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Hold You in My Arms)
[안내 — 모방 범죄 주의]
본 작품에는 범죄 수법·수사 절차·법정 장면이 현실적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범죄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며, 현실에서의 모방을 강력히 금합니다.
작품 속 사건은 허구 또는 각색이며, 어떠한 범죄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PART 2/4] 너를 품에 안으면 [14장-2부] — 첫 사건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4-2)
사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찰칵” 하고 났다.
그 소리는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복도를 걸어 나오며 선율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그대로 내쉬었다.
후—.
안도였다.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의 한숨.
근데 숨이 편해지는 대신, 머리가 더 시끄러워졌다.
‘여기까지… 왜 왔지?’
그 질문이 갑자기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처음엔 그냥 “해야 해서”였다.
살아남으려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누구에게든 “괜찮다”는 얼굴로 서 있으려고.
그다음엔 책임이 됐다.
누군가의 신고.
누군가의 울음.
누군가의 “도와달라”는 말.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도망치듯 달려온 길이
내가 선택한 길로 바뀌어 있었다.
선율은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딸깍” 잠그는 순간, 또 한 번 숨이 나왔다.
후—.
훈련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버텨야 했던 시간이 “일단은” 끝났다는 뜻.
그 “일단”이 주는 안도감은 달콤했다.
몸이 먼저 풀렸다.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선율은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차 안을 채우자,
머릿속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 짧은 조용함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집으로 가는 길.
창밖의 햇빛은 너무 정상적이었고,
사람들은 너무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이었고,
신호등은 너무 규칙적이었다.
정상적인 풍경은 가끔 잔인했다.
특히—다리 밑 사건 같은 걸 겪고 나면.
그날의 공기.
차 안의 숨소리.
아이의 눈.
그리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뒤집어쓴 짐승.
끝난 장면이 아니라
몸에 남은 잔상처럼.
선율은 입술을 한번 꾹 다물었다.
‘다 끝났어. 이제…’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전화였다.
차 스피커로 연결되며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보, 지금 어디예요? 지금 오고 있어요?”
부인이었다.
선율은 목소리를 정리했다.
방금 전까지 마음속에서 굴러다니던 것들을
목구멍 뒤로 밀어 넣는 느낌으로.
“어, 왜? 나 집에 가는 중이야. 무슨 일 있어?”
부인이 잠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다름이 아니라, 무슨 편지가
와 있는 거 같은데…
변호사 사무실에서 온 거 같아요.”
선율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올라갔다.
“… 뭐라고? 변호사 사무실?”
“응. 봉투에 로펌 이름 같은 게… 찍혀 있어.”
선율은 핸들을 더 세게 잡았다.
“아니… 우리한테 변호사 사무실에서
편지가 올 일이 없을 텐데…”
말은 그렇게 했는데, 말 끝에서 이미 불안이 시작됐다.
불안은 늘 그랬다.
‘말이 안 되는데’ 싶은 순간에 가장 정확하게 사람을 물었다.
“일단… 내가 금방 갈게. 봉투 뜯지 말고 그대로 놔둬.”
“알았어요.”
전화를 끊는 순간,
선율의 안도감은 딱 거기까지였다.
방금 전까지 “한 고비 넘겼다”던 마음이
순식간에 다른 고비를 발견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는 액셀을 조금 더 밟았다.
속도를 올린 게 아니라—
마음이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선율은
차 문을 열자마자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부인이 거실 쪽에서
봉투를 들고 나왔다.
“자기야.”
“편지 줘봐.”
선율은 봉투를 받는 순간,
종이 질감부터 확인했다.
두꺼운 재질.
괜히 고급스러운 종이.
정갈한 글씨체.
겉면에는 분명히 로펌 같은 이름이 박혀 있었다.
근데 이상했다.
너무… 완벽했다.
완벽한 글씨체.
완벽한 정렬.
완벽한 ‘위협의 냄새.’
선율은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안에는 한 장짜리 안내문이 들어 있었다.
첫 줄이 눈에 박혔다.
FINAL NOTICE
(자막: 최종 통지)
선율의 눈이 좁아졌다.
“최종 통지…?”
부인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선율은 대답을 바로 못 했다.
왜냐면 그 아래 문장이 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귀하의 계정(또는 사업체) 관련 법적 절차가 진행 중이며,
지정 기한 내 미응답 시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
“사건 확인 및 대응을 위해 아래
QR 코드를 스캔하십시오.”
QR 코드.
그 작은 사각형이 선율의 목덜미를 차갑게 만들었다.
로펌이,
‘최종 통지’라는 제목으로,
QR 코드부터 찍어 보내는 경우가 있나?
선율은 종이를 들어 빛에 비췄다.
인쇄는 좋았다.
너무 좋았다.
너무… AI가 만든 것처럼 좋았다.
선율은 종이를 내려다본 채 낮게 말했다.
“자기야… 이거, 진짜 로펌 아니야.”
부인이 숨을 삼켰다.
“… 사기예요?”
선율은 종이를 천천히 접었다.
“응. 근데… 그냥 사기보다 더 더러워.”
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선율은 대답 대신 문장을 다시 훑었다.
문장들이 이상하게 “중립적”이었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
사건 번호도 없다.
담당 변호사 이름도 없다.
진짜 법률 문서는 사람을 겁주기
전에 고정핀을 박는다.
누구. 무엇. 언제. 어디. 번호.
근데 이건 반대다.
“기한”과 “불이익”만 크다.
즉, 내용은 비워두고
공포만 채운 문장.
선율은 종이를 봉투에 다시 넣었다.
마치 증거물 다루듯 손끝으로만 집어 들었다.
“이거… 내일 가져갈 거야. 그리고 오늘은 절대 QR 찍지 마.”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이 흔들렸다.
선율은 그 흔들림을 봤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도 비슷한 흔들림을 느꼈다.
훈련을 통과한 게 끝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가족이 흔들릴 때 시작되는 법이었다.
다음날 아침, 선율은 아내가 차려준 밥상 앞에 앉았다.
따뜻한 밥, 김 오르는 국, 조용한 식탁.
오늘은 처음으로 사이버팀에 들어가는 날이라,
그 평범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선율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잠깐 멈췄다.
머릿속에서 오늘 하루가 짧게, 빠르게 정리됐다.
모니터.
폴더.
녹취.
웃는 동료들.
그리고—사람이 무너지는 소리.
언젠가는 맞아야 될 일이다.
사이버팀에 들어오면 결국 온갖 지옥을 보게 된다.
하지만 선율은 속으로 한 가지를 빌었다.
처음부터는, 제발.
미성년자 관련 사건만은 아니길.
그건 선율이 극혐 하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박혀 있는 것이었다.
분노가 아니라—몸이 먼저 반응하는 종류의 혐오.
머리로 참기 전에 속이 뒤집히는 종류의 기억.
그 순간, 밥상 위의 따뜻한 김이 아니라—
차가운 그림자가 떠올랐다.
다리 밑.
선선한 새벽 공기.
그리고… 어린 여자아이.
작은 어깨, 축 처진 손목.
공포의 질린 눈,
숨 넘어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짧게,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아버지라고 이름 달고 짐승처럼
딸의 목을 움켜쥐었다 놓는 것 같은 호흡.
살려달라는 말보다 더 직접적인 소리.
선율은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손끝이 하얘질 만큼.
‘오늘은 아니었으면.’
그는 그 생각을 입 안에서 한 번 더 굴렸다.
기도처럼, 주문처럼.
그리고 천천히 국을 한 모금 삼켰다.
따뜻한데도 목이 잠깐 막혔다.
경찰서에 도착한 선률이는,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건물 안 공기는 묘하게 건조했다.
1층은 민원과 순찰 보고로 소란스럽고,
사람 냄새가 섞여 있었는데—2층은 달랐다.
소음은 줄고, 대신 모니터 팬 소리와 프린터가
종이를 씹는 소리가 공기를 채웠다.
사건이 쌓여 있는 층의 소리였다.
복도 끝에 붙은 표지판.
CYBERCRIME / DIGITAL FORENSICS
문을 열자마자 선율은 느꼈다.
여긴 웃음도, 한숨도, 전부 “업무”
처럼 소비되는 곳이라는 걸.
안쪽 데스크에서 네 명 정도가
모니터를 돌려 보며 떠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누군가는 의자에 기대서,
누군가는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서로 맡은 케이스를 늘어놓는 말투가—
자랑 같기도, 자학 같기도 했다.
“야, 그 영상 봤냐?”
“그 아시안 여자… 미쳤더라. 진짜 톱 여배우 급이야.”
“근데 남자는… 와, 그냥 정말 털렸더라.”
“연애 사기지. 그것도 영상통화까지 하고. 다 믿었대.”
“사진 봐봐. 키 작고 뿔테 쓰고, 뚱뚱하고…”
“저런 여자가 왜 저 남자랑 결혼을 하냐? 말이 되냐.”
낄낄.
짧은 웃음이 튀었다.
웃음의 표정은 가벼웠지만,
그 밑바닥은 묘하게 잔인했다.
‘우린 안 당한다’는
확신을 서로 확인하는 웃음.
한 동료가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더 비웃었다.
“야, 얘 진짜 돈을 보냈대. 그것도 여러 번.”
“요즘 이런 AI 사기에 왜 이렇게 많이들 넘어가냐?”
“하긴…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그래도 그렇지. 와… 저 인간, 끝까지 믿었네.”
그 말이 끝나자, 다른 형사가 더 비웃듯 숨을 뿜었다.
“야 근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얼마 전엔 AI랑 결혼식 올린 사람도 있잖아.”
“맞아. 어떤 사람은 그거 때문에…
극단적 선택까지 했고.”
“요즘 AI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
누군가 다시 화면을 확대했다.
정지 프레임.
얼굴 경계가 미세하게 번지고,
조명이 한 박자 늦게 따라오고,
눈동자가 너무 매끈했다.
그걸 ‘증거’처럼 들이밀며,
한 동료가 확신에 찬 얼굴로 낄낄댔다.
“저 아시안 여자 영상?
저건 AI로 톱 여배우급 얼굴 덮어씌운 거야.”
“원래는… 화면이랑 완전 달라.
AI로 덧씌운 거 확실해.”
낄낄.
웃음이 한 번 더 튀었다.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무너짐을 밟고 서는 소리였다.
선율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고개만 살짝 돌렸다.
표정은 없었다. 다만 시선이 차가웠다.
“그런 말, 여기서는 하지 마세요.”
동료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냥 농담이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선율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농담이 누군가에겐 방아쇠가 됩니다.”
웃음이 딱 멈췄다.
잠깐의 정적이 생기고,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선율은 그 틈을 이용해 인사만 짧게 했다.
“오늘부터 합류합니다. 로버트 신입니다.”
고개가 몇 개 끄덕여졌다.
하지만 사건이 더 빠르게 사람을
잡아당기는 곳에서, 인사는 길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발소리.
담당 책임자가 파일을 들고 선율 앞에 섰다.
“로버트 신 경사. 새 배정 들어왔다. 이건 웃을 사건 아니다.”
책임자는 파일을 건네기 전에 선율을 한 번 훑었다.
업무용 질문이었지만 톤은 짧고 단정했다.
“By the way—do you speak Korean?”
(자막: 그런데—한국어 하지?”)
선율은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다.
농담 하나 던지고 끝내겠다는 얼굴.
“Come on, Captain—say my name. What does it mean to you?”
(자막: 에이, 캡틴—제 이름 불러보세요. 그게 당신한테 무슨 의미인데요?)
책임자가 피식 웃었다.
“그래. 됐다.”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일 표지에는 굵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사건명] 공관 사칭(주미 한국 총영사관 명의) →
법률대리인 연결형 금융사기
[피해자] 김민수(가명)
[피해금] 48,000 USD 이상 (현재까지)
[핵심] 출입국 제한·추방·한국 내 처벌을 빌미로 협박 →
‘해결 절차’ 안내를 가장해 상담원/변호사(로펌)로 연결 →
착수금(선임료)·수수료 명목 송금 유도
선율은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
담당 책임자가 말했다.
“김민수 쪽에서 자료를 꼼꼼히 남겼고 녹취가 있어.”
김민수가 그나마 잘한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화 내용과 그 과정을 녹음해 뒀다는 것이었다.
선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헤드셋을 꼈다.
오디오 파형이 화면에 떴다.
REC_CALL_01.mp3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사이버 사건에서 “증거”는 종이보다
먼저 목소리로 사람을 꺾는다.
—딸깍.
“김민수 씨 맞으십니까. 대한민국 영사관입니다.”
민수의 목소리가 바로 굳어 있었다.
“네… 맞습니다.”
상대는 친절했다.
그런데 그 친절은 안심시키는 방향이 아니었다.
조용히, 정확히, 도망갈 길을 막는 친절이었다.
“김민수 씨 명의가 한국 내에서 도용된 정황이 확인됐습니다.
단순 도용이 아닙니다.
현재 김민수 씨 명의가 여러 범죄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민수의 숨이 짧아졌다.
“저는… 그런 거 한 적이 없습니다.”
“김민수 씨, 협조하지 않으시면
김민수 씨는 피해자가 아니라
연루자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법적 처벌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선율은 파형을 보며 메모를 했다.
‘연루자’라는 단어로 방어를 끊는다.
녹취는 쉬지 않고 다음 칼날을 꺼냈다.
“또한 절차가 진행되면 출입국 제한이 검토될 수 있습니다.”
민수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출입국… 제한이요?”
“김민수 씨는 미국에 계시지요.
그렇다면 더 심각합니다.—
상황에 따라 미국에서도 절차가 진행될 수 있고,
체류 신분 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민수는 말이 막혔다.
사기단은 그 침묵을 기다렸다가,
더 깊게 눌렀다.
“최악의 경우, 미국에서 절차 이후
추방 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시면—
한국에서도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선율은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민수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 숨소리는 이미 ‘공포’가 아니라, ‘항복’에 가까웠다.
상대는 마지막에 구원처럼 말했다.
“김민수 씨께서 피해자임을 입증하시면,
지금 단계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김민수 씨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원하시면 연계된 로펌을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딸깍.
선율은 재생을 멈췄다.
그리고 그제야 방금 들었던 동료들의 웃음이 다시 떠올랐다.
‘동양계 미인’이 어쩌고, ‘멍청해서 당했다’가 어쩌고.
그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사건을 알면서도 인간을 잊어버린 사람의 말이었다.
선율은 다음 증거를 열었다.
NOTICE_SCAN_01.png
ZOOM_INVITE.eml
VIDEO_MEETING_01.mp4
RETAINER_AGREEMENT.pdf
PAYMENT_INSTRUCTIONS.png
CHAT_LOG.txt
공문 캡처를 확대하자, 빨간 글씨가 눈을 찔렀다.
출입국 제한 검토 중
형사 처벌 가능
즉시 본인 확인 필요
아래에는 QR 코드가 붙어 있었다.
‘본인 확인’이라는 단어는 이상하게 사람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사기단에게 그 단어는,
지갑을 여는 손동작일 뿐이다.
담당 책임자가 선율의 화면을 한번 훑고, 낮게 말했다.
“This is where it gets real. Watch the video.”
(자막: 여기서부터가 진짜야. 영상 봐.)
선율은 VIDEO_MEETING_01.mp4를 열었다.
화면이 켜지자, “영사관”을
사칭한 남성이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배경도, 각도도, 표정도—
모든 게 ‘공식’처럼 보이도록 계산돼 있었다.
“김민수 씨,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회의는 녹화됩니다.”
민수는 화면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바짝 굳어 있었다.
사칭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건 혼자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요청하신 대로 담당 변호사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화면이 분할되며 새 참가자가 들어왔다.
백인 남성. 서재 배경. 법률서가 꽂힌 책장.
깔끔한 셔츠와 침착한 눈빛.
‘미국 변호사’라는 이미지가 너무 교과서 같아서—
오히려 더 위험했다.
그가 카메라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Hello, Mr. Minsoo. I’m Daniel Hue.
I’m a lead attorney.”
(자막: 안녕하세요, 민수 씨. 저는 다니엘 휴이고,
총책임 담당 변호사입니다.)
“I reviewed the preliminary notes.
This is serious, but it’s manageable—
if we move fast.”
(자막: 사전 자료를 검토했습니다. 심각하지만,
빨리 움직이면 정리 가능합니다.)
민수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공포 속에서 처음 얻는 ‘숨구멍’이었다.
다니엘 휴가 마지막으로 덫을 깔았다.
목소리는 끝까지 친절했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서류처럼 정확했다.
“Mr. Minsoo, one thing first.”
(자막: 민수 씨, 한 가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Of course, you can choose any attorney you want.”
(자막: 물론 원하시는 변호사를 선임하셔도 됩니다.)
민수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선택권이 생긴 게 아니라—선택을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다니엘 휴는 그 틈을 정확히 눌렀다.
“But most attorneys are not
familiar with cases like this.”
(자막: 다만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이런
유형의 케이스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This isn’t a normal matter.
Once it’s flagged, it moves fast.”
(자막: 일반 사건이 아닙니다.
한 번 ‘표시’가 붙으면 절차가 빨라집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확신’처럼 보이게—
민수가 무너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붙잡을 손잡이처럼 보이게.
“We’ve worked with the Consulate and
partner counsel in Korea for years.”
(자막: 저희는 영사관과 한국 쪽 협력 변호사들과
오래전부터 이런 케이스를 함께 처리해 왔습니다.)
“So if you want the fastest resolution—
this is the lane.”
(자막: 가장 빠르게 정리하고 싶으시면,
이 라인이 제일 확실합니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동의가 아니라, 숨을 쉬기 위한 반사였다.
다니엘 휴는 더 부드럽게, 더 낮게 말했다.
마치 “구해준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끝난다”는 말처럼.
“I can request a temporary hold to
prevent escalation.”
(자막: 절차가 더 커지기 전에,
임시 보류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But I need your authorization today.”
(자막: 하지만 오늘 안에 승인(동의)이 필요합니다.)
사칭자가 옆에서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딱 한 번.
민수가 도망갈 문을 찾기 전에—
문고리를 먼저 잠그는 방식으로.
“시간이 중요합니다, 김민수 씨.
이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니엘 휴는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그 작은 동작이 ‘예의’처럼 보였고,
그 예의가 민수의 공포를 더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And that authorization
starts with the retainer.”
(자막: 그리고 그 승인의 시작이
착수금(선임료)입니다.)
“Once the retainer is secured,
we can document representation and
move immediately.”
(자막: 착수금이 확인되면,
저희가 대리 선임 절차를 문서화하고
즉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민수는 화면 밖으로 시선을 한 번 떨궜다.
어딘가에 적힌 계좌번호를 읽는 눈이었다.
그 순간 선율의 손이 멈췄다.
이 영상은 “설명”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민수가 스스로 돈을 내게 만드는 절차였다.
선율은 화면 속 다니엘 휴의 표정을 다시 봤다.
침착한 눈빛, 정확한 발음, 적당한 미소.
공포를 깎아주는 얼굴이 아니라—
공포를 돈으로 바꾸는 얼굴이었다.
민수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공포 속에서 처음 얻는 ‘숨구멍’이었다.
다니엘 휴가 마지막으로 덫을 깔았다.
“To avoid any misunderstanding,
I’ll bring in our Korean legal consultant.”
(자막: 오해를 막기 위해 한국어
법률상 담원을 연결하겠습니다.)
참가자 목록에 새 이름이 뜨는 순간—
화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K-Legal Advisor.
그리고 여기서부터, 영어는 끊겼다.
“김민수사장님, 안녕하세요.
지금부터는 한국어로만 안내드리겠습니다.
중요한 내용이라 한 단어라도 잘못 이해하시면 위험합니다.”
민수는 그 문장에 더 깊게 믿어버렸을 것이다.
‘한국어로 정확히’라는 말이 ‘진짜 절차’처럼 들렸으니까.
상담원은 곧장 공포를 다시 조였다.
“김민수 사장님 명의가 한국에서
범죄와 연결돼 있는 상태라면,
가만히 계시면 피해자가 아니라
연루로 판단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서 피해자라는 걸
서류로 만들어야 합니다.”
민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저는… 뭘 하면 됩니까?”
상담원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한국 쪽은 변호사 권한이 있어야 정리가 됩니다.
변호사님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화면이 다시 분할되며 한국 변호사가 들어왔다.
말투는 정중했고, 표정은 단정했다.
정중함이 오히려 사람을 더 눌렀다.
“김민수 씨, 박 변호사입니다.
상황이 가볍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공식 위임으로
진행하셔야 합니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동의가 아니라,
이미 막힌 길 앞에서 선택지를
잃은 사람의 반응이었다.
박 변호사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진행 전에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한국 쪽 대응 문서를 준비하고,
필요한 경우 한국 내 협력 변호사
라인으로 바로 올리겠습니다.
다만 착수금은 제가 받지 않습니다.
이 건은 ‘공관 연계’로 접수되는 형태라,
미국 쪽 대리인 선임 등록이 먼저 걸려야 합니다.”
그는 화면 아래를 잠깐 내려다봤다가,
다시 카메라를 봤다.
목소리는 끝까지 “절차”였다.
“그래서 송금은 미국 담당 변호사—
Daniel Hue 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쪽 계정에 착수금이 확인되는 순간,
선임 사실이 기록되고 ‘홀드(보류)’
요청을 넣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게 제일 빠릅니다.”
상담원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받쳐줬다.
“김민수 사장님,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위임 계약서부터 진행하겠습니다.
화면에 뜨는 문서 확인하시고,
이름이랑 서명만 해주세요.”
잠깐 후, 민수 화면에 PDF가 떴다.
상단에는 굵은 글씨.
[RETENTION / AUTHORIZATION FORM]
[CASE NO.: KCG-2411-***]
상담원이 말투를 더 부드럽게 낮췄다.
부드러웠지만, 속도는 더 빨라졌다.
“사장님 지금 미국에 계시니까요.
금액은 **미화 5,000달러(원화 약 ○○백만 원)**
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큽니다.
서명 확인되면, 바로 송금 안내 드릴게요.
시간 지체되면 출입국 제한이나 절차가
**‘진행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서요.”
박 변호사가 한마디를 더 얹었다.
“네. 지금 단계에선 ‘대리인 선임’
이 먼저 걸려야 합니다.
오늘 안에 착수금이 들어가면,
내일 아침부터는 저희가 문서로
대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민수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서명칸 위에서 커서가 잠깐 멈췄다.
상담원이 그 멈춤을 놓치지 않았다.
“사장님, 송금하실 때 **메모(Reference)에
케이스 번호만 그대로 적어주세요.
KCG-2411-*. 그게 있어야 휴 변호사님 쪽에서
‘같은 건’으로 바로 묶어서 처리합니다.”
그다음 화면에 새 창이 떴다.
송금 안내.
“김민수 사장님, 지금이 중요합니다.
시간 놓치면 출입국 제한이나 절차가
‘진행’으로 넘어가버릴 수 있어요.
여기서 정리하셔야 합니다.”
민수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서명칸 위에서 커서가 잠깐 멈췄다.
그다음 화면에 새 창이 떴다.
송금 안내.
Wire Instructions (US)
Account Name: Hue Legal / Client Trust
Routing / SWIFT: ********
Reference: CASE NO. KCG-2411-* (Minsoo Kim)**
민수는 숨을 삼켰다.
‘트러스트’라는 단어가, 이상하게도 안심처럼 보였다.
상담원은 마지막으로 못 박았다.
“사장님, 지금은 정리할 수 있는 타이밍이에요.
오늘만 넘기면 ‘절차가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끝내셔야 합니다.”
선율은 RETAINER_AGREEMENT.pdf를 열었다.
로고, 주소, 비용표, 서명란, 계좌 입력란.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요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화면 하단.
작은 글씨로 **비용 안내(요금표)**가 붙어 있었다.
[수임료 안내 / 시간당 과금 기준]
1) 착수금(리테이너): 미화 5,000달러
사건 접수 및 ‘긴급 보류(홀드) 요청’ 진행을 위한 최소 시작 금액
이후 발생하는 비용은 착수금에서 차감
2) 시간당 비용(15분 단위로 계산)
총괄 담당 변호사: 시간당 650달러
담당 변호사(어소시에이트): 시간당 495달러
보조인/패러리걸: 시간당 225달러
상담원(케이스 코디네이터) 통화: 시간당 125달러 (연결 시점부터 과금)
통역/번역 지원(한·영): 시간당 180달러
3) 기타 처리 비용(별도 청구)
사건 접수/파일 생성: 350달러(1회)
문서 작성/서류 처리: 120달러(건당)
해외송금 처리 수수료: 75달러(건당)
당일 긴급 처리(요청 시): 280달러
4) 착수금 유지 규정
착수금 잔액이 2,500달러 이하로 내려가면,
진행을 위해 **추가 입금(보충)**이 필요
비용은 결과가 아니라 업무 시간/절차 진행에 대한 청구임
※ 과금 단위 안내
모든 상담/통화/회의는 **15분 단위(0.25시간)**로 계산됩니다.
15분 미만 통화도 15분으로 산정됩니다.
상담원이 연결되는 순간부터 대기 시간 포함으로 과금될 수 있습니다.
통역이 포함되는 경우, 통역 비용은 별도로 추가됩니다.
그리고 맨 아래—사람들이 가장 안 읽는 곳에,
영어 문장이 박혀 있었다.
“The Firm assumes no liability regardless of outcome.”
(자막: 결과와 무관하게 본 로펌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선율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이건 실수가 아니었다.
“절차”가 끝나는 순간, 반드시
남겨야 하는 면책의 도장이었다.
그는 마지막 파일을 열었다.
PAYMENT_INSTRUCTIONS.png.
은행 정보와 수취인, 송금 방법.
그리고 메모칸에 적힌 짧은 코드 하나.
CASE: BLUE CORAL
선율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민수가 잘한 건 녹음이었다.
하지만 민수가 당한 건—
녹음으로도 다 막을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다음: 14장-3부 에서…
— 오늘의 팁 —
은행·세무서·수사기관이라며 전화가 와도, 그 자리에서 결제/이체/인증번호를 요구하면 진행하지 마세요.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고, 공식 홈페이지에 나온 대표번호로 직접 다시 전화해 확인하세요. 상대가 끊지 못하게 압박하거나 급하게 몰아붙이면, 그럴수록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본 작품 **『너를 품에 안으면』**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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