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서 온 나의 11살 아빠>

제16화 부천에서 제기동까지, 잃어버린 시간들

by Wren

1988년. 응급실 복도.
밤이 깊어도 형광등은 꺼지지 않았다.
소독약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심장박동기의 단조로운 전자음이 울렸다. 간호사가 복도를 빠르게 지나쳤다. 구두 소리가 타일 바닥에 울렸다가 사라졌다. 플라스틱 의자의 등받이가 차가웠다. 나는 그 차가움을 등으로 느끼면서 어머니 옆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술실 문을 향한 채,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등이 작았다. 이렇게 작은 등이었나 싶었다. 예전에는 이 등이 세상보다 커 보였는데. 나는 어머니 어깨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어깨뼈가 느껴졌다. 이렇게 얇았나. 열한 살이 할 수 있는 위로란 그 정도였다.
무릎 위에 아버지의 외투가 놓여 있었다. 구급대원이 응급실로 뛰어 들어올 때 아버지의 몸에서 벗겨낸 것이었다. 손을 댔다. 뻣뻣했다. 차가웠다. 냄새가 났다. 마장동의 비린내와 흙먼지가 섞인, 아버지가 새벽마다 입고 나가던 그 냄새였다. 코를 외투 깃에 묻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을 참을 때 이가 닿는 자리가 아팠다. 울면 안 됐다.
멍하니 어머니 가방을 바라보다 삐져나온 종이 하나를 꺼냈다. 주소 변경 통지서였다. 부천시 원미구. 그 위로 철산동 주소가 볼펜으로 두 줄 그어져 있었다. 그 아래 다시 제기동 주소가 덧씌워져 있었다. 세 개의 주소가 한 장의 종이 위에서 서로를 지우고 있었다. 이사를 거듭할수록 집의 평수만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줄어들었고, 어머니의 화장기가 사라졌고, 형과 누나의 웃음소리가 골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철산동의 거인이었던 아버지는 제기동의 습한 단칸방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반쪽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종이를 도로 밀어 넣었다. 손이 떨렸다.
그냥 손이 움직였다.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오른쪽 주머니. 동전 몇 개. 구겨진 휴지.
왼쪽 주머니. 딱딱한 게 만져졌다.
꺼내 들었다.
명함이었다. 형광등 빛 아래로 검은 글씨가 선명했다.
대한유통 영업부 과장 박민철.
손가락이 떨렸다.
이 사람이다. 아버지가 새벽마다 찾아가던 사람. 집에 전화가 오면 아버지 목소리가 가장 낮아지던 순간, 그때마다 수화기 너머에 있던 사람. 아버지가 밥상에서 형에게 두 번이나 말하다 멈추었던 그 이름. 도대체 무슨 약속을 했기에. 도대체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나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이다,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명함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손이 떨렸다. 수술실 문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종이쪽지가 무슨 의미인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기계음이 계속 울렸다. 나는 그냥 계속 쥐고만 있었다.
그때 외투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손바닥에 닿았다.
낡은 라이터였다. 황동색이었다. 한쪽 면에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비늘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담배를 끊은 뒤에도 버리지 않고 늘 주머니 안에 넣고 다니던. 아버지는 이 라이터를 왜 가지고 다닌 걸까. 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것을 손에 쥐었다. 차갑고 단단한 황동의 감촉이 손바닥을 채웠다. 아버지가 매일 손으로 감싸 쥐었을 그 감촉이었다.
공책이 뜨거워졌다.
가슴 안주머니 속에서였다. 페이지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숨을 참으며 공책을 꺼냈다. 펼쳤다. 글씨가 스스로 번지고 있었다. 잉크가 마르기 전처럼, 지금 막 써지는 것처럼.
— 아빠. 그 명함 버리지 마요. 라이터도요. 2025년에서 내가 찾을 수 있어요. 아빠, 나 여기 있어요. —
하온이 었다. 끊어졌다고 생각했던 선이 다시 팽팽해졌다.
나는 명함과 라이터를 쥔 채 공책을 덮었다. 서른일곱 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쥐고 있었다. 아버지가 늘 주머니 안에 넣고 다니던 것들을. 아버지의 냄새가 배어 있는 것들을.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것들을.
수술실의 붉은 램프가 꺼졌다.
문이 열렸다. 의사가 나왔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의사가 마스크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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