 거 대한 강철 골조의 지주를 만들었다.
불랑제 장군이 공화국의 기반을 약화시키려 최선을 다하던 무 럽,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꽃이 될 특별한 구조물 ㅡ커 스타 브 에펠의 탑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1887년 1월, 에펠탑 공사는 우선 아래로 내려가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부르데가 세련된 심미주의에 집착하느라 간과하고 말았던, 필수적인 단계였다. 탑의 네발 중 둘은 센강에서 가까운 불안 정한 지반에 두어야 했으므로, 에펠은 단단한 점토층이 나올 때까지 15미터를 시추했다. 그러고는 전등을 컨 잠함#을 밀봉하 여 21미터, 즉 수면 아래까지 내려보냈고, 인부들은 압축공기를 마시며 굴착 작업을 벌였다. 이런 작업 방식은 그가 이미 교량 건 설에서 성공적으로 시험해 본 것이었다. 그리하여 거대한 주추들 이 제자리에 놓이고 역시 거대한 앵커볼트들이 조여진 다음 이 기초공사에만 다섯 달 이상이 걸렸다.
에펠은 비로소 위로 올라갈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탑 공사가 시작된 직후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에펠탑은 샹 드 마르스에 세워질 예정으로, 거기서 온 파리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샤를 가르니에가 위시한 파리의 많은 유지들은 이 ‘괴물’이 경관을 망치게 되리라는 생각에 경악했 다. 300미터 탑에 대응하여 300인 위원회가 재빨리 결성되었고 그 명단에는 파리의 가장 유명한 화가, 음악가,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르니에가 이끄는 이 위원회는 박람회 집행 감독에게 ‘예술가들의 항의 서한’을 보냈다. 6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사 랑하는” 이들은 그에게 가능한 가장 강력한 언어로 “쓸모없고 흥 측한 에펠탑”을 세우는 데 반대하는 경고를 보냈다. 그런 흉물이 거대한 시커먼 공장 굴뚝”처럼 우뚝 서서 파리를 내려다보게 된 다면 파리의 망신이요 재난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가르니에와 에펠은 니스의 거대한 천문대를 함께 만들며 사이좋게 작업했었고, 그 전해에 천문대는 홀륭하게 완성되었다. 물론 에펠은 자기 물의 작업에 강판을 사용했는데, 가르니에는 철을 골조의 자재로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독자적인 예 술적 재료로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탑 공모전에서 에펠의 경쟁자였던 질 부르데와 마찬가지로 가르니에도 의문의 여지없이 전통적인 사람으로, 석재를 완벽한 건축자재로 선호하는 하였다. 더구나 자신과 부르데가 건축가라면, 에펠 같은 엔지니어는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 줄 모르는 일개’ 기술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가르니에의 분노를 결정적으로 자극한 것은 에펠탑이 박람회의 하이라이트가 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허 가르니에에게 울화를 안긴 것은 아마도 그 탑이 자신이 박람회에 출품한 ‘인간 거주의 역사를 무색하게 만들리라는 전망이었다. 혈거 시대부터 페르시아의 저택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주거 역사를 보여주는 서른 개 이상의 건물군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비교적 수수해서, 가르니에의 예상대로 박람회가 끝나자 철거되었고 사실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에펠은 가르니에를 필두로 한 300인 위원회의 항의에 위엄 있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물론 엔지니어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으며,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있다고 그는 대답했다. 반면 작가나 예술가의 심미적 취향이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엔지니어들의 작업 토대가 되는 자연법칙들의 아름다움과 그 법칙들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한 설계의 조화를 굳게 신봉하고 있었다. 이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석조물만이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와 그의 악명 높은 탑 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며, 이제 그는 그 점을 증명하 기에 나섰다.
1887년 7월, 에펠의 탑은 실제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첫걸 음을 떼어놓기 위해 그와 근처의 르발루아-페레 공장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전 사업들에서도 그랬듯이 에펠은 먼저 탑의 각 부분의 자세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 부분들에 대한 중 력과 바람의 영향을 세밀히 계산하게 했다. 그런 다음 각 부분을 정교하고 세심하게 관리된ㅡ리벳 구멍 하나도 10분의 1밀리미터까지 정확하게 뚫린 자기 작업장의 환경 속에서 개별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부품들을 관리 가능한 부분들로 미리 조립했으니, 에펠의 주장에 따라 현장에서는 드릴을 쓰거나 두드려 맞추는 작업이 허용되지 않았다. 만일 어떤 부품에 하자가 있으면 작업장으로 돌려보냈다. 통틀어 1만 8천 개의 미리 조립된 부분들이 현장으로 배달되어, 일종의 거대하고 완벽한 이 렉터 세트 (집짓기 놀이 완구) 적인 이 고전적인 조립식 완구는 사실상 에펜의 유명한 방식에 기초하여 고안된 것으로 이루었다. 하지만 에펠의 탑이 올라감에 따라 비판도 계속되었다. 두려움을 조장하는 이들은 그 구조물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예견했다. 에펠이 만든 다리 중에 더러 과감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번 탑 같은 것은 도대체 아무도 시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에펠의 설계와 그가 선택한 재료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에펠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 실험적인 구조물을 위해 오랜 숙고 끝에 좀 더 가벼운 강 보다 철을 선택한 터였다. 그의 결정에는 강재가 비싸다 는 것도 한 가지 이유로 작용했지만 또 한 가지 이유는 강의 탄성 이더 크다는 것이었다. 이 지나친 탄성은 샹드 마르스의 기상조 건에 과한 것이 되리라고 에펠은 생각했다. 구조물의 무게로말 하자면 에펠의 탑은 놀랄 만큼 가벼운 것이 될 것이었다.
격자고 조 설계와 세심한 하중 분배(제곱센티미터당 의자에 앉은 한사 람 무게밖에 되지 않는다) 덕분에 그 무게는 에 7,300톤이 되었는 데, 깃털처럼 가볍지는 않다 해도 놀라운 성과였다. 든든한 기초 위에 가볍게 서서 바람의 저항은 물론 기타 모든 웅력과 변형에 대비를 갖춘 이 탑은, 중상자들이 경고하듯이 쓰러지거나 무너길 염려가 없었다. 비용 면에서는 어떤가? 파리시와 프랑스 정부는 150만 프랑밖에 내지 않았고, 그것으로는 공사비의 4분의 1밖에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펠은 주식회사를 만들어 주식의 절반을 자비로 사들였다. 그것은 엄청난 위험 부담이었고, 파리시와 프랑스 정부는 에펠이 중대한 손실을 입으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또 다른 거대한 사업, 즉 파나마운하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에펠은 이 사업에도 참여하게 된다.
탑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바로 그 시기에.
해수면 수로 대신 갑문을 사 용하는 운하를 만들게 되면서, 본래 예산했던 것보다 세 배의 비 용이 들게 되었다.
1887년 말 에필탑의 네발이 극적으로 탑의 첫. 번재 단과 만날 즈음, 드 레셉스는 에펠에게 여러 명의 금융업자를 보내 파나마 사업에 참여해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에펠은 “국익을 위해” 동의하고, 열 개의 거대한 수압식 갑문을 만들기로 했다. 그 각각이 당 시의 가장 큰 배들이 드나들 만한 규모였다. 그즈음 에펠은 자기 분야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거물이 되어 있었지만, 운하 사업은 탑의 열다섯 배나 비용이 드는, 그가 일찍이 맡아본 중 가장 크고 가장 위험한 사업이었다.
1889년 초 100주년 에펠탑은 거의 완성되어 새롭고 현대적인 것이 대한 장엄한 상징으로 샹드 마르스 위에 우뚝 섰다. 하지만 훗날 파리 자체의 상징이 될 그 비범한 구조물도 처음에는 많은 파리 사람들에게 편안한 이웃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현대 세계가 불안하고 심지어 살기에 위험한 곳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파나마 운하 파산-
1889년 2월 파산을 선언한 것은 시기적으로 최악이었다. 불랑제 위기가 한창이었고, 경제는 여전히 고착 상태였다. 운하 회사의 도산은 새삼 놀랄 것도 없었으니, 관심을 갖고 지켜본 사랍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위험신호가많 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운하 사업에 돈을 됐던 이들 대부분은 그런 현실을 직면하기를 거부했고, 이제 80만 명 이상의 프랑스 투자자들은(그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살 길이 막연하게 되었다.
탑의 마지막 손질 작업 중이던 커스타브 에펠은 그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미 파나마운하 회사와 계약한 공사를 상당 히 진척시킨 터라, 그의 첫 반응은 아마도 정부가 그렇게 중요 한 사업이 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가정하에 자기 작품의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펠 조차도 그런 규모의 파산(종 15억 프랑)에 맞서서는 싸움을 계속할 수 없었다. 7월에 그는 이미 완결된 공사에 대한 비용만을(파산선고 이후에 한 일은 제외하고) 회수한다는 조건으로 동의서에 서명했다.
사실상 에펠은 웅장한 탑을 짓느라 월씬 더 긴박한 재경난에 직면해 있었다. 시당국도 정부도 그것이 그를 중대한 재정적 위기에 빠뜨리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국 탑은 그의 기대에서 한 치도 모자람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1889년 5월 박람회 개막에 맞추어 그 대대적인 과업을 완성한 에펠은 아직 열 리 베이터 가 작동하기도 전에(엘리베이터들은 공사에 그 나름의 난관이 있어, 탑이 공개된 후 여러 주 만에 완성되었다) 탑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방문객의 물결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박람회 동안 약 200만 명이 탑을 방문했으며, 가장 격렬히 반대하던 예술가들 조차 그 성과에 승복했다(가르니에만은 몇 년 더 비난을 계속했 지만).
에펠은 탑을 완성한 첫해에 비용을 회수했고, 그 후의 이 익- 입장료와 탑의 레스토랑 및 에펠탑 모형 판매 등 기타 상업 적 사업들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아주 부자가 되었다.
에펠이 그처럼 수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파리시와 프랑스 정부가 그와 그의 회사에 20년간의 운행권을 양도하기로 계약을 뺐었던 덕분이었다.
탑의 공사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 는 지, 시나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얼마나 적었는지를 생각하면 그 성공은 에펠에게 한충 더 뿌듯한 것이었을 것이다.
박람회의 스타는 단연 세계 최첨단의 경이인 에펠탑이었다.
-파나마운하 사태 재부상-
정치의 이면을 새삼 뒤집어 보이기라도 하듯, 하며 단조로운 정치 현장에 불쾌한 흥분을 가져왔다 불랑제 사태에 대한 기억이나 대두하는 사회주의의 위협이 불랑 제 이후 프랑스 정국에 상당한 자기 본위적 안정을 가져온 터였 으나, 그 표면적인 안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뇌물 혐의들이 부각되었고, 1890년에는 법무부 장관에게 조 사가 맡겨졌다. 1년이 결려서야 정의의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여 1891년에는 귀스타브 에펠을 비롯하여 운하 사업에 관여한 이들의 가택수색이 실시되었다. 물론 수색에서는 아무런 불리한 증거 도나 오지 않았지만, 이쯤 되고 보니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졸지에 현존하거나 이미 사망한 공사 감독들뿐 아니라 귀스타브 에펠까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가난한 이들이 실업 중이든 취직해 있든 간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의회가 파나마 회사에 복권을 통한 자금 조성을 허 용하게끔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가로 1천만 프랑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1888년 의회는 실제로 필요한 법을 통과시켰으며, 여기 에는 뇌물을 받은 다수의 의원들(100명 이상이 뇌물을 받았는데. 공작으로도 조성된 자금의 액수가 충분치 않아 회사는 곧 도산하고 말았다.
형사소송은 1891년에 시작되었는데,. 11월 에커스타브 에펠과 회사의 운영진 두 명이 착복과 배임 혐의로 기소되었다.
귀스타브 에펠은 곧 법정에서 자신의 명성을 지켜내야만 되었다
에펠도 불운을 겪기는 했지만, 은행 잔고에는 아무 영향이 없었다. 그렇지만 파나마 사태로 인해 겪은 공개적 모욕은 그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1893년 1월, 에펠은 파나마운하 회사의 자금을 유용하고 직위에 따르는 신뢰와 책임을 남용했다는 혐의에 대해 법원에서 항변해야 했다.
그의 변호사는 에펠이 약정된 사업을 수행하는 위 치의 계약자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에펠은 회사의 주요 금융업자 가운데 한 사람과 영향력 있는 신문 <르 탕 Le Temps>의 편집인에게 거액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에펠은 그 돈이 “그렇게 중요한 사업에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해서 준 것이었다고 항변했지만. 그 협력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고, 에펠이 준 돈은 영락없이 파나마 사업에서 계약을 따내기 위한 뇌물 같은 보였다. 실제 그 사업에서 그가 얻을 이익이란 고작 3300만 프랑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에펠은 200만 프랑 가치밖에 없는 자재에 대해 1200만 프랑을 환급받고 실제로 운 송하지도 않은 자재의 운송비로 600만 프랑을 운하 회사에 청구한 것으로 보였다.
2월 9일, 에펠은 자금 유용에 대해서는 무죄가 되었지만 직권남용에 대해서는 유죄로, 2년간 의 징역과 2만 프랑의 벌금이 매겨졌으나 두 가지 모두 항소할 때까지 유예되었다.
에펠이 회사 경영에 참여한 적이 없음을 감안할 때, 그리고 운하 사업이 모든 단계에서 뇌물로 점철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에펠에게 내려진 선고는 유독 가후한 것이었다. 에 펠은 실제로 기소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가 난한 사람들이 각출한 거액의 자금이 유용되는 과정에 끼어 있었고 유명 인사였던 덕분에 그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었다 결국 에펠에게 내린 선고는 항소로 번복되었지만, 이는 에펠 자신의 유무죄와는 상관없이, 하급법원의 기술적 위반에 따른 것이었다.
이 시점에 레지옹 도뇌르가 그 문제를 넘겨받아, 에펠에게 수훈자로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석명할 것을 요구했다. 레지 용의 조사는 호의적으로 마무리 지어졌으나, 에펠로서는 신물이 날대로 나고 있었다. 그는 자기 회사에서 사직하고, 회사 이름에서 자기 이름도 빼버렸다. 귀스타브 에펠은 어떤 공사에도 다시는 참여하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결국 파나마운하 건설권을 미국에 팔았고, 미국은 1914년에 운하를 완공했다. 하지만 커스타브 에펠은 이 거대 한 사업의 완성에 더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61세라는 정정 한 나이에 살날이 30년이나 더 남았으니. 그는 인생도 명성도 돼찾아야만 했다.
1923 그해 말에 귀스타브 에펠은 잠자던 중에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아흔한 살이었고,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삶에서 은퇴한 지 얼 마 되지 않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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