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비밀 친구

말이 폭력이 되는 순간

by 스팅비 StinGBee

말폭력.png 하루의 친구 봄이

말이 사람을 작게 만들 때가 있죠. 그 순간을 동화로 옮겨봤습니다.

오늘부터 생각일기에 2-3편 정도로 나눠서 이어가 보려고 합니다.


평화롭고 화목해 보이는 어느 집에 하루라는 아이가 살았어.

하루는 조용한 아이였어.

하루에겐 비밀 친구 같은 곰인형이 하나 있었어.

배를 누르면 “쿵!” 하고 소리가 나서, 하루는 그 곰을 쿵쿵이라고 불러.


집은 밖에서 보면 늘 멀쩡해 보여.

아빠는 사람들 앞에서 웃고, 엄마도 인사 잘하고, 하루도 얌전하게 고개 숙여.

그런데 하루는 알아.

문이 “딸깍” 닫히면, 집 안의 공기가 달라진다는 걸.


그날 저녁, 엄마가 밥을 차렸어.

엄마는 젓가락을 놓기 전에도 아빠 얼굴을 한 번 보고, 또 보고, 또 봤어.

아빠가 국을 한 숟갈 먹더니 말했어.


아빠: “이게 뭐야. 이거 오늘은 간이 왜 이래.”

엄마: “죄송해요… 제가 다시 맞출게요.”

아빠: “당신, 결혼하기 전엔 안 그랬잖아.”

엄마: “여보… 저도 요즘 좀—”

아빠: “요즘? 요즘이 아니라 그냥 당신이 변한 거지.”

아빠: “아니, 결혼 전엔 봐줄 만했어. 근데 지금은… 네 몰골 보고도 같은 말 할 수 있어?”


엄마가 입을 열려는데, 아빠가 말을 더 얹었어. 목소리는 크지 않았어. 근데 더 차갑게 들렸어.

아빠: “당신 거울 좀 봐. 그 꼴로 내가 어디 같이 나가고 싶겠어?”

엄마: “그런 말은… 제가 마음이—”

아빠: “마음? 내가 더 마음 상해. 당신 때문에 내가 창피하다고.”

엄마: “여보, 저는… 그렇게까지는…”

아빠: “내가 틀린 말 했어? 다 사실이잖아.”


아빠: “그리고 요즘 당신 도대체 이 동네 어떤 여자들이랑 만나서 헛소리 듣는 거야?”

아빠: “집안 얘기 밖으로 새어나가게 하지 마. 소리 안 나가게 해.”

아빠: “정말…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어.”

아빠: “당신 때문에 창피해서 내가 얼굴을 들 수가 있어야지.”


엄마는 입을 다물었어.

그 순간, 밥상은 조용해졌어.

조용한데, 숨이 더 막혔어.

하루는 밥을 씹다가 멈췄어.


엄마가 작아지는 게 보였거든.

엄마는 숟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어.

아빠는 그걸 보고도 아무 말 안 했어.

근데 그 침묵이… 벌처럼 느껴졌어.


밤이 되자 하루는 이불속으로 들어가 쿵쿵이를 꺼냈어.

쿵쿵이 배를 살짝 눌렀어.

“쿵—”

하루: “쿵쿵이… 오늘 아빠가 엄마한테 이상한 말 했어.”

쿵쿵이: “어떤 말?”


하루: “엄마한테… ‘결혼 전엔 안 그랬다’고. ‘몰골’이 어떻다고. ‘창피해서 같이 나가기 싫다’고…”

쿵쿵이: “하루야, 그 말들은 ‘사실’이 아니라 사람을 작게 만드는 말이야.”

하루: “근데 아빠는 ‘다 사실’이라 그랬어.”


쿵쿵이: “그게 무서운 점이야. 사실처럼 말해서, 엄마가 자기 마음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거.”

하루: “엄마가… 자꾸 ‘제가 죄송해요’만 하잖아.”

쿵쿵이: “응. 엄마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겁이 나서 그럴 수도 있어.”


하루는 쿵쿵이를 더 꼭 안았어.

하루: “그럼… 그건 사랑이야?”

쿵쿵이: “사랑은 사람을 작게 만들지 않아. 사랑은 선택을 지워버리지도 않아.”

하루: “선택?”

쿵쿵이: “응. 누가 ‘넌 원래 그래’ ‘너 때문에 내가 이래’ 같은 말로 묶어두면, 엄마는 말도 못 하고 움직이기도 어려워져. 그건 사랑이 아니라 통제야.”


하루는 눈을 깜빡였어.

통제라는 그 말이 너무 어려울까 봐, 쿵쿵이가 더 쉬운 말로 바꿔줬어.

쿵쿵이: “쉽게 말하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말이야.”

하루: “그럼 우리… 어떻게 해야 해?”


쿵쿵이: “여기서부터는 아주 분명해. 하루야, 잘 들어.”

쿵쿵이는 동화 속 곰인형치고는 이상하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어.

마치 하루가 꼭 알아야 하는 규칙을 읽어주는 것처럼.


쿵쿵이: “먼저, 나쁜 말에는 짧게 말해. 길게 설명하려고 하면 더 힘들어져.”

하루: “그럼 뭐라고 해야 해?”

쿵쿵이: “응, 이렇게. 아주 짧게 말하면 돼.”

쿵쿵이: “‘그 말은 상처예요. 그만해 주세요.’”

쿵쿵이: “‘외모로 깎아내리는 말은 듣기 싫어요.’”

쿵쿵이: “‘저는 그런 말로 대화 못 하겠어요.’”


하루: “근데 아빠가 또 뭐라고 하면?”

쿵쿵이: “그다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야. 자리를 피하는 거.”

하루: “그냥 가?”

쿵쿵이: “응. 조용히 일어나서 다른 방으로 가도 돼. 전화면 끊어도 돼. 답을 안 해도 돼.”

쿵쿵이: “그건 도망이 아니라 내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야.”


하루는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어.

하루: “그래도 계속 그러면?”

쿵쿵이: “그럴 땐 혼자 해결하려고 하면 안 돼. 꼭 밖의 어른을 불러야 해.”

하루: “밖의 어른?”

쿵쿵이: “응. 믿을 수 있는 어른. 이모, 할머니, 선생님, 상담 선생님.”

쿵쿵이: “그리고 아주 중요한 거.”


쿵쿵이: “만약 손으로 밀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몸을 잡으면… 그건 절대 참는 문제가 아니야.”

쿵쿵이: “그땐 바로 도움을 불러야 해. 지금 당장 안전부터. (지역 긴급번호 112(한국)/911(미국) 같은 곳에)”

하루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

하루: “엄마가 무서워하면?”


쿵쿵이: “그래서 더더욱 ‘밖의 어른’이 필요해. 혼자 있으면 통제는 더 커져.”

쿵쿵이: “하루야, 이것도 꼭 기억해.”

쿵쿵이: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이건 나쁜 말이야.’”

쿵쿵이: “‘엄마가 틀린 게 아니라, 엄마를 틀린 사람처럼 만들려는 말이야.’”


그다음 날 저녁이었어.

아빠가 또 비슷한 말을 하려는 순간, 엄마가 잠깐 숨을 크게 들이마셨어.

(하루는 그 숨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쿵쿵이를 꼭 쥐었어.)


엄마: “여보… 그런 말은 나에게는 큰 상처예요. 그만해 주세요.”

아빠: “뭐? 내가 상처라고? 또 예민하게 굴지 마.”

엄마: “예민한 게 아니라… 저는 그런 말로 대화 못 하겠어요.”

엄마: “잠깐 방에 있을게요.”

엄마는 일어나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어.


하루는 놀랐어.

엄마가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멈춰”를 한 것 같았거든.

그날 밤, 하루는 쿵쿵이에게 속삭였어.

하루: “쿵쿵아… 엄마가 말했어. 진짜로.”

쿵쿵이: “그거야, 하루야. 짧게 말하고, 움직이는 거.”

하루: “근데 아빠가 더 화내면?”

쿵쿵이: “그래서 마지막이 있어. 도움 부르기.”


며칠 뒤, 엄마는 하루 옆에서 조용히 전화를 걸었어.

목소리가 떨렸지만, 말은 분명했어.

엄마: “언니… 저… 오늘은 하루랑 잠깐 갈게요. 지금 집에 있기가 좀 무서워요.”

전화기 너머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어.

“그래. 지금 나갈 준비만 해. 내가 갈게.”


그날 밤, 하루는 처음으로 알았어.

문이 닫혀도 전쟁이 시작되지 않는 곳이 있다는 걸.

누군가가 “밖에서” 손을 잡아줄 수 있다는 걸.

이불속에서 하루가 쿵쿵이를 꼭 안고 말했어.


하루: “쿵쿵아… 우리 마음은 장난감 아니지?”

쿵쿵이: “응. 마음은 소중해. 그래서 지켜야 해.”

하루: “그럼 나는… 엄마랑 같이 움직일 거야.”

쿵쿵이: “그래. 움직이는 건 용기야.”

쿵쿵이: “그리고 하루야, 마지막으로 이 말.”

쿵쿵이: “안전이 먼저야. 언제나.”

쿵쿵이가 “쿵!” 하고 울렸어.


그 소리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너도 소중해. 엄마도 소중해.”

이불속에서 하루는 쿵쿵이를 꼭 안고 말했어.

하루: “쿵쿵이… 알겠어. 나, 꼭 그렇게 할게.”

쿵쿵이: “응. 짧게 말하고, 자리를 피하고, 필요하면 어른에게 도움 부르기. 그 순서 잊지 마.”


하루는 잠깐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어.

하루: “근데… 쿵쿵아. 아빠가 ‘나쁜 사람’이기만 한 건 아니잖아.”

하루: “밖에서는 웃기도 하고, 나한테 과자 사주기도 하고… 가끔은 진짜 괜찮은데… 집에서는 왜 그렇게 말해?”


쿵쿵이는 잠깐 조용히 있다가 말했어.

쿵쿵이: “사람은 한 가지 얼굴만 있는 게 아니야.”

쿵쿵이: “근데 하루야, 사람이 가끔 착하다고 해서 나쁜 말이 괜찮아지는 건 아니야.”

쿵쿵이: “누구든… 말로 상대를 작게 만들면, 그건 멈춰야 해.”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게 있었어.

하루: “쿵쿵아…”

쿵쿵이: “응?”

하루: “내 친구 집은… 우리 집이랑 반대야.”

쿵쿵이: “반대?”


하루는 이불을 더 끌어올리고, 속삭이듯 말했어.

하루: “우리 집은 아빠가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잖아.”

하루: “근데 내 친구 집은… 엄마가 아빠한테 그래.”

하루: “친구가 말했어. 친구네 엄마가 아빠한테 ‘너는 원래 그 수준이야’ ‘내가 너 데리고 나가면 창피해’… ‘속아서 결혼했어’… 그런 말을 자꾸 한다고…”


쿵쿵이의 눈이, 아주 조금 더 또렷해진 것 같았어.

하루: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는데… 웃는 얼굴이 이상했어.”

하루: “그냥… 웃는 척하는 것 같았어.”

하루는 쿵쿵이 배를 꼭 누르려다 멈췄어.


이번엔 소리를 내기 전에 먼저 말이 나왔어.

하루: “쿵쿵아… 나, 친구한테 뭐라고 해야 돼?”

하루: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하루: “쿵쿵아… 도와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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