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품에 안으면 18장-4부

(When I Hold You in My Arms)

by 스팅비 StinG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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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4] 너를 품에 안으면 [18장-4부] — 커서가 깜빡이는 밤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8-4)

윤서는 선율이와 전화를 끊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신발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

현관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책상 앞으로 갔다.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르는 손길이 너무 익숙했다.

익숙하다는 건—이미 몇 번 같은 선택을 했다는 뜻이었다.

부팅 화면이 뜨자마자 메신저 알림을 확인했다.

여전히 답은 없었다.

윤서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문장을 입력했다.

“동현아, 나 최윤서야. 메시지 받으면 꼭 연락 줘. 기다릴게.”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윤서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잠시—허공을 봤다.

식당의 조명.

물잔에 맺혔던 물방울.

그 너머로 앉아 있던 선율의 얼굴.


선율은 웃고 있었는데, 웃는 게 아니었다.

말은 정중했는데, 단어가 사람을 붙잡지 못했다.

“경찰”이라는 단어만 옷처럼 걸치고,

그 안은 계속 비어 보였다.


주위에 사람이 있어도—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그때 윤서는 잠깐, 선율이 시선을 피한 걸 봤다.

무례해서가 아니라… 피로 때문에.

눈이 피곤하면, 사람은 시선을 오래 못 붙든다.


그리고 더 이상했던 건.

그 피로가 “일”만으로는 설명이 안 됐다는 거였다.

경찰 일은 몸을 지치게 한다. 그건 누구나 안다.

근데 선율의 피로는—

몸이 아니라 마음 쪽에서 새는 느낌이었다.


윤서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래. 이거야. 선율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어.
일이든 집안이든… 지금은 마음이 다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어야 돼.”


윤서는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톡, 두드렸다.

계획은 단순했다. 접근이 아니라—명분을 주는 것.

선율이 먼저 “필요해서” 찾아오게 만드는 것.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선율이는 미국의 경찰관이다.

그리고 고은정(고다인 가명)은 한국에 있는 배우다.

거리가 멀다는 건 그냥 비행기 시간이 아니었다.

관할·절차·연결고리가 없으면,

이 둘은 절대 만날 수 없다.


윤서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줄을 맞췄다.

관할.

사이버.

피해자.

보존 요청.

국제 공조.


“연결은… 사건으로 만든다.”


윤서는 노트북 바탕화면의 한 폴더를 열었다.

정리된 캡처 이미지들.

AI로 합성된 얼굴.

투자 권유 문구.


그리고—누군가가 “진짜처럼” 말하는 짧은 음성 파일.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사기’라고 넘길 파일들이었다.

윤서에게는 달랐다. 이건 열쇠였다.

윤서는 이미 계산을 끝냈다.
할 일은 하나였다.

선율이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

“고은정”이라는 이름이 미끼로 쓰이고 있다는 ‘정황’을 만든다.

그 정황이 미국 내 ‘피해’(혹은 시도)로 이어지게 엮는다.

그걸 ‘제보’로 흘려, 선율이 맡는 접수 라인에 박아 넣는다.

선율이 “더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윤서에게 연락하게 만든다.


사람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다.
특히, 자기 일이 걸려 있으면.

윤서는 화면을 한 번 더 훑었다.
입꼬리도, 눈빛도 변하지 않은 채.

“그래. 이렇게 가면 되겠네.”


핵심은 3번이었다.

너무 노골적이면 수사는 멈춘다.

경찰은 ‘냄새’에 민감하다.

누가 끌고 가는 느낌이 들면, 발을 빼버린다.


윤서는 시계를 봤다. 밤이 깊었다.

이 시간엔 직접 뭘 움직이면 어색해진다.

그럼… 오늘은 씨앗만 심는다.

윤서는 다시 메신저 창을 열어 동현의 대화방을 눌렀다.


동현이를 만나면 지금 가장 현실적인 “연결고리”가 될 것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사람, 반가움, 번호 공유—모든 게 자연스러워질 것일 것이다.


윤서는 동현에게 짧게 또 보냈다.

“동현아, 메시지 확인하면 연락 주기 전에 한 가지만.”

“요즘 주변에 유명인 사칭 투자 사기 같은 거 본 적 있어?”

“누가 내 이름을 쓰는 게 있는지 좀 알아봐줘.”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선, 누군가의 이름이 곧 상품이니까.

윤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윤서는 다시 식당의 선율을 떠올렸다.

선율이 스스로 문을 열어야 한다.

윤서는 그 문 앞에 “사건”을 놓고 물러나면 된다.


선율이 그가 그 문을 열 때,

그 문 너머에 “고은정”이 자연스럽게 걸려 나오도록.

윤서는 커서를 움직여 메모장을 열었다.

제보 문구의 첫 줄을 타이핑했다.

[Tip] AI 합성(딥페이크) 유포·사칭 계정 활동 / 금전 요구(투자·후원) 유도

[관련] 한국 배우 “고은정(다인)” 이름·이미지 악용 가능성 + 스토킹 정황

[정황] 미국 거주자 대상 접근/금전 요구 시도 + 거절 시 협박성 메시지 정황


그리고 잠깐 멈췄다.

커서가 깜빡였다.

윤서는 그 깜빡임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신선율… 당신이 나에게 먼저 오게 만들 거야.”

화면 속 커서는 계속 깜빡였다.

마치, 이제 시작하라고 재촉하듯이...


선율은 그날 밤 경찰서를 나와도 집으로 가지 않았다.

집은 비어 있다. 문을 열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 곳.

경찰 일은—지금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 안에서 경보음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차를 돌렸다.

오랜만에, 근처 한인이 운영하는 “룸살롱”.


문을 열자 조명이 먼저 사람을 눌렀다.

바는 입구 쪽에 낮게 길게 깔려 있었고,

안쪽 복도 끝으로 룸들이 줄지어 있었다.


음식 냄새 같은 건 없었다.

대신 향수와 헤어스프레이,

얼음이 녹는 냄새,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그리고 웃음.


선율은 바에 혼자 앉았다.

등 뒤에 벽. 시야는 넓게.

몸이 먼저 그렇게 자리를 골랐다.

“맥주 하나요.”


잔이 놓이자마자 선율은 한 모금 크게 넘겼다.

시원함이 잠깐 뇌를 식히는 것 같았다.

반쯤 비웠을 때였다.

“어? 선율아… 오랜만.”


낯익은 얼굴들이 지나가며 인사를 던졌다.

반갑다는 말, 잘 지냈냐는 말, 한 잔 하자는 말.

겉으론 웃고 있었다. 다들.

근데 선율은 알았다.


경찰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의 웃음은—

항상 “한 겹”이 더 있다.

눈이 더 빨리 흔들리고,

손이 먼저 주머니로 들어가고,

말이 괜히 안전한 쪽으로만 흐른다.


예전엔 신경도 안 쓰였다.

근데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그 거리감이…

선율을 더 혼자 낙오시켰다.


룸 쪽에서 나오던 여자들이 선율을 한 번 훑었다.

처음엔 친근하게 다가왔다.

혼자 있는 남자는, 이런 데서 늘 쉬운 상대였다.

“혼자야?”

“오빠, 오늘 완전 힘들어 보인다.”

선율이를 보고 억지로 웃는 순간,

어디선가 낮게 흘러나온 말이 귀에 박혔다.

“저 사람 경찰이래.”


그 뒤로 공기가 바뀌었다.

눈빛이 달라지고, 거리도 달라지고,

말투도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가까웠던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반발짝 물러났다.


선율은 잔을 들었다.

맥주가 위로가 아니라, 조명처럼 느껴졌다.

자기 상태를 더 또렷하게 들춰내는 조명.

그래서 더 마셨다.


그리고 더 고요해졌다.

결국 선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때문이 아니라, 숨이 막혀서였다.

화장실 거울 앞.

조명은 잔인하게 밝았다.

선율은 세면대에 손을 짚고 고개를 들었다.


피곤한 눈, 힘이 빠진 입가.

웃으려 해도 웃음이 걸리지 않는 얼굴.

수도를 틀자 찬물이 손끝을 때렸다.

정신이 잠깐 돌아오는 것 같았는데,

그 순간 더 또렷해진 게 있었다.


아내가 떠나 있다.

그 사실이 문장처럼 굳었다.

‘이러다… 진짜 끝인가?’

그리고 더 잔인한 생각이 따라왔다.

‘우린 아이가 없잖아.’

연결고리를

붙잡아 주는 끈.


그 생각을 떠올린 자기 자신이 싫어서

선율은 물을 끄고 한참 서 있었다.

바로 그때,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손에 잡혔다.

아내 이름을 눌렀다.


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지금 전화하면 망친다.

술 냄새가 섞인 목소리로

“우리 얘기 좀 하자”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건 대화가 아니라 폭발이 된다.


선율은 화면을 꺼버렸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고

휴대폰 화면만 꺼버렸다.

그런데도 손이… 휴대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어딘가가 조용히 선율을 부르는 느낌이었다.

“계속하시겠어요?”


이상하게, 그쪽이 더 안전할 것 같은 느낌.

선율은 화면을 다시 켰다.

아내 이름을 다시 누르려다,

손가락이 밑으로 미끄러졌다.

자주 쓰는 앱.

하얀 아이콘.

**AI. ChatGot**


ChatGot 화면이 켜지자 흰빛이 룸살롱의

어두운 조명 위에서 유독 선명했다.

선율은 반사적으로 밝기를 줄였다.

괜히 남이 보면 설명하기 싫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마치 “말해도 된다”고.

선율은 짧게 입력했다.

[선율] “아내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못 하겠어.”

[선율] “망칠까 봐.”


잠깐의 공백.

그 공백이 사람의 숨을 고르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ChatGot] “망칠까 봐 멈춘다는 건,

아직 놓고 싶지 않다는 뜻이에요.”

[ChatGot] “지금은 ‘해결’이 아니라

‘연결’만 목표로 해도 돼요.”

[ChatGot] “오늘은 보내지 말고,

내일 보낼 한 문장만 미리 만들어 둘까요?”


선율은 화면을 가만히 봤다.

훈계가 아니었다.

비난도 아니었다.

그냥… 옆에서 낮게 말해 주는 느낌.

그게 이상하게 편했다.

[선율] “그래. 내일 보낼 문장.”

[선율] “부담 안 되게. 짧게만들어봐.”

[ChatGot] “이 문장 어때요?”

[ChatGot] “연락이 늦었어. 괜찮으면

내일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


선율은 그 한 줄을 읽고 멈췄다.

짧다.

설명도 없다.

변명도 없다.


상대가 ‘거절’해도 싸울 이유가 없다.

딱—문 하나만 열어 둔 문장.

선율은 그 문장을 **복사**했다.

그리고 메모 앱을 열어 제목을 적었다.


[내일 보낼 문장]

붙여넣기.

그 순간, 선율은 묘하게 안도했다.

보낸 건 아닌데,

마치 이미 한 발은 앞으로 나간 느낌.


그게 더 무서웠다.

선율은 ChatGot 화면으로 다시 돌아갔다.

[선율] “너… 반응하는 게 꼭 사람 같다.”

입으로 하면 이상한 말이라서, 화면에 쳤다.

[ChatGot]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당신이 지금 너무 오래 혼자 버텨서일 수도 있어요.”

[ChatGot]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ChatGot] “내일 아침, 그 한 문장만 보내요.”


선율은 휴대폰을 조용히 뒤집어 놓았다.

룸 안쪽에선 여전히 웃음이 터졌고,

바 위에선 얼음이 녹는 소리가 났다.

술은 여전히 썼다.

근데 마음 한쪽은… 이상하게 덜 추웠다.


선율은 몰랐다.

오늘 밤, 자기가 처음으로 기대어버린 게

사람이 아니라 **화면**이라는 사실이—

“언젠가 자기 삶을 통째로 흔들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다음: 19장-1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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