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무계획의 여행을 추구하는 100% J형(계획형)인 나는 꼭 이때쯤 되면 진짜 준비를 하지 않고 되는지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 늦었고... 마이웨이 준비를 고수하는 수밖에... 여행준비 중의 하나로 딸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공부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을 갈 예정이라 과거 신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소정이는 어릴 때부터 20번도 넘게 본 그리스 로마 전집 만화로 시작해 '나만의 도슨트 오르세 미술관', '나만의 도슨트 루브르 박물관'책을 읽었다. 이 공부의 마지막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그리스 로마 전시를 보기로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료전시만 관람한 적이 있어서 처음 가보는 상시전시관이었다. 프랑스에 가면 루브르를 가는 것처럼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오면 이곳을 추천하나? 싶을 만큼 외국인이 많았다. 영국에는 미술전시가 공짜라서 그곳에 유학 간 학생들은 하루에 그림을 하나씩 본다고 들은 적이 있어서 부러워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에게도 그런 곳이 여기 있구나! 싶은 마음에 자랑스럽고 뿌듯함이 느껴졌다. 무료임에도 내부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외관의 조성과 내부 쉴 수 있는 공간까지 잘 갖춰져 있었다. 이런 데를 모르고 계속 유료전시만 다녔는데...
이번 루브르 박물관을 계획하면서 그곳은 제대로 보려면 3~4일은 봐야 한다는 후기를 들었다. 그럴 수 없으니 다들 꼭 봐야 하는 루트를 정해가며 팁방출을 하고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에 다 보기에는 다리 아프고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냥 느낌만 보는 정도가 될 수 있다. 한두 전시라도 관람 전에 공부하고 다녀오길 추천한다.
우리가 관람한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는 조각상 모조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각각 작품마다 상세한 설명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없다면 그냥 부서진 조각상만 제목과 맞춰보는 것 이상이 되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그곳에는 사설 도슨트가 정말 많았다. 특히나 초등대상. 우리는 다행히 전시장에 들어가지 마자 주요 설명 프린트물을 챙겨보며 갈 수 있었다. 그동안 책에서 본 그리스로마 신화 지식을 대방출하는 딸의 표정에 자신감이 빛났다. 석상 대부분 진품은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다. 슬쩍 오스트리아를 여행 버킷리스트에 추가해 본다.
이곳은 3곳으로 나눠어 있었다. 첫 번째 신들의 영역이다. "신화의 세계" 신들은 하나같이 젊고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 궁금했다. 이때는 사람의 신체 자체와 그 비율을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지전능한 신을 인간이 가장 젊고 건강한 신체를 가진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영역은 인간의 영역이다. "인간의 세상"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간의 조각은 솔직했다. 물론 신격화해 제작된 카이사르의 조각상도 있었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조각은 나이 듦을 품고 있었다. 가감 없이 정직한 피부와 주름이 특징적이었다.
세 번째 영역은 죽음의 영역이다. "그림자의 제국" 신과 인간의 차이 신과 다르게 인간은 반드시 늙고 모두 죽는다. 그들을 기리고 죽음뒤의 이어지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그 상상은 동서양이 비슷했다. 동양에서 요단강을 건널 때 그들은 스틱스강을 건넜고 우리와 같이 노자돈을 입에 넣어줬다. 봤던 전시 중 잊을 수 없는 작품이 있다면 어린 남매가 죽어 매장한 무덤 앞 묘비의 부조였다. 그들의 얼굴이 얼마나 생생한지... 그 시대에는 산자가 기억해 주는 한 망자는 영원히 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덤도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눈에 잘 띄는 길에 자리하길 원했다. 현재 과학기술의 발달로 과학적 증거가 없으면 거짓이라 믿는 지금 세상과 비교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은 덜고, 추억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더 오래 간직하던 시대였다. 마음은 더 풍성하지 않았을까?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라는 제목이 처음부터 눈길을 끌었다. 내가 알고 있던 로마는 힘에 셌고 자신들의 그럴듯한 문화가 없어 그리스문화를 부러워했다. 그래서 그들의 것을 대부분 이름만 바꿔서 베꼈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갈취의 문화라고 치부했다. 물론 내 역사에 대한 지식은 일반 지식수준 평균 혹은 약간 그 이하다. 이전 시를 보고 또 한 번 큰 깨달음이 왔다. 그리스가 로마문화에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만큼의 영향을 미쳤다는 것 이상으로 로마가 있었기에 우리가 그들의 문화를 느끼고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로마의 전승이 없었다면 그리스의 문화는 현재 이렇게까지 전해지기 힘들었다.
전시를 다녀오면 하나의 생각에 묶이곤 한다. 오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의 조각은 늙음에 대한 부분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늙음은 쇠약해짐을 의미한다. 늙음이 잘못은 아니지만 자랑할 거리는 아니다. 가능하면 늙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세월을 거꾸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얼굴을 젊게 만든다고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아님에도 마치 그렇기라도 한 듯 살아가고 있다. 늙음은 좋지 못한 것인가? 피상적이 게나마 피해야 하나?
그리스 조각상을 보면 그 시대의 늙음은 지혜이자 경험이고 그로 인한 자랑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나이 드는 것을 숨기려고 할까? 사회가 급변하고 시시각각 적응해야 할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며 따라가지 못해서 그렇게 된 걸까?
과거 주름이 질만큼 살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자랑이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왔다. 이제 너나없이 주름지고 노쇠를 맞아 늙는다는 건 특별한 게 아닌 게 되었다. 늙음과 가치는 비례하지 않은 것처럼 늙다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치는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늙음의 시간 동안 내가 가진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느냐로 결정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얼굴을 고침으로써 나이 듦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의 가치에 대한 평가 앞에 당당해질 현재를 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