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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마 Mar 05. 2024

27. 모니터 뒤의 사람들.

사람과 사람이 모여.

본적으로 나는 오지랖이 매우매우 넓은 사람이다. 어느 날 내가 하는 일들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어디서 어떻게 일을 하고 계신가 궁금해지는 때가 있었다. 특히 1년차 때 전담하던 응급병동 주치의 시절, 그리고 4년차 수석전공의 시절에 입원 원무과와 전원 상담실이 그랬다. 내가 수련받은 곳 응급의학과에서는 응급병동 및 응급중환자실을 자체적으로 운영했는데, 병동 30베드와 중환자실 12베드(내가 수련할 때는) 정도의 작지 않은 규모를 자랑했다.


응급병동은 입원 혹은 전원, 퇴원을 2박 3일 이내 결정하는 아주 턴오버가 빠른 병동이었는데, 주치의의 일과가 아침 회진 및 환자 파악 후 각 진료과 상의 하에 전원이나 입원 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일이었다. 응급병동 환자의 대부분이 내과 환자였는데, 수석전공의가 필요한 병상을 분과별로 파악해서 입원 원무과에 부탁드리고 병상을 배정받는 방식이었다.(사실, 다른 병원에서 일해보면서 왜 이걸 내가 했어야 했는지 이해가 안 되기는 했다. 병상 필요한 과가 알아서 병상 받아서 가져가는 게 맞지. 어쩌겠는가. 로마에서는 로마 법을 따라야 하는 법인 것을.) 전원은 전원 상담실이 따로 있었고, 진료 의뢰서와 컨설트를 쓰면 답변을 주는 식이었다.


전원은 우선 전원 동의를 받아내는 것이 어려운 과정이었다. 아무래도 빅3에 다니던 환자가 다른 연고가 없는 병원으로 전원을 간다는 것이 심적으로 동의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병원간 이송 자체가 환자도 보호자도 어쩔 수 없는 불편감과 비용 등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병상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응급병동 주치의는 자주 악역과 욕받이를 해야 했다. 왜 우리 교수님든 응급실 오면 다 된다고 했는데 나를 보내냐는 원망도 들어야 했고, 가끔 완고하신 교수님들은 내 환자는 전원시키는 것을 불허한다고 하시면 정말 사이에 낀 나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하루는 회진 오신 교수님이 겨우 내가 설득해둔 환자에게 '힘 내세요' 한 마디만 하시고, 병실 문 밖에서 내게 알아서 잘 전원보내라고 하고 가셨던 날이 있었다. 보호자와 환자가 '우리 교수님은 나에게 다른 데 가란 소리 한 마디도 안했는데 네가 뭔데 그러냐'고 화를 내서 '너희 교수님이 나오자마자 알아서 잘 전원 보내랬다'고 바락바락 같이 화를 냈던 날은 그렇게 스스로가 미울 수 없었다.


설득하고, 애원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누군가에게 내 의사를 관철시키는 과정을 이 때 많이 배웠던 것 같다. 그렇게 동의를 받아낸 다음 의뢰를 하고 나면 전원상담실에서는 정말 정성껏 연고지와 환자 및 보호자의 면담 끝에 갈 곳을 찾아주시는데, 성질이 급한 응급의학과 주치의는 오후 서너시가 넘으면 초조해지기 시작해서 전화도 자주 드리곤 했었다. 겨우 설득되었다고 생각한 분도, 면담 후에 갑자기 말을 바꾸셔서 애를 먹이는 일도 많았고.


한편 입원 원무과에 아침마다 필요 병상을 말씀드리고 읍소하는 수석전공의의 일도 쉽지는 않았다. 우선 30명의 환자가 모두  곳에 입원할 수는 없다. 병상이 턱없이 부족한 곳이기에 응급병동은 일종의 완충지대같은 곳이어서, 급성기 치료를 하면서 타원에서 치료할 수 있는 정도의 환자들은 전원을 가게 되고, 급성 위장관 출혈 등 어느정도 경과관찰 후 퇴원 가능한 분들은 퇴원 후 외래로 안내하게 된다. 다만 중증도가 높거나 장기간 입원이 예상되는 환자들의 경우는 타원 전원도 어렵기에 입원을 하게 되는데, 이 중에서도 우선순위를 따져야 했고 분과별로 병상이 배정된 것들이 달라서 필요한 분과 병상도 찾아야 했다. 


내과 분과마다 정책이 달라 어떤 곳은 병상을 원무가 아니라 분과 전임의가 관리를 했는데, 일부 분과를 제외하고는 입원 원무과에 응급의학과 수석 전공의 쪽에서 문의를 해야 했다. 오전에 출근하면 우선 환자 파악을 하고, 이 중에서 누구를 보내고 누구를 입원시킬지 결정했다. 원무과가 출근하는 시간에 문안인사처럼 "안녕하세요 선생님, 응급의학과 ㅇㅇㅇ입니다. 오늘 필요병상이 소화기 2병상 신장 1병상인데요" 식으로 말씀드리면 원무과에서 파악하고, 오후경에 병상을 배정해주셨다. 응급병동 특성상 만 72시간 이상 체류가 원칙적으로 불가했기도 하고, 응급실에도 체류 환자들이 많았기에 턴오버는 빨라야 했다. 마찬가지로 오후 서너시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성질 급한 응급의학과는 또 전화를 드리게 되었고.


한창 바쁘던 1년차 응급병동 주치의 시절, 월말이 다가오면서 일도 좀 익숙해지고 전원 상담실 선생님들의 이름도 낯이 익기 시작했던 날이었다. 컨설트가 유난히 좀 일찍 잘 풀린 날, 인사 한 번 드리러 가고 싶다고 몇 분이서 한 타임에 함께 일하시는지 여쭤봤다. 처음으로 우리가 업무 외의 말을 한 날이었을 것이다. 커피라도 한 잔 사다 드리고 싶은데, 위치가 어디며 찾아뵈어도 괜찮은지, 어떤 커피를 드시고 싶으신지. 병원 2층 카페 근처의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꽤나 자주 지나쳤는데도 거기가 거긴지도 몰랐다. 쉴틈 없이 일하고 계셨다. 나 뿐 아니라 다른 병동의 전원 상담 업무들도 있었기에, 내내 전화통화를 하고 누군가의 요청 사항을 받으며 대화하던 바쁘디 바쁜 사람들이 모인 자그마한 방. 그 병원에 안 바쁜 사람은 아무도 없다지만 직접 만나보고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고 나니 새삼 더 감사했다. 덕분에 하루하루의 고비를 넘기곤 했다고 감사하다 깊이 인사드렸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NPC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타인의 입장이나 감정에 대해서 알려고 하거나 배려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점점 심해진다는 이야기를 보았다.사실 얼굴 보기 전까지는 늘 모니터 너머 전화기 너머로만 대화하던 사이다 보니, 나도 내 입장만 먼저 생각했던 일들이 많았다. 직접 만나고 나니 내 컨설트만 최우선으로 해달라는 진상 짓(?)은 덜하게 되었다. 한편 전원상담실 선생님들도 누군가 그렇게 찾아온 적이 처음이라고 하셨는데, 직접 만나서 인사하고 서로 말이라도 좀 해보고 나니 더 열심히 도와주고 싶어졌다고 그러시더라.


그 이후로 나는 응급병동 주치의를 하거나, 수석 전공의 업무를 할 때는 전원 상담실과 입원 원무과에 월말에 커피를 사서 이번 달도 덕분에 잘 넘겼다고 인사를 하러 가곤 했다. 그 분들이 내 커피를 마셨다고 안될 일을 되게 해 주시는 것도, 안 마셨다고 될 일을 안 되게 해주시는 것도 아닌 것은 안다. 그분들도 그분들의 일을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굳이 내 사비를 뭐하러 쓰냐고 너 돈 많냐 소리도 들은 적 있다. 하지만 뭐, 매일 하루하루가 한 고비 넘기고 한 숨 쉬고의 반복이었던 그 곳에서, 피차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끼리 이 정도는 해도 안 되나 뭐. 병원이란 게, 조직이란 게 나 혼자 잘나서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 말이다. 나의 구조신호에 아낌없이 손 내밀어 주시는 분들께, 할 수 있을 때 감사함을 표시하는 게 또 사람 사는 재미지 뭐.


tmi, 그래서 그랬나 모르겠지만 나는 졸국할 때 '타 부서에서 뽑은 칭찬릴레이' 상을 받았다. 신세계 백화점 상품권 20만원이었던가, 모르긴 몰라도 내가 썼던 커피값보다 훨씬 많이 돌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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