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

뜬금없는 상상력

by 스팅비 StinG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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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별 하는 것도 없이 카운티 빌딩 안과 파킹장을 왔다 갔다, 같은 자리만—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도는 느낌. 내가 진짜 다람쥐처럼 도는 것처럼. 그러다 그나마 작은 내 사무실에 앉아서, 혹시라도 테러 위협을 퍼뜨린 그 개 똘아이 스토커가 나타나는지 그냥 대기하면서 “보고만” 있는 일이다. 누가 보면 멍 때리고 있는 줄 착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빌딩 매니저의 선심(?) 덕분에 자그마한 나만의 사무실이 생겼다는 거다.빌딩 매니저 베로나는 딱 봐도 마음씨 좋아 보이는 흑인 아줌마였다. 고맙게도 냉장고랑 전자레인지 같은 기본 가전이 다 갖춰져 있어서, 난 MDT(Mobile Data Terminal)랑 몸만 들어오면 됐었다.


Office.jpg 스팅비 사무실

순찰은 짬밥이 생겨서 그만둔 지 오래됐지만, 적어도 매일 밀려드는 콜을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미친 세상에서 잠깐 떨어져 나온 기분이 들었다. 문을 닫고 앉아 있으면 바깥 소음도 멀어지고… 잠깐은 세상이 멈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별안간 마블에 나오는 슈퍼히어로급 캐릭터들을 떠올렸다.

“어떤 캐릭터가 나랑 맞을까?”

이 나이에 이런 상상을 한다는 게 아직 철이 덜 들었다. ㅋㅋ


근데 생각을 해 보고 또 해 봐도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없다.

슈퍼맨은(참고로 얘는 DC지만) 지구를 빨리 여러 번 돌 정도로 어디든 원하는 대로 가고, 보고 싶은 건 다 보고, 가고 싶은 데는 다 가는 그 느낌이 매력적이긴 하다.

잠깐은 “와… 저 능력이면 인생이 얼마나 편할까” 싶다가도, 너무 천하무적이라 정이 잘 안 간다. 현실이랑 접점이 없다.


스파이더맨은 너무 어리고, 난 거미를 싫어한다.

그나마 재밌게 본 데드풀은… 말발이랑 텐션은 좋은데, 얼굴이 그 사건 이후로 너무 ‘상처’ 자체가 캐릭터가 돼 버린 느낌이라 또 손이 안 간다. 게다가 너무 막 나가고 너무 예측불가라… 보다 보면 내 머리가 더 피곤해진다.


헐크는 더 단순하다. 이놈은 너무 똘끼에, 분노로 폭주하는 느낌이 강해서… 난 저렇게까지 터지는 캐릭터는 아니다. 보고 있으면 시원하기보다 오히려 부담스럽다. 그래서 “아 됐다, 쓸데없는 생각 접자” 하다가도—

이왕 생각한 거, 갈 때까지 가 보자 싶어졌다.


그때 문득, 마블 슈퍼히어로 대신 로보캅이 떠올랐다.

그래. 이거다!

오늘의 나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로보캅이다. ㅎㅎ

로보캅이 맞다고 생각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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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처럼 순간이동하듯 다니는 능력? 총알도 직접 몸으로 막아내는 불멸! 솔직히 그런 거까진 필요 없다.

생각해 보면 로보캅은 처음부터 말 그대로 경찰이었다. 슈퍼맨처럼 신급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데드풀처럼 불멸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일하다가 망가지고, 맞고, 고장 나고, 수리되고, 다시 ‘부팅’해서 또 나가는 쪽이다. 그게 이상하게 더 현실적이다.


게다가 로보캅은 완전한 기계가 아니다. 사람이었던 기억과 감각이 껍데기 안에 남아 있는—사이보그에 더 가까운 존재다. 그래서 더 무섭지만, 더 현실적이다. 기능만 남은 게 아니라, 사람으로 느끼는 것까지 같이 끌고 가는 존재다.


그리고 로보캅은 늘 ‘규정’ 같은 게 몸에 박혀 있는 느낌이 있다. 하고 싶은 대로 뛰는 영웅이 아니라, 해야 하는 걸 하게 만들어진 존재. 딱 그게… 메일, 보고서, 체크리스트에 묶여 있는 오늘의 나랑 닮았다.


또 나는 그런 거 말고 프린터 와이파이가 멈추지 않게 해주는 능력, 보고서가 알아서 완성되는 능력이 더 절실하다. 스파이더맨은 거미줄을 쏘지만, 나는 하루 종일 쏘는 게 따로 있다.

메일, 보고서, 체크리스트.

거미줄보다 더 질기고 더 끈적하게 따라온다.


데드풀은 텐션이 너무 좋아서 재밌긴 한데, 같이 있으면 내가 먼저 방전될 것 같다. 로보캅은 텐션이 아니라 전원으로 사는 느낌이라 그게 오히려 편하다. 헐크는 화가 나면 다 부숴버린다. 근데 난 그 정도로 터지는 타입은 아니다. 화나도 그냥 입술 한 번 깨물고, “괜찮습니다” 하고 넘어가는 쪽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보캅은 헬멧을 쓰면 표정이 안 보인다. 오늘 같은 날엔 그게 제일 부럽다. 카운티 빌딩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백 명의 얼굴들—그중엔 “뜬금없이 왜 경찰이 여기 있지?” 같은 의문의 표정도 섞여 있다. 그런 시선들이야 원래 익숙해져 있는데, 오늘따라 좀 이상하게 그냥 지나가질 않았다.


눈에 걸렸다기보다 피부에 붙는 느낌. 평소엔 한 번 스캔당하고 끝나는 일인데, 오늘은 그 시선들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남았다. 마치 내가 유리 진열장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어깨가 먼저 굳고, 목덜미가 먼저 당겼다. 그래서 더 로보캅이 부러웠다. 무적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감정표시 기능을 잠깐 꺼두고 그냥 임무만 수행하고 싶어서—내 얼굴에도 ‘감정표시 기능 잠시 꺼두기’ 버튼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까, 또 생각이 튄다.

문득… 이 캐릭터들은 영생을 사나? 슈퍼맨도, 데드풀도, 스파이더맨, 헐크도… 어쨌든 인간이었는데.

슈퍼맨만 빼고^^

로보캅은 기계라서 그런 고민이 덜하다. 고장 나면 수리하고, 재충전하고, 다시 부팅하면 된다. 그게 오늘은 이상하게 부럽다. 여기서 내 뇌가 또 이상한 데로 간다.


작년쯤인가 나름 꽤 유명한 유튜브채널에서 “시진핑이랑 푸틴이 만나서, 요즘 의료과학기술로 사람이 150년은 거뜬히 산다~” 같은 얘기를 했다는 장면을 봤고 그걸 본 현지사람들까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핫마이크로 흘러나왔다고도 하고.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한 번 들으면 머리에 남는다.


그러면서 또 다음 메뉴가 붙는다. “젊은 사람들의 피를 뽑아서 주입하면 젊어진다더라.” 나도 안다. 이건 음모론 냄새가 풀풀 나고, 확실한 것도 아닌데… 이런 얘기는 왜 이렇게 끈질기게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

근데 여기서 내 상상력이 또 사고를 친다. 홍콩 레전드 배우들 얘기까지 같이 따라붙는다.

예를 들어 홍금보, 이연걸 같은 사람들도, 예전엔 몸이 안 좋다 어쩐다 소리가 나오다가 어느 순간 “팔팔해졌다더라” 같은 말이 돌아다녔다.

(당연히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고, 그냥 내 머릿속이 멋대로 영화 캐스팅하는 거다.)

마치 겨울잠 자다 깨어난 곰처럼—눈빛이 다시 살아나고, 걸음에 힘이 붙고, “어?” 싶은 느낌으로.


그리고 마지막은 완전 B급 영화다. 돈 많은 재벌이나 정치인들이 조폭 같은 조직을 동원해서 젊은 애들 납치하고 피 뽑는다… ㅋㅋ 말이 되냐? 말이 안 되지.

근데 내 뇌는 가끔 이렇게까지 간다.

(진짜 뉴스라는 뜻이 아니고, 그냥 내 머리에서 만들어낸 괴담 시나리오다.)


이쯤 되면 내 뇌에 과부하가 걸렸던 건 확실하게 느낀다. 근데 웃긴 게, 그렇게 한바탕 상상을 돌려놓고 나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게 정상으로 돌아오려는 건지, 아니면 더 깊은 상상 속으로 잠수하려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만약 진짜 영생을 산다면 어떨까? 처음엔 좋겠지. 시간 많다, 아쉬울 게 없다… 이런 느낌으로.

근데 생각해 보면 영생이란 게 결국 퇴근이 없는 근무 같은 거잖아. 쉬는 날도 없고, “이번 생은 여기까지” 같은 엔딩도 없고. 그럼 그건 축복이 아니라… 그냥 끝없는 연장근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이 오래 살면 뭐가 제일 먼저 생길까? 지혜? 여유? 인격? 아니, 아마 제일 먼저 생기는 건 귀찮음일 것 같다. “아… 또 23세기 월요일이네.” 같은 거. 독자들도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보지 않나 싶다. 영생을 준다 그러면 순간 혹할 것 같다가도, 막상 “영원히 살아야 한다”로 바뀌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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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보면 인간은 오래 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오늘을 덜 버겁게 살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골때리는 상상력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순간, 한국 캐릭터가 떠오른다. 500년을, 1000년을 살아온 구미호.

영생이 멋있어 보이지만, 오래 살수록 오히려 지루해졌을지도 모른다. 매번 같은 계절, 같은 인간의 거짓말, 같은 욕심… 그걸 수백 번 보면 ‘무적’이 아니라 ‘무감각’이 되겠지란 생각도 든다.


근데 더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오래 산 존재가 결국 인간을 믿어 보기로 한다는 거다.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 끝이 있는 삶을. 그래서 구미호는 하찮은 인간이 되기 위해 뭔가를 내어주고, 희생까지 한다. 사기당할 수도 있고 배신당할 수도 있는데—그래도 한 번쯤은 “진짜”를 믿고 싶어서. 그리고 또 하나 떠오른다.


뱀파이어. 이쪽은 반대로 인간이 되고 싶다기보다… 너무 오래 살아서 감정이 다 닳아버린 느낌이 강하다.

밤만 계속되고, 사람들은 계속 바뀌고, 익숙해질 만하면 다 사라지고. 그래서 뱀파이어 얘기엔 늘 “외로움”이 붙는 것 같다.


영생이란 말이 사실은 끝없는 이별이니까. 그러니까 영생이 부러운 게 아니라… 생각해 보면 좀 무섭다.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오래 견디는 거잖아. 결국, 이게 제일 인간적인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영생은 퇴근이 없고, 무적은 상처가 없다.


그럼... 영생도, 무적도 필요 없다
나는 그 둘 대신,

로보캅 전원을 끄고 사람으로 돌아오는 쪽을 택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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