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노란 학원 버스와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
어떤 슬픔은 세상이 너무 완벽하게 굴러갈 때 더 날카롭게 베어 든다.
오후 세 시의 중곡동 교차로는 온통 노란색이었다. 골목 어귀에 멈춰 선 노란 학원 버스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면, 엄마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작은 손들을 낚아채며 걸음을 재촉했다. 3월의 새 학기가 시작된 거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오직 나 하나만, 그 풍경에서 툭 떨어져 나온 부품처럼 남겨졌다.
버스가 출발하자 매연이 한 줄기 피어올랐고, 그 냄새마저 이상하게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마를 스치고 지나는 찬바람 속에서, 내 가방 안에 든 낡은 공책의 존재감이 유독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아빠의 마지막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하온아, 내가 늦은 것 같아. 아버지가 눈을 안 떠. —
119를 부르라고, 제발 숨을 확인하라고 젖은 손으로 휘갈겨 썼지만 공책은 그 이후로 죽은 듯이 침묵했다. 어젯밤도, 오늘 아침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세상은 저 노란 버스의 바퀴처럼 무심하고 맹렬하게 굴러가고 있는데, 나만 이 텅 빈 교차로에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버스가 골목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매연 자국만 남았다. 그리고 다시 나 혼자였다.
신호등이 바뀌고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길을 건널 때도 아무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 편의점의 따뜻한 불빛을 지나칠 땐 문득 들어가고 싶어 졌지만, 이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딱히 살 것도, 들어갈 이유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서글퍼졌기 때문이다. 중학생 형들이 떡볶이 봉투를 들고 웃으며 지나가는 소리가 멀어질수록 세상은 더욱 조용해졌다.
가방 끈을 고쳐 멨다. 등에 닿은 공책이 차가웠다. 아무 응답도 없는 그 공책을, 나는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지금 아빠와 나를 잇는 유일한 실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영어 단어를 외우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시간, 나는 이 골목을 걷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한 뒤 혼자 남은 정류장처럼, 바람만 지나가는 자리에서. 우리 엄마는 지금 안방에 누워 있다. 공황이라는 섬 안에서. 1988년의 아빠는 어딘가의 병원 복도에서 혼자 의사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골목을 걷고 있다.
세 사람.
세 개의 혼자.
하지만 우리는 이어져 있었다.
골목 끝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멀리 아차산을 바라보았다. 저 산을 넘고 또 어딘가의 개운산을 넘으면 아빠가 있는 제기동에 닿겠지.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두 개의 산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가깝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등에 딱 붙어 있던 가방 안쪽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핸드폰 진동과는 달랐다. 누군가의 심장 박동처럼 둔탁하고 불규칙한 울림. 동시에 얼음장 같던 공책이 닿은 등줄기 한가운데가 난로를 댄 것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헉, 숨을 들이켜며 두 손으로 가방 끈을 꽉 움켜쥐었다. 길 한복판에서 당장 가방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집으로 가야 했다. 마음이 다급해지자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골목이 흔들렸다.
두 팔을 힘차게 휘저으며, 미친 듯이 질주했다. 피투성이가 된 할아버지를 안고 울부짖었을 1988년의 차가운 뒷골목, 그곳에 있었을 아빠의 손을 상상했다. 내가 이렇게 햇살 비치는 아스팔트 위를 사력을 다해 달리고 있을 때, 열한 살의 아빠는 응급실 복도에서 얼마나 지독한 고립감을 느꼈을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막막함은 서른일곱 해 전 아빠가 감당해야 했던 절대적인 외로움의 아주 작은 파편일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열한 살이 있다.
노란 버스를 타는 열한 살.
그 버스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는 열한 살.
아빠가 어느 쪽이었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가방 속의 온기가, 멈추지 않는 떨림이 그 증거였다.
현관문을 열자 서늘한 약 냄새가 훅 밀려왔다.
식탁 위, 랩에 씌워진 식은 볶음밥. 안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엄마의 지친 숨소리.
평소 같았다면 그 식은 밥 앞에서 목이 메어 한참을 서 있었겠지만, 지금은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엄마가 불안 없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에 짧게 안도하며, 나는 신발을 벗어던지듯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가방에서 꺼낸 공책과 스텔스 로봇을 나란히 두었다. 공책은 여전히 뜨거운 미열을 품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하지만 힘주어 연필을 쥐었다. 서른일곱 해를 건너 닿을 수 있다면, 아무리 작은 문장이라도 상관없었다. 이 공책이 뜨겁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 아빠. 나 여기 있어. 기다리고 있어. 아무 데도 안 가. —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답장이 올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제발, 단 한 글자라도 좋으니.
그때, 스텔스의 붉은 눈이 미친 듯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이 아니었다. 경고등처럼 빠르고 날카롭게 번쩍였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페이지가 거칠게 넘어갔다. 넘겨진 새 페이지 위로 무언가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공책을 잡았다.
나는 숨을 멈췄다.
— 하온아. 살아있어. 아버지가 눈을 떴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