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중독의 다양한 얼굴

by 스팅비 StinGBee

Kensington-Cleanup-3-700x400.jpg

컴퓨터 화면이 먼저 나를 맞는다.

어제 밀린 리포트, 오늘 처리해야 할 일정, 이메일 몇 통.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고, 모니터 옆 포스트잇에는 처리해야 할 사건 번호들이 줄지어 붙어 있었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 스피커에서 무전이 튀어나왔다.


“I’ve got a call holding: white male, unconscious, at 22xx ____ St. Any available unit, check by with 1 Lincoln x4.”
(자막: 22xx ○○ St. 백인 남성 의식 없음. 가능한 유닛 있으면 1 Lincoln x4랑 만나기 바람.)


나는 의자를 밀치듯 일어났다.
이번 콜은 경찰서에서 멀리도 아니었다. 바로 옆 건물 파킹장.
차를 타고 나갈 거리도 아니었다. 뛰는 게 더 빨랐다.


복도 끝을 돌아 계단을 내려가며, 머릿속에 먼저 뜨는 건 주소가 아니라 패턴이었다.
이런 콜은 대부분 비슷했다.


“의식 없음.” “호흡 불명.” “바닥에 쓰러짐.”
그리고 거의 언제나—과다복용(OD) 추정.


반대쪽에서 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르켄 가져가자.”

그 말이 ‘결정’이 아니라 ‘확인’처럼 들릴 때가 있다.
이 동네에서는, 그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인다.


파킹장 입구를 돌자마자 상황이 보였다.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장면은 설명이 필요 없다.

남자는 바닥에 반쯤 꺾인 자세로 누워 있었고,
여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몸만 세워 둔 채 정말 영화에서 나오는 좀비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텍사스 한복판의 익숙한 공간인데도, 내 머릿속은 순간 다른 도시를 떠올렸다.

켄싱턴.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지역—오피오이드·펜타닐 같은 약물로 거리 과다복용(OD) 장면이 자주 보도되는 곳. 여긴 텍사스인데도, 그 이름이 먼저 튀어나왔다. 지도는 달라도 풍경은 자꾸 겹쳤다.


나는 무전기를 입에 붙였다. 목소리는 자동으로 ‘업무용’이 됐다.

“8xx8. I have a white male, possible OD—unconscious, not breathing. Request EMS. Request another unit to assist.”
(자막: 8xx8이다. 백인 남성 1명 OD 의심—의식 없고 숨 안 쉬고 있음. EMS 연락바람. 다른 유닛도 지원요청바람.)


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감정은 늘 한 박자 늦다. 현장에서는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


가까이 다가가자 냄새가 먼저 나를 때렸다.
새콤한데, 그 새콤함이 음식이나 술의 냄새가 아니었다.
젖은 걸레를 오래 방치해 둔 냄새 같았다.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목이 먼저 막히고, 본능적으로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냄새.

솔직히 말하면—
그 냄새는 살아있는 사람 몸에서 날 수 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빠져나간 자리에서 나는 냄새처럼.


그리고 바로 보였다.

남자 입가에서부터 앞가슴까지 번져 있는 구토 흔적.
바닥에도 질척하게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딱 하나로 좁혀졌다.


나도 모르게 순간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Ah— f—k.”

(자막: 젠장.)


‘이건 약 때문만이 아니라… 혹시 기도가 막힌 거면?’

나는 무릎을 꿇고 남자의 몸을 옆으로 돌려 눕혔다.

짧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장갑을 끼고, 입을 벌려 안을 확인했다.
눈으로 확인하고, 손끝으로도 확인했다.


‘제발… 기도만은 막히지 마라.’


그다음에야 나르켄을 꺼냈다.

첫 투여.

그 뒤부터는… 시간이 이상해진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1분은, 현장에서 10분처럼 늘어난다.


나는 시계를 봤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2분 후.

아직도 미반응.

3분이 되었다.
여전히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때 머릿속에 딱 한 줄이 맴돈다.


‘제발… 숨만 쉬어라.’


나는 다시 준비했다.
훈련대로, 프로토콜대로.
두 번째 투여.

그 사이, 옆에서 동료가 여자를 확인하고 무전을 올렸다.
내가 남자 쪽에 붙어 있는 동안, 그는 여자 쪽을 보고 있었다.


“Be advised. I also have a white female, possible OD. She is conscious and breathing.”
(자막: 참고해. 나도 백인 여성 1명 OD 의심 있다. 의식은 있고 숨은 쉬고 있다.)


그 한 줄이 이상하게 더 무겁게 들렸다.
의식이 있고 숨을 쉰다고 해서, 괜찮다는 뜻은 아니니까.
오히려 더 오래, 더 깊게 무너지는 쪽이—가끔은 그런 쪽이니까.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
앰뷸런스가 파킹장 입구로 들어오는 순간,
그제야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었다.


앰뷸런스와 소방차들이 도착하고 나서야
응급대원들이 남성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미 뛰어와서, 만져보고, 뒤집고, 확인하고,
이미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해놓은 상태였다.


그들은 장비를 펼치고, 손전등을 비추고,
맥박과 호흡을 다시 잡아가며

이 남자의 호흡을 다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주변을 정리하며 남자 옆에 굴러다니던 낡은 가방을 봤다.

손때에 찌든 작은 보따리 같은 가방.
바닥에 오래 눌린 것처럼 축 처져 있었다.

혹시라도 무기가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지퍼를 열었다.

지퍼를 여는 순간,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 같은 냄새가 확 올라왔다.


그 순간—

안에서 뭔가가 살아 움직이며 한꺼번에 쏟아졌다.

바퀴벌레였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백 마리가 “우스스륵”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리더니
콘크리트 바닥 위로, 내 신발 쪽으로, 벽 틈으로—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로 옆에 있던 응급대원 중 한 명—여자 대원이 잠깐 고개를 돌렸다.
바퀴벌레들이 우스스 흩어지는 걸 보고, 몸이 아주 미세하게 뒤로 빠졌다.
그건 놀람이라기보다… 반사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반사는 1초도 못 갔다.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자기 바지 쪽으로 기어오르려던 한 마리를 툭—쳐서 떨어뜨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남자 쪽으로 시선을 꽂았다.


표정은 이미 ‘현장’의 표정이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건 더러운 게 아니라, 흔한 거라고.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벌레가 아니라—숨과 맥이라고.


그 사람들로 부터 풍기는 역한 냄새가 바퀴벌레보다 먼저,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래 무너져 있었는지’를 말해줬다.

가방 안에는 누군가의 삶이 들어 있었다.

그때, 손보다 빠르게 내 눈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낡고 자그마한 책 한 권.

겉표지가 너무 닳아 어떤 책인지 바로 알 수 없었다.

모서리는 둥글게 뭉개져 있었고, 표지는 땀과 때에 먹물처럼 번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그제야 알았다.
성경책이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구절마다 볼펜 자국이 먼저 보였다.
어떤 줄은 두 번, 세 번 눌러 그어져 있었고,
몇몇 문장 위엔 형광펜이 번져 있었다.


급하게 표시한 게 아니라, 오래 반복해서 읽은 흔적처럼.

페이지 사이엔 접힌 종이 조각이 끼워져 있었고,
어떤 구절은 손가락으로 너무 눌렀는지 글자가 흐릿했다.


그 아래엔 구겨진 속옷과 얇은 옷가지 몇 벌.
급하게 쑤셔 넣은 흔적.

그리고—
설명서가 없어도 “현장”이 알려주는 물건들.
이건 취미가 아니라, 생존처럼 굳어진 흔적이었다.

라이터.
그을린 숟가락.
작게 그을린 포일 조각.
눌려 망가진 빨대 같은 것.
손때 탄 작은 도구들.


그런데 그 옆에 또 있었다.

작은 화장품 파우치.
반쯤 비어버린 립밤, 깨진 콤팩트, 뚜껑이 헐거워진 스킨통.
그리고 비누.
호텔에서 가져온 것 같은 작은 비누 하나가 지퍼백 안에 들어 있었다.


젖지 않게, 녹지 않게—나름대로 지켜내려 한 흔적.

그 순간 나는 멈췄다.

이 가방 안에는
“중독자”라는 단어 하나로 묶을 수 없는 것들이 같이 있었다.


한때는 분명 이들에게도
기도하려던 마음,
몸을 씻고 싶던 마음,
사람답게 보이고 싶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위에 덮여버린 것들은

너무 두껍고,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중독’이라는 단어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이 말하는 중독은 늘 남의 얼굴을 쓰고 나타난다.
인도에 쓰러진 남자, 흔들리는 여자, 뉴스 화면 속 거리.
하지만 내 기억은 자꾸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뉴욕이었다.

어릴 때 나는 호기심이 많았다.
그리고 호기심 많은 애들 특유의 그 멍청한 자신감도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그냥 “한 번”이라는 말로 대마초를 처음 피워봤다.

누군가를 해치려던 것도, 인생을 망치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때의 나는 그게 어디로 이어질지 몰랐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었다.


옆에 있는 친구들과 같은 공기를 마셔야 ‘우리’가 되는 것 같아서.
안 하면 나만 빠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어울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척했다.


세월이 흘러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한 번”은 갑자기 내 인생의 문 앞에 서서 나를 붙잡았다.

입직 과정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약물 검사, 거짓말 탐지기, 배경조사.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사람의 과거를 해부하는 과정 같았다.


그리고 나는 결국, 아주 긴 해명문 같은 에세이를 써야 했다.
왜 그랬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변명처럼 보이지 않게, 하지만 숨기지 않게 하나 숨김없이 써야 했고.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언어로 끝까지 적어야 했다.


그 글은 ‘정답’이 아니라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진실’에 가까웠다.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중독이 무서운 이유는, 처음부터 악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는 거.
대부분은 “별거 아닌 일”의 얼굴로 온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요즘 현장에서 보는 건
“호기심이나 제미로”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대개 한 번이었다.
한 번인데—그 한 번이
완전한 중독으로 떨어지거나,
아예 다시 깨어나지 못하는 쪽으로 끝난다.


이제 호기심이라는 단어는 가볍게 쓸 수 없다.

지금의 신종 약물은
호기심을 “기회”로 보지 않는다.
호기심을 “표적”으로 본다.


그래서 나는 더 강하게 말한다.

다른 건 몰라도—마약만큼은 절대 시작하면 안 된다.
지금은 “한 번”이
인생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인생을 끝내버릴 수 있는 시대다.


예전에 갑작스러운 건강악화로 수술을 받았을 때, 나는 또 다른 형태의 중독을 정면으로 만났다.

그 고통은 내가 처음 겪어보는 종류였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운 통증.


병원은 당연하다는 듯 처방전을 건넸다.
오피오이드(마약성) 진통제.

나는 딱 두어 번 먹고 위가 뒤집히면서 바로 구토를 했다.
몸이 거부하는 느낌이 너무 분명했다.


고통보다 싫었던 건—
그런 마약이 내 몸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 먹었다.
몇 달을 버텼다.


누구는 “네가 덜 아파서 안 먹은 거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그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꺼번에 밀려왔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버텼고, 그래서 더 선명하게 느꼈다.


나는 오피오이드(마약성) 진통제를 먹고 싶지 않았다.
그건 ‘강한 척’도, ‘무식하게 참은’ 것도 아니었다.
그때 내 몸과 마음은 그렇게 판단했다.


내가 느낀 건 이거였다.
그 약이 내 몸을 낫게 해준다기보다,
내 뇌가 고통을 인식하는 통로를 잠깐 가려주는 쪽에 더 가깝다는 것.

그러면 고통은 덜 느낄지 몰라도, 나는 내가 어디까지 무너지고 있는지조차 흐려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안 먹었다. 그게 그때의 나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주변은 더 현실적이었다.


뉴저지에 있는 형도 의사,
형수님도 의사,
그리고 친구들도 다 의사였다.

그들은 말했다.

“왜 무식하게 참아?”
“정해진 용량, 정해진 시간, 안전수칙 지키면 안전해.”
“통증을 관리하는 게 회복이야.”


그 말이 의학적으로 맞다는 것도 안다.
그들은 환자를 살리는 방식으로 말했을 거다.

또한 의료인으로서, ‘정상적인 복용’이라는 기준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현장에서 너무 많이 봤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너무 빨리, 너무 깊게 미끄러지는 걸.


그리고 나는 이상하게도 그 기준이 자꾸 현장과 겹쳐 보였다.

파킹장에서 흔들리던 사람들.

쓰러져 있던 사람들.
처음부터 ‘그럴 사람’이었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


대부분은 중산층이었고,
나름 정상적인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무너진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래서 더 확신했다.
약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약이 ‘위로’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문턱을 낮출 때가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문턱을 낮춘 건, 환자만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오피오이드 사태에서
한때 “안전하다”는 말이 너무 쉽게 팔렸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도.

(그게 어느 한 제약회사만의 문제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더 이상 그걸 ‘한 곳’의 욕심으로만 보지 않는다.
시스템 전체가 ‘괜찮다’는 말로 너무 많은 사람을 달래 버린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대형제약회사가 “안전하다”는 말을 너무 크게, 너무 오래 반복했다.
통증을 ‘관리’가 아니라 ‘제거’ 해도 되는 것처럼,
경고는 작게 접히고 안심시키는 문구가 앞에 붙었다.


누군가의 고통은 시장이 됐고,
어떤 욕심은 그 고통 위에서 ‘괜찮다’는 광고를 팔았다.
그 결과가 지금 내 눈앞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는 자꾸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고통이 두려운 사람이 아니다.
현장에서 매일 더 무서운 걸 보니까.
내가 진짜 두려웠던 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몸과 마음이 어떤 것에 길들여지는 거였다.


그리고 그날, 나는 다시 생각했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중독은 대개 “무너진 사람”의 모습이다.
술에 취한 얼굴, 약에 잠식된 눈, 통제 불가능한 성욕.

하지만 현실의 중독은 종종 정반대다.


멀쩡한 얼굴로, 멀쩡한 하루 속에서—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진행된다.
대부분은 아예 중독으로 불리지도 못한다. 그저 “습관”, “성격”, “의지 문제” 같은 말로 덮인다.
그래서 더 오래간다. 더 깊게 스며든다.

중독을 가르는 건 대상이 아니다.
‘없으면 불안해지는 방식’,
‘그걸 중심으로 하루가 굴러가는 방식.’

선택이 아니라 반사가 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이미 어떤 것에 기대고 있다.


내 손은 오늘도 무심코 휴대폰을 켠다.
뉴스를 보고, 검색을 하고, 브런치를 열고, 새로고침을 누른다.
불안해서인지, 심심해서인지, 그냥 습관인지—이젠 구분이 흐려졌다.
짧은 보상, 작은 확인, 그 미세한 안정감이 하루를 끌고 간다.


파킹장의 그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지도 않고, 약에 잠식된 눈으로 누군가를 해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중독은 종류가 아니라—인간의 마음이 기댈 곳을 찾는 방식이라는 걸.


멈추고 싶어도 멈추기 어렵고,
멈추면 금단처럼 불안해지고,
삶의 다른 부분이 망가지는데도 계속 반복된다면—
그건 취미가 아니라 의존이고, 의존은 결국 중독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한국도 이제 ‘마약 청정국’이라는 말을 마음 놓고 쓰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는 뉴스를 보게 됐다.

여러 나라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신종 마약류가, 생각보다 빠르게 일상 가까이까지 내려왔다.

나는 이 잡놈들을 그냥 ‘가해자’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나라를 망치고 피해자를 만드는 가해자로 본다.


그래서 처벌도, 수사도, 단속도 그만큼 냉정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이게 한 도시, 한 나라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경을 넘는 조직들과 연결된 유통망이 돈을 따라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무너지는 건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다.


나는 이런 범죄를 단순한 불법 거래로 보지 않는다.
사람의 고통과 생명을 값싼 이익으로 바꿔버리는 행위는,
형태만 다를 뿐 또 다른 종류의 매국노들이라고 생각한다.

마약을 팔아 돈을 버는 자들은 결국 사회를 조금씩 팔아넘기는 인간들이다.


총이나 칼이 아니라 분말과 알약으로 사람을 망가뜨리고,
가정과 공동체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린다.

그래서 나는 마약 거래상과 유통 조직만큼은
어떤 말로도 미화되면 안 된다고 믿는다.


이건 실수가 아니라 사업이고,
그 사업의 원가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인생이 들어간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말하고 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하나다.


그럼 나는?

나는 현장에서 중독을 수없이 본다.
사람이 사람의 형태만 남아 흔들리는 모습도 보고,
몇 분이 한 사람의 생사를 가르는 순간도 본다.
그래서 나는 늘 ‘중독’을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경찰서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는 순간,
내 손은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켠다.

뉴스를 확인한다.
사건 관련 정보를 검색한다.
SNS를 스친다.
그리고 브런치를 연다.


조회 수를 본다.
댓글이 달렸는지 확인한다.
새로고침을 누른다.
한 번 더 누른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걸 “중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 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머릿속이 비어 있는 느낌이 든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자꾸 확인하게 된다.

그때 나는 깨닫는다.


중독은 종류가 아니라 구조라는 걸.
‘없으면 불안해지는 방식’,
‘그걸 중심으로 하루가 굴러가는 방식.’
그리고 그 방식은
알약에서도 시작되고, 화면에서도 시작된다.


나는 당연히 마약이 싫다.
내 몸속에 들어오는 게 싫다.
그게 나를 바꾸는 게 싫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안다.
내 손 안의 작은 화면도,
내 마음을 조용히 길들이는 힘이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통제하고 있는가.
그리고—무엇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적어도 “중독”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지 않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적당히 하고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