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ㅡ대안의 지배 1

20세기 미국 미술 : 리사 필립스

by 조 씨

냉소시대

1960년대 사회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일련의 해방 운동, 즉 블랙파워 운동 페미니즘, 동성애 권리 등은 곧 주류로 침투해 미국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런 변화의 뿌리는 사회적, 정치적 풍토에서 찾을 수 있다. 1968년 3월 베트남전을 매듭짓지 못한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그해 11월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에서의 평화를 약속하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닉슨이 존슨 재임 중에 시작된 파리 평화회담을 매듭지으면서 공약이 이뤄지는 듯했다. 그리고 1969년부터 미군이 실제로 철수하기 시작은 했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 닉슨은 전쟁 무대를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확장했고, 잇따른 국익 손실에 직면한 미군은 1973년에 가서야 비로소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다른 활동 영역에서 닉슨의 외교 정책은 기록에 남을 승리였다.
1972년에는 전례 없이 중화 인민 공화국을 전격 방문해 20여 년 만에 양국 외교 관계를 재개했고, 1973년 11월에는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974년 8월 미 하원사법위윈회가 대통령 탄핵에 대한 세 개의 규약을 채택하자 닉슨은 사임했고, 부통령인 제럴드 포드가 취임 선서플 하고
대통령에 올랐다.
닉슨의 표리부동과 권력 남용은 미국인들이 베트남에서 겪은 미국의 불운으로 시작된 정치권력 구조에 대한 환멸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또한 제
4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이 지원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국가들이 미국으로 출하되는 원유의 선적을 막는 사건이 벌어졌고, 다른 나라의 자원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미국에는 불안이 엄습했다.
이 사건으로 오랫동안 미국인들이 당연시 여겨 온, 상대적으로 저렴한 생필품이었던 난방용 기름과 휘발육 값이 가파르게 뛰어올랐다.
극심한 불경기가 이어졌고, 미국 경제는 침체기로 접어들었다. 다른 영역에서는 우선 뉴욕주 북부의 러브 만 등지에서 유독성 폐기물의 다량 방출로 1970년대에 환경에 대한 우려가 분출되었고, 펜실베이니아 주 스리마일섬의 원자력발전소 고장으로 인한 치명적인 방사능 유출로 원전의 위험이 생생하게 입증되었다.
정치적 배신, 경제에 대한 불안, 생태 환경 재난에 대한 공포로 인해 미국인들 사이에는 불신감이 팽배해졌고, 냉소적이 되었으며, 힘 있는 모든 국가기관과 그곳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진술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 시대의 냉소주의와 정부에 대한 신뢰 붕괴는 평크록이나 어두운 극영화에서 아나키즘으로 표현되었다. 몇몇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세계로 은둔했다.
자서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자의식에 대한 탐구 둥이 1970년대 공연 예술에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은거란 개인의 성취와 쾌락에 몰두하기 위해 사회ㆍ정치적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개인주의가 만연한 70년대를 작가 톰 울프는 '나의 시대'로 특정 지었다.
그러나 1950년대, 60년대와 마찬가지로 변화에 기여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는 사회. 정치적 행동주의자들은 늘 존재했다. 급진적 정치 조직들, 게이 인권 운동가, 페미니스트를 아우르는 방대한 언더그라운드 세력이 특수 이해 집단에 걸맞은 위상을 요구하면서 미국인들에게 삶의 변화를 촉구했다.
미술가들이 표현의 정치학에 면역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 낸시 스페로 외 자가들은 정치적 작품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직접적인 행동까지 취했다. 미술가들은 저항 정신으로 미술가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베트남전 반대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미술노동자연합 Awc(1969) 같은 그룹을 조직했다. 또 다른 행동주의 조직인 게릴라미술행동그룹 CAAc(1969-76)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계단에 돈을 던지거나, 휘트니미술관 바닥을 걸레질하
거나, 뉴욕 현대미술관 로비에 소의 피를 홀뿌리는 등 공공장소에서 지저분만 퍼포먼스 스타일의 게릴라 식 이벤트를 벌였다.

낸시 스페로
하노이에 사랑을 Love to Hanol (1967)
종이에 과슈와 잉크 91.4x61cm
사이먼 왓슨 컬렉션

게릴라 미술행동 그룹
피의 목욕 Blood Bath (1969)

액션
뉴욕 현대미술관

이들 그룹은 제도 간 미술계를 불신했고, 체제에 숨겨진 책략을 폭로하고자 했다. 이들의 정열적인 활동은 미술 공동체를 공통 명분 아래 결집 시 겼고, 다른 미술가들과 대중에게 미술계에서 벌어지는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고취했다.
특허 흑인과 히스패닉계 미술가들은 미술 현장의 주류에서 자신들이 배제된 것에 항의하면서 자신들만의 제제를 꾸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할렘스튜디오미술관이 창설되었고, 미국 내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소개하는 유일한 미술관인 스페인 할렘가의 엘무제오 델 바리오, 그리고 처음에는 이곳의 산하 분과로 시작해 정치적 행동주의자들에 의해 독립된 푸에르토리코 출신자들의 미술 워크숍인 엘 탈레르 보리쿠아도 생겨났다. 이러한 대안적 조직들은 미국 문화의 다양성과 해당 문화가 발생하게 된 서로 다른 전통의 존재를 인정했다. 이러한 인식은 미술계 밖에서도 생겨났다. '히스패닉'이라는, 뭉뚱그려 동질화시킨 용어는 문화적 의미를 더 명확하게 나타내는 '치카노'나 '아프로 캐리비언' 같은 용어로 대체되었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이제 '토착 미국인'이 되었으며, '흑인'은 오랫동안 2류 시민의 의미를 함축했던 '니그로'를 대신했다가 후에 아프리카 미국인'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아프리카 미국인들을 대변하는 새 목소리의 증인이 되어준 것은 텔레비전이었다.
1977년에 방영되어 큰 인기를 모은 미니시리즈는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미국 노예를 거쳐 공민권 쟁취를 위한 투쟁으로 이어지는 장정을 극화했고, 처음으로 흑인 가족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흑인 작가들은 미술관 세계에서 평등성 주장을 펼지는 데 있어 라틴계 작가들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흑인비상문화연합 회원들은 휘트니미술관의 배타적인 전시 프로그램에 항의했고, 그 결과가
1971년 '미국 현대 흑인 미술가' 개관 전으로 나타났다. 몇몇 미술가들은 구상 미술가들의 작품이
작은 전시실로 분리되었다는 이유로 전시 개막 전에 철수하기도 했는데, 이 사건은 '보편적인' 추상 언어를 선호함으로써 내용이 주변부로 밀려났음을 시사했다.
1969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열린 '내 마음속의 할림'이라는 대형 전시도 흑인 작가들의 격노한 반응을 불러일으겼다.
왜냐하면 흑인 공동체의 역사, 그리고 이것을 대변한 전시가 전적으로 '백인 남성'들에 의해 해석되었고, 더군다나 단 한 명의 현대 작가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는 동안 데이비드 해먼스, 베티 사르, 외 작가들의 같은 후인 미술가들은 그들의 예술적 유산들처럼 양식과 사고방식 면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작품을 산출하기 위해 민속 예술, 재즈, 저항 예술 같은 그들만의 고유한 역사적, 예술적 전통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해먼스
부당한 사건 Injustice Case (1970)
성조기, 마가린, 가루 안료 160x102.9cm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

베티 사르
정령의 포획자 Spirit Catcher (1976-77)
혼합 매체 아상블라주 114.3x45.7x45.7cm
작가 소장

그 결과물 중 하나인 공동체 벽화가 미국 전역에서 나타났다. 이런 활동은 1967년 봄 미국 후인문화조직 이 처음 시작했는데, 이들이 시카고 남부 지역에서 제작한 작품은 미국 흑인들의 이미지를 표현한 중요한 작품으로 남게 된다.
미 서부 해안 쪽에서는 치카노 미술가들이 처음에는 모험적인 사업이었으나 곧 실질적인 운동이 된, 지역 사회에 지지 기반을 둔 벽화 프로젝트를 조직했다. 치카노 운동은 로스앤젤레스 동쪽, 샌프란시스코의 미션 구역, 오클랜드 이스트베이에 있는 치카노 거주지 내의 버려진 건물이나 상가, 지역공동체 기관 건물 등의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치카노 공민권 쟁취 운동은 물론
이고 세사르 차베스와 농장노동자조합의 행동주의 활동에 동원된 주디 바카. 로버트 콜레스콧 같은 많은 벽화 작가들은 우의적인 벽화를 제작해 치카노들에게 공동체의 자존심과 역사적 의미를 환기해 주었다.
양식 면에서 보면, 이들 미술가는 디에고 리베라를 위시해 193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작업했던 위대한 멕시코 벽화 작가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콜럼버스 시대 이전 문화적 유산에 의존했다.
그러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1970년대 대다수 작가는 1970년 여름 치카노의 반전시위를 취재하다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기자의 죽음을 비롯해 당대의 사회적 테마를 주로 다루고 있다. 한편 정부에서 벽화가 황폐한 도시 구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저렴한 방법이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치카노와 아프리카 미국인 출신의 벽화 작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과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로버트 콜레스콧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 카버
George Washington Carver
CrossIng the Delaware
미국 역사 교과서에서
1975
캔버스에 아크릴릭
213.4x274.3cm
로버트 H, 오처드 컬렉션

주디 바카
바리오스와 차베스 계곡의 양분
Dlvislon of the Barrios and Chavez Ravine
'로스앤젤레스의 거대한 벽' 중에서
(The Great Wall of Los Angeles)
1967-84
벽화(1950년대 부분의 세부)
무흥가 세탁 배수구 운하, 로스앤젤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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