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당히 자극적인 내용과 사진으로 시선과 생각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은 타인의 고통이라는 제목처럼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 잠자기 전까지 우리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 파묻힐 지경이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에서 뭔가를 하려고만 하면 팝업으로 창이 뜨기도 하고 채팅방 불특정 다수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접한다. 때로 텍스트를 받긴 하지만 받았으나 본적 없이 흘려지는 문자처럼 읽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눈에 띄기 위해 이미지가 이용된다. 하지만 정보와 이미지가 넘칠수록 우리의 주의를 끌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이미지와 영상은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변해갔다.
연출
사진은 실제세계를 담는다. 죽음의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히 죽어가는 고통을 느낄 수 있게 기록해 버린다. 하지만 사진이란 무언가를 골라내 구도를 잡는 자체로 실제세계가 아니라 연출이다. 하물며 과거 전쟁사진에는 시체를 옮기고 총을 가져다 놓고, 사람의 뼈를 널어놓는 등의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든 연출을 서슴없이 했다. 적을 끝까지 추격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한 사진 한 장을 위해서 전쟁으로 죽은 시신까지 옮겨 구도를 잡고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유명해진 사진은 작가의 이름을 널리 퍼트렸고 역사적 증거 사진으로 남겨졌다. 과거를 다시 불러올 수 없기에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전쟁 같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 필요에 따라 이미지는 이용된다.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역사적 사건이라도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여론이 되지 못하고 사진 찍히지 못한 과거는 그 잔인함과 사람들의 고통, 고통을 담은 사진보다 심각한 현실이 퇴색되어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도 잡아두지 못한다. 반면 문제가 된 주목받은 사진도 여론에 의해 승리와 패배 혹은 비애감이나 영웅주의로 의미가 귀결된다. 누군가의 고통이 이미지를 통해 생각하게 될 대상에서 소비된 사진으로 밀려나버린다.
소비
한 바닥 빽빽한 서사를 담은 글보다 한 장의 사진이 짧은 시간 이해하기 쉽다는 이유로 텍스트보다 영상과 이미지 정보가 어쩌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다못해 블로그 글을 쓸 때도 사진 한 장 없는 글은 요새 잘 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 그렇게 눈만돌리면 존재하는 이미지 정보를 대하는 우리는 잘 받아들이고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사진을 통해서 접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누군가의 고통이 우선 내 고통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내 삶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전제를 하고 이미지를 접한다. 어떤 이는 현실과 상관없는 누군가의 고통이 싫증 나고 넌더리 난다는 생각을 한다. 무감각해지고 냉소적으로 그것을 보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다음장면으로 넘겨버린다. 또 다른 누군가는 타인의 상처에 연민을 느낀다. 연민 또한 감정을 타자 화하기 때문에 결국 눈길을 돌려버린다. 모두 방관자,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바로 이런 게 관음증적 향락이다. 사람은 타인의 나체를 보고 싶어 하는 관음적 성향만큼이나 고통받는 육체를 보고 싶어 하는 관음증을 갖고 있다. 타인의 고통받는 육체를 보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있는 곳은 안전한 곳이라 무관심하게 사진 속 고통을 즐기곤 한다.
고통에 있어서 사람은 양극단에 있는 듯하다. 냉소적으로 무감각하게 바라보거나 그 고통 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지금도 견디는 중이거나...
윤리
나아가 이미지를 대하는 우리의 윤리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카메라를 들고 고통의 현장을 찍는 작가들의 목적은 현실감 있는 사진 한 장이다. 목숨을 걸고 전쟁의 현장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폭탄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폭탄이 떨어져 생생하게 죽어가는 몸을 찍기 위해서, 의식을 잃어가는 육체를 사진에 박제하기 위해서... 죽어가는 인간에 대한 상품화. 방관자를 넘어 총을 들고 공격하는 적보다 나아 보이지 않는다.
전에 소녀와 독수리라는 충격적인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아프리카 수단 기근으로 죽어가는 웅크린 작은 생명 곁에 여차하면 기회를 엿보는 독수리가 앉아있다. 이 사진을 찍은 퓰리처상 수상작 가는(몇 달 뒤 자살한..) 이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보자마자 달려가 구조의 손길을 주지 않고 구도를 잡고 독수리가 가장 사진에 어울리게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좋은 사진을 찍어서 내전과 기근을 알리려는 대의에서 비롯된 작업일까? 좋은 작품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작가가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곳의 사진작가는 그곳 사람들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를 찍어야 한다는 주문이 있었다고 들었다. 작가의 양심은 작가에게 맡겨두고 이런 이미지를 보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와, 대박..'하고 장면을 넘겨버린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냉소적인 구경꾼이자 방관자가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과제
이 책에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과제는 명확하게 2개다. 그들의 고통을 우리와의 연결을 생각하며 자각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연민을 멈추고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며 원인이 되는, 고칠 수 있는 현실을 행동으로 고쳐나가라 말하고 있었다.
우선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서 무관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사진의 한 장면이 아니라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며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상상력을 통해 공감해 보아야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메시지로 접해보는 것은 기억을 퇴색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외면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비극임을 직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가 모든 상황을 다 겪어볼 수 없다면 상상력만으로 구체적이지 않은 문제를 문학을 통해서 느껴보는 게 어떨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봤다.
다음으로 연민을 그만두는 것이다. 우선 그전에 연민과 동정 공감의 차이에 대해 한번 살펴본다.
연민 :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것, 타자화
동정 :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기거나 그렇게 여기며 도움을 베푸는 것, 타자화
공감 :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등에 대해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 자기화
연민과 공감의 차이 : 연민은 내가 타인의 상황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있는 반면 공감은 자기화하여 나라면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민과 동정의 차이 : 둘 다 가엾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동정은 우월감과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는 것이다.
공감과 동정의 차이 : 연민과 같이 동정은 고통을 타자의 것으로 간주한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지만 나의 일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상황에 놓인 그들의 고통이라고 생가하기 때문에 쉽게 퇴색되어 버린다. 고통은 하나하나 각기 다른 원인으로 발생하지만 연민에서 시작된 안타까움은 그 원인에 대한 문제를 추상적으로 뭉뚱그려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연민을 멈추고 그들의 서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오늘 컴퓨터를 켜고 루틴의 일을 시작하려다가 세이프 더칠드런 광고를 보게 되었다. 12살 내 딸과 같은 나이의 한 여자아이가 항암치료 중인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생활보조금으로 생활을 하고 엄마가 항암치료를 할 때면 혼자 컵라면으로 몇 주씩 혼자 버텼으리라. 마음이 아팠다. 사실 이런류의 광고를 어지간하면 클릭하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은 너무 많고 내가 도와주는 것은 아주 소소할 뿐 아니라 한 명에게도 풍족함을 안겨줄 수 없을 만큼이라는 불편한 생각 때문에 외면하게 된 듯했다. 오늘 이미지는 내게 좀 강렬했다. 그랬던 이유는 12살 소녀라는 나와 어딘가 겹쳐져 있는 부분 때문이었다. 그 부분이 없었다면 내가 공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공감을 느낀 부분에서만 미미하지만 뭔가 행동을 취하는 나. 이게 맞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생각이 또 나락으로 떨어지려 한다. 이렇게 되면 또 이런 광고에서 눈을 돌리게 될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비록 딸과 같은 나이라서 생긴 안타까움과 그 여린 나이에 세상에 보호막 없이 서있게 했다는 미안함에서 건넨 작은 배려였다. 그냥 당장 저 아이를 생각하기로 했다. 저 아이에게 한 달에 두 번 도시락을 줄 수 있게 되어 기뻐하기로 했다. 다른 누군가가 저 아이의 28일을 채워주리라 믿어본다. 그리고 세상 다른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와의 마음의 한 자락 공감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좀 더 좋은 세상을 꿈꿔본다. 나눠서 더 풍요로워지는 마음이 퍼지길 바래본다.
12살 소녀가 가장 사람들이 많이 보는 검색엔진에 얼굴과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고도 도움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