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에 적힌 현대판 '타인의 고통'이란 문구가 눈길을 잡아 손에 들게 된 책이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소비한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서 자극적인 이미지와 텍스트가 흩뿌려져있다. 큰 의도 없이 뒤적뒤적 SNS를 방황하다 우연히 클릭하게 된 자극을 통해만나는 소식이 우리가 뉴스를 접하는 방식이 되어버렸다. 새해 목표로 종이신문을 잘 읽어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보지만 이번에도 의무 기간이 끝나고 해지해 버리는 자율적 정보습득의 의지처럼 어딜 가나 흩어진 소식이 의도적 정보와의 접선을 방해한다. 이제는 정말 글쓰기를 공부하기 위해 칼럼이라도 뜯어볼 강한 의지가 아니고는 신문 펼치기가 쉽지 않다.
온라인상에서 무작위로 만나는 정보는 경향이 생긴다. 아무래도 시선을 잡아챌 목적으로 자주 검색하는 좋아하는 걸 보여주거나 자극적인 사진을 보여주는 게 가장 쉬워졌다. 늘 그렇게 노출되다 보니 전 같았으면 함께 아픔을 느꼈을 만한 누군가의 고통이 흔해 보인다. 이 세상에 당연한 고통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남의 고통을 알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고통에서 수잔 손택은 연민을 멈추라고 말한다. 동정은 내 시선이 타인의 고통 위에 있다. 내려다보며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다. 연민은 내려다보지는 않지만 나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서 온다. 그래서 빨리 지워져버린다. 우리는 그들을 나도 겪을 수 있는 아픔으로 공감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이 언제 나왔나 살펴봤더니 적어도 우리나라 발간은 2007년이라고 나와있었다. 이후 십수 년 동안 우리는 어떤 변화를 겼었나? 역사 속에서는 짧은 십수 년이 기술의 발달은 과거 몇십 년을 한꺼번에 달린 듯 변화했다. 바로 스마트폰, 온라인 정보의 폭발이라는 기술은 분명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 지점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새로운 고통
정보의 생산자는 누구인가? 기자는 취재를 하고 정보를 수집해 뉴스를 생산한다. 각 언론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정보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언론사라는 큰 책임의 족쇄를 차고 늘 '적정'을 고민하며 정보를 뿌린다. 원래는 그들이 정보의 생산자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단지 정보의 이용자인가? 한때 우리는 생산자가 주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다. 하지만 요즘은 SNS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정보 생산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그렇기에 정보의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일어나는 책임도 함께 가져야 한다. 바로 그런 책임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었던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카메라로 조준한다. 그 장면을 방아쇠를 당겨 박제해버린다. 그리고 전시한다. 우리 모두가 자체 하는 고통의 중개인의 역할에 정당성에 대해서 저자는 말한다.
"남의 고통을 궁금해하고 알아내는 일은 도움을 주고 해결해 주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아니면 정당화할 수 없다."
때로 정당화 되지 못한 장면을 만나기도 한다. 마치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핫한? 사건의 자극적인 이미지를 이용하는, 책무를 저버린 중개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책에서 나왔던 첫 번째 사건, 10.29 이태원 참사가 대표적 예가 아닐까 싶다. 참사 속 수많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참담함의 눈물을 삼킬 때 같은 장소, 보다 안전한 위치에서 있었던 누군가는 그들의 의식이 사라져가는 장면을 휴대폰에 담았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는 상황에 차가운 렌즈의 시선 너머를 관찰하고 담아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자나 사진을 남겨야 하는 직업적인 책임이 있어도 벗어나기 힘들던 윤리, 생명이 흔들리던 그때 그들을 겨눠야 했던 이유는 단지 이 비참한 상황을 남기고 알려 앞으로 이런 일을 없게 하기 위해서였을까? 저자는 그들의 정당성을 설명해 보려 하지만 흡사 지옥과도 같던 그곳에서 영상과 이미지를 남긴다는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심폐소생술하는 모습을 찍은 바로 그 영상이 우리의 현재 의식을 말해주는 것 같아 서글프다. 처음에는 그들이 미웠다. 하지만 그들에게 갈 원망은 그들의 것이 아님을 안다. 애초에 그 절규는 사회의 몫이었다.
그래도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용해 공감을 받는 일, 누군가의 고통을 관람하는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단지 이용만한 사람이라도 행동하지 않고는 못버틴다. 공감을 누르고 토론을 하며 이야기를 퍼나르고 챌린지를 하고 기부를 한다. 이런 고통의 전시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더라도 전달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갖고 행동해야한다.
공감한다는 착각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만나고 공감을 누르고 나름의 행동도 하면서 산다. 그래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고통만, 내가 경험한 고통, 나로 대체해 볼 수 있는 고통에 겨우 공감한다. 내 영역 밖의 고통은 알지 못한다. 날씨란 모두에게 공평해 보였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수해가 난 지역에 다시 물난리가 나는 것은 과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계절상품처럼 정치인의 포토월이 되는 재해 현장은 왜 반복될까? 산업재해의 흔함은 산업을 이끌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희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너무 흔해버려서 익숙해져 버린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있을 수 없는 고통이 있을 수 있는 문화가 되어버렸다. 나의 고통과 닿아있지 않아 미디어를 통해 보고는 있지만 나도 모르게 '또 사고가 났구나!' 정도로 흘려버렸다. 소비했다. 이건 연민에도 속하지 못했다. 연민은 적어도 관심과 마음이 담겨있다. 그들의 고통과 절규의 이미지도 그저 내 주의를 스쳐 지나갔다. 너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또한 당장 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책을 읽을 때도, 다른 정보를 접할 때도 관심이 있는 정보에 더 오래 머무르고, 생각도 많아지고, 기록도 많아진다. 이 책을 읽을 때도 나의 관심은 치우쳐있었다. 지역 이야기, 외국 이야기, 소수자의 문제에 있어서의 그들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나는 관람객이었다. 단지 구경이었다. 관심과 흥미가 있나 살펴만 보는 정도였다. 비슷한 분량으로 나눠 이야기되고 있었지만 그저 내게 수많은 고통의 이야기 중 하나의 종류일 뿐이었다. 젠더 문제를 만나기 전까지... 그렇다는 건 나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중요한 문제가 누군가에게는 흔한 고통, 일종의 우리의 문제가 아닌 문화로 느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책에서 저자는 공감을 느끼는 장벽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인종, 언어, 젠더, 계급의 구분. 이 장벽은 넘어서기 힘들다. 상상조차도 잘 안되기 때문이다. 이 장벽을 넘어서더라도 다음 장벽을 만난다. 사회적 역할, 개인의 관심에 따라 공감의 장벽은 달라진다. 우리는 그들 모두와 함께 살고 있다. 문제는 단지 문제여야 한다.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할 숙제다.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다.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 수도 있고 진행하다가도 시행착오로 처음으로 뒤엎어져버릴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문화가 되면 안 된다. 개선해야 할 "문제"라는 인식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경을 넘어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젠더 갈등으로 '이대남, 이대녀'라는 단어가 언급되었다. 이십 대 일반 남성 - 이대남, 이십 대 일반 여성 - 이대녀. 젠더 혐오로 사회가 뜨거웠던 때가 기억났다. 묻지 마 공격으로 여성이 사망한 사건에 서로를 향한 혐오가 사회문제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젠더 갈등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자체로 남녀의 평등이 구현되는 사회는 아니라고 말해준다. 아무리 좋아져도 완전히 평등하지 않은 상태는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를 반증한다. 어딘가 참고 견디는 삶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서로의 혐오가 문제가 된 지금은 각자의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느 교사의 무차별적 죽음에 "여자 혼자 그 시간에 왜...?"라고 묻는 건 구분 지은 혐오로 인한 공격이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각자의 입장이 있다. 나는 엄마이고, 직장맘이고, 여성이고, 서울 지역민이고, 전세자이고, 학부모이다. 각자가 자신이 처한 곳만 관심을 가지기 쉽다. 우리의 일상은 늘 바쁘고 문제는 언제나 가까이, 늘 발생하고 있어 우리의 이타성이나 타인에 대한 관심의 발아를 막는다.
각계 각층에서 일어난 공감이 힘든 고통의 사건들에도 원인이 되는 실체가 있다. 노동자 문제를 문화로 만든 사회, 젠더 문제 뒤에 숨어있는 이십 대의 삶을 힘들게 만든 사회. 1부, 새로 생긴 고통도, 2부, 공감하지 못하는 고통도 사회문제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 위에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을 넘겨버리거나 고통에 공감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쏟아지는 정보와 내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사회가 타인의 고통을 무감각하게 소비해버리는 우리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감각을 촉수를 날카롭게 사회를 향해 세우는 것이다.
뒷이야기를 쓰기 위해서(저널리즘)
3부는 기자인 저자의 직업과 관련된 타인의 고통에대한 생산, 유통자로서의 고민을 담았다. 보통의 우리는 기자라는 직업을 갖거나 매일 뉴스거리를 찾아다니지는 않지만 알게 모르게 조금씩 정보를 생산, 유통한다. 적어도 소비한다. 저자는 수전 손택의 연민만 하는 삶의 부정을 다르게 본다. 수전 손택, 그녀의 타인의 고통은 조심스럽다. 훨씬 조심스럽게 전하고, 읽고, 공감해야 한다. 반면 저자는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주는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방법을 권한다. 연민이라도 하라는 말이다. 연민은 사람들이 고통의 이미지와 관계 맺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이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관심을 잡아끌고 연민을 일으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감정을 전염시켜야 한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고통의 공유, 슬프고 아픈 기억의 나눔이 필요하고 그걸 통해 타인의 애도가 나의 애도가 되고 변화의 힘을 가진다. 좋아요 와 리트윗이 나쁘기만 한가? 그렇지 않다. 정보가 수도 없이 쏟아질 때 사안을 크게, 좀 더 집중되게, 사회적인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이야기라도 해볼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이것들이다. 몇백 명만 알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sns를 타고 수십만 명의 호응을 받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의 처벌이라는 정치적인 해결점까지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구경하던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건 결국 이미지를 통한 연민이었다. 연민을 잊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단지 소비하지 않길. 그들에게서 받은 기억을 통한 감정으로 결국 예상하지 못했던 더 바람직한 '화학작용'이 일어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