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양념갈비
1988년. 같은 시각.
피는 생각보다 검었다.
그리고 겨울의 뒷골목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버지는 미동조차 없었다. 내가 다가가 흔들었을 때, 거대한 몸이 힘없이 옆으로 기울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드러난 아버지의 얼굴은 흙과 피로 엉망이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아도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세상은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나만 이 끔찍한 골목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았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어 공책을 꺼냈다. 왼손이 타오르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래도 연필을 쥐었다. 흉터가 있는 손으로. 이 손밖에 없었다.
— 하온아. 아버지가 숨을 안 쉬어. 어떡해. —
글씨를 쓰는 동안 손가락이 세 번 미끄러졌다. 어떤 글자는 종이가 파이도록 눌렸고, 어떤 글자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연했다.
그 짓이겨진 글씨 위로, 돌연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내가 흘린 눈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뺨은 메말라 있었다. 손끝으로 그 물방울을 조심스레 문질렀을 때, 훅 끼쳐오는 냄새가 있었다.
소독약 냄새였다.
1988년의 이 비릿하고 더러운 뒷골목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깨끗하고 이질적인 냄새.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았다. 수영장의 냄새였다. 하온이 뛰어드는 그 파란 물의 냄새였다.
서른일곱 해 너머의 내 아들이, 물에 흠뻑 젖은 채 나를 향해 울고 있었다.
물방울 위로 글씨가 번져 나왔다.
— 아빠. 나 여기 있어. 아버지 가슴이 뛰는지 확인해. 귀 대봐. 당장 119 불러야 해. 아빠, 제발! —
그 세 글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주머니를 미친 듯이 뒤졌다. 차가운 금속들이 만져졌다. 며칠 전, 쌀을 사기 위해 화분을 깼을 때 주워두었던 동전들이었다. 내 왼손에 지워지지 않을 화상을 입히며 얻어냈던 그 백 원짜리 동전들.
나는 아버지를 골목에 둔 채 내달렸다.
큰 길가로 뛰어나가 공중전화 부스에 동전을 밀어 넣었다. 피 묻은 손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제발, 제발. 수화기 너머로 짧은 연결음이 들리자 나는 짐승처럼 소리쳤다.
"마장동 창고 뒷골목이요! 우리 아버지가 죽어가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할 즈음, 나는 다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골목 바닥에 흩어진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찌그러진 양은 도시락통이었다. 오늘 아침, 어머니가 말없이 싸주었던 아버지의 도시락. 뚜껑이 열려 나뒹구는 흙바닥 위로, 붉은 양념이 묻은 고기 한 점이 떨어져 있었다.
양념갈비였다.
어머니가 어디서 그 고기를 구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쌀통이 바닥을 드러내어 소금으로 죽을 끓이던 우리 집이었다. 무너진 남편이 다시 마장동으로 향할 때, 어머니는 아마도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헐어 그 갈비를 재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 고기를 씹으며 다시 거인처럼 일어서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그 간절한 기도가 지금, 깡패들의 군홧발에 짓밟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고기 한 점을 맨손으로 쥐었다. 서걱거리는 흙모래가 만져졌다. 뜨겁지도 않았다.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흙이었다. 그냥 고기였다. 그런데 왜 이것을 손에 쥔 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을 가슴에 품고 소리 없이 오열했다.
단순한 고기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의 짓밟힌 심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양념갈비였다.
응급실의 공기는 무겁고 서늘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그저 응급실 문턱에서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을 뿐이다. 나는 어머니의 좁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말이라는 것이 이 순간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나는 열한 살에 배웠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수술실 문이 열렸다. 피 묻은 가운을 입은 의사가 걸어 나왔다. 어머니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걸음걸이가 너무 무거워서, 나는 그 무게만으로 이미 알 것 같았다.
의사가 마스크를 내리며 입을 뗐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듣고 싶지 않았다. 들으면 그것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들으면 아버지가 정말로 그 말 안에 갇혀버릴 것 같았다.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흉터가 벌어져 피가 배어 나오는 왼손으로 연필을 쥐었다. 아팠다. 하지만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이 고통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왼손으로 버티는 것. 왼손으로 쓰는 것. 왼손으로 하온에게 닿는 것.
— 하온아.
내가 늦은 것 같아.
아버지가 눈을 안 떠. —
연필을 내려놓았다.
어머니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떨림이 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사흘 동안 소리 없이 울었던 그 어머니가, 지금 또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더 꼭 쥐었다. 왼손으로.
이 지독한 절망을 서른일곱 해 너머의 아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실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느껴진 밤이었다. 하지만 그 잔인함 안에도, 하온이 보내온 소독약 냄새의 물방울이 있었다. 흠뻑 젖은 채 울고 있던 그 아이가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서른일곱 해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같은 밤을 함께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