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큰형의 골방과 누나의 가방 선
집안의 기둥이 무너졌을 때, 남은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진다.
의사는 고비라는 단어를 썼다.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완전히 살아있지는 않지만, 죽지도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단어를 손바닥 안에 꼭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병원에 남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냥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혼자 제기동 골목을 걸었다. 3월의 새벽 공기가 폐 안으로 파고들었다. 개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봄이었는데, 밤바람은 아직 겨울 냄새가 났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없는 집은 냄새부터 달랐다. 찬기름이 눌은 냄새. 재가 식은 냄새. 사람이 없으면 공기도 죽는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나는 불도 켜지 않고 한참 그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신발을 벗어두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 빈자리가, 왜 이렇게 컸을까.
형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밤새 켜져 있었을 것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형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발 앞에 아버지의 가구들이 어지럽게 밀려나 있었다. 책상 밑, 장롱 옆, 마루 틈새까지. 형이 밤새 뒤진 흔적이었다. 두 손으로 종이 한 장을 손톱이 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쥐고 있었다. 형의 얼굴에서 열일곱 살이 사라져 있었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언제부터 울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 때문이야."
형이 종이를 내밀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내 공부방 책상 밑에 있었어."
나는 종이를 받아 펼쳤다. 대한유통이라는 글씨가 상단에 박혀 있었다. 아버지의 서명이 하단에 있었다. 금액 란이 두 곳이었다. 위쪽 숫자와 아래쪽 숫자가 달랐다. 아버지가 서명한 것은 아래쪽이었다. 훨씬 큰 숫자였다.
어젯밤 발견한 명함이 주머니 안에서 느껴졌다. 박민철. 그 이름이 종이 위의 가짜 숫자와 겹쳐졌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닌 이유가, 이 두꺼운 종이 한 장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그때 품속의 공책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나는 공책을 꺼내 펼쳤다. 하온의 글씨가 번지고 있었다.
— 아빠. 그 종이 때문에 우리 가족 30년이 지옥이었어요. 할아버지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고, 우린 뿔뿔이 흩어졌어요. 날짜랑 금액 두 개 다 기억해 둬요. 그게 나중에 박민철 잡는 증거가 돼요. 아빠, 제발. —
읽는 순간, 열한 살의 심장이 금 가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살아 돌아와도, 이 종이가 없어지지 않으면 지옥은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면 계약서의 날짜를 읽었다. 금액 두 개를 읽었다. 왼손으로 공책에 옮겨 적었다. 흉터가 욱신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나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그만큼 공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거기 있었다.
누나 수현이었다.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던 책가방을 떨리는 손으로 내려놓았다. 노란 병아리 스티커가 붙어 있는 가방이었다. 스티커 한쪽이 반쯤 뜯겨 있었다. 누나의 손이 서툴게 지퍼를 잡아당겼다.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다시 잡았다. 겨우 열었다.
안에서 접힌 수첩 하나가 나왔다.
"아버지가 나한테 그랬어." 누나의 목소리가 끝에서 갈라졌다. "무서운 아저씨들이 집에 오면 무조건 이거 들고나가서 숨어 있으라고. 이건 우리 집 목숨줄이니까 절대로 뺏기면 안 된다고. 나는 그냥 무서워서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닌 거야. 근데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누나는 가방 선을 지킨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맡긴 가족의 운명을 그 작은 가방 안에 가둔 채, 열세 살의 소녀는 매일 공포를 견디어왔던 것이다. 그 뾰족하고 단호했던 선이, 사실은 무서움을 혼자 담아두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아무도 열지 못하도록. 아무도 모르도록.
누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가 크고 거칠었다. 형도 따라 무너졌다. 어깨가 격렬하게 들썩였다.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나는 손에 쥐어진 종이들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사실 나도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병원에 있고, 형이랑 누나는 이렇게 망가져 있는데 열한 살인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싶어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흉터 때문에 쭈글쭈글해진 왼손으로 형의 소맷자락을 꽉 잡았다. 그리고 누나의 가방 끝동을 당겨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형, 울지 마. 누나도 울지 마. 아빠 안 죽어. 이거 내가 어디 잘 숨겨둘게. 아무도 모르는 데 숨겨둘게.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내 목소리는 위엄 있는 위로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는 장담보다는, 제발 그만 울라는 애원에 가까웠다. 하지만 손만큼은 이면 계약서를 놓지 않았다.
형이 내 흉터 진 손을 제 손으로 덮어 잡았다. 누나도 차가워진 내 손등 위로 자기 손을 겹쳤다.
좁은 골방 바닥에 삼 남매의 손이 층층이 쌓였다.
"무서워 죽겠는데." 누나가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셋이 있으니까 조금 낫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하지만 쥐고 있는 종이만큼은 절대로 놓지 않았다.
나는 흉터가 벌어진 왼손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이 틀렸다고 한 그 손. 선생님이 빨간 줄을 긋고, 아버지가 오른손으로 바꾸라 하고, 밥상 아래로 숨겨야 했던 그 손. 하지만 이 손이 쌀을 구하러 피를 흘렸다. 이 손이 119 다이얼을 돌렸다. 이 손에 서른일곱 해 뒤의 아들이 온기를 보내왔다. 그리고 지금, 이 손이 박민철을 쓰러뜨릴 종이를 쥐고 있었다.
세상이 뭐래도 상관없었다.
이 손이, 이 종이를 쥔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