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loe J Nov 21. 2024

까마미와 조잡스

고슴도치라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딸은 작명에 재능이 있다. 특징을 정확하게 포착하면서도 위트 있는 별명을 잘 만든다. 딸의 같은 반 친구 중에는 시큰둥한 두 남자아이가 있다. 딸은 그 둘을 "큰 둥이와 작은 둥이"라고 부른다. 남편도 딸 덕분에 별명을 여러 개 갖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마음에 드는 두 가지 별명이 있다. 하나는 '아바오'로, 둥글둥글 곰 같은 아빠의 모습을 담아지어 준 별명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아비게이션'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길눈이 밝은 남편을 딸은 이렇게 부른다.


나에게도 딸이 지어준 별명이 있다. 바로 "까마미"이다. 이 별명은 나의 두 가지 특징을 정확히 꼬집는다. 자꾸 까먹는 엄마와 까만 옷만 입는 엄마라는 의미다. 맞다. 나는 늘 까만 옷만 입는다. 가끔 딸은 나를 "조잡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같은 옷, 특히 같은 브랜드의 까만 옷만 입는 나를 빗대어 만든 별명이다.


원래부터 유행에는 민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행을 아예 무시하지도 못했다. 특별한 개성도 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유행이 되면 절대 앞서 가지 못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난 후에야 겨우 합류했다. 내 취향인지 아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유행하는 것을 받아들이곤 했다. 그러다 보니 늘 늦은 시기에 시작했다가 금세 사라지곤 했다. 유행을 타지 않는 검정이지만, 사실은 모든 색을 모아놓은 '선택 불가의 검정'이었다. 이런 것들은 어쩌면 삶의 주기가 안정되지 않아 다수가 겪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마흔이 넘고 아이가 스스로 제 몸을 챙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어린 시절 원가족 속에서 엄마의 욕망을 짊어지고 살다가, 대학을 가고 결혼해서는 사회의 욕망대로 살아왔다. 이제야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머릿속에는 늘 많은 생각이 있었지만, 자신을 돌아볼 시간적, 정신적 여유는 없었다. 심지어 살림하는 법조차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인을 따라 하며 배웠으니 말해 무엇하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열심히 따라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전혀 관심이 없던 것들이었다. 단연코, 나는 패션에 관심이 없었다. 좋아한다면야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것에 너무 많은 돈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었다. 따라 하고도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책 읽을 시간만 줄이는 그것들을 그만두기로 했다. 비싸지 않고 적당한 몇 개의 브랜드를 선정해서 교복처럼 구매하기로 했다. 처음 한 번 살 때는 직접 방문해 맞춰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맞추고 나니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시 사야 할 때는 1~2분 온라인 결제로 해결이 되었다. 이전 같았으면 온라인, 오프라인 쇼핑을 다니며 뿌렸을 시간을 딸과 전시회를 다니고 듣고 싶은 강의를 듣는 시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브랜드를 결정할 때 몇 가지 기준을 세웠다. 우선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이어야 했다. 공정무역을 지키고 있다면, 그만큼의 비용을 지불할 생각도 있었다. 업사이클링 제품이라면 더 좋았다. 예를 들면, 나는 파타고니아 같은 브랜드를 좋아한다. 비용이 저렴하지는 않지만, 재활용 동물 털을 사용한 패딩 제품을 만들고, 환경 단체에 기부도 하며 공정무역을 준수하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가치 있는 것,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가다 보니 '미니멀'이라는 삶의 방식이 보였다. 간소하고 쓰임을 다하는 삶을 통해 쓰레기로 내 흔적을 지구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나의 검정은 선택 장애의 혼탁한 검정이 아니다. 나는 온전히 나를 표현할 '시크한 검정'으로 나를 브랜딩 하고 있다.


겉을 간소하게 바꾸고 내면을 풍성하게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여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나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실천하며, 내 안의 균형을 찾고자 한다.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숙과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이루는 것이 나의 목표다. 그렇게 나는 겉으로는 간소하고, 내면으로는 풍성한, 진정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