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개운산 쪽 하늘이 깜빡이던 밤
기적이라는 단어는 때로, 너무도 납작하고 건조한 문장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 하온아. 살아있어. 아버지가 눈을 떴어. —
공책 위로 번진 열다섯 개의 글자. 서른일곱 해를 건너 내게 도착한 그 문장을 나는 숨을 죽이고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씨는 삐뚤빼뚤했고, 획은 사시나무처럼 심하게 떨려 있었다. 열한 살의 아빠가 소독약 냄새 진동하는 병원 복도에 웅크려 앉아,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꾹꾹 눌러썼을 그 절박한 떨림이 종이의 낡은 결을 타고 고스란히 내 손끝으로 전해졌다.
꽉 쥐고 있던 손바닥에는 연필 자국이 초승달 모양으로 붉게 패어 있었다. 그제야 막혀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소리를 내어 울면 안방에서 잠든 엄마가 깰까 봐,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거칠게 틀어막고 책상 위로 엎드렸다. 참으려 할수록 눈물은 더 거세게 낡은 공책의 누런 가장자리로 툭, 툭 떨어져 내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아빠가 세상에 혼자 남겨지지 않아서.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지독하고 차가운 1988년의 복도에서, 아빠의 세상이 통째로 무너지지 않아서. 오늘 밤 그것을 알았다. 그것으로 오늘을 버틸 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안방에서 엄마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눈물을 닦았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괜찮다. 오늘은 괜찮다.
연필을 다시 고쳐 쥐었다. 눈물을 훔쳐낸 소매 끝이 서늘하게 축축했다.
— 울지 마, 아빠. 내가 계속 여기 있을게. 할아버지 손 꽉 잡아드려. —
최대한 또박또박, 내가 아는 가장 어른스러운 글씨체로 꾹꾹 눌러 답장을 적었다. 열한 살의 내가 열한 살의 아빠에게 보내는, 시간을 역류하는 단단한 위로였다. 문장의 마침표를 찍자 스텔스 로봇의 붉은 눈이 부드럽게 한 번 깜빡였다. 데일 듯 뜨거웠던 공책의 미열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방의 온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공책이 거기 있었다. 스텔스가 거기 있었다. 조용했다. 이 공책이 뜨겁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아빠와 나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버티고 있었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은 방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노란색으로 빛나던 중곡동의 교차로도, 학원 버스도 모두 저녁의 그늘 속으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식탁 위의 볶음밥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내 밥을 챙겨두고 쓰러지듯 잠든 엄마. 안방 문이 가느다랗게 열려 있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잠들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나은 하루였다. 나도 모르게 이마를 유리에 더 깊이 댔다. 차가울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북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차산 너머 어딘가에 개운산이 있을 것이다. 그 산자락 아래, 1988년의 병원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37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결코 건널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협곡을, 오늘 우리는 낡은 공책 한 권을 다리 삼아 무사히 건너갔다. 나는 그것만 생각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아차산 너머 어딘가에서, 아직 1988년의 밤이 끝나지 않고 있었다.
개 한 마리가 어딘가에서 짖었다. 바람이 불었다. 유리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때였다.
개운산이 있을 법한 밤하늘 한가운데서 알 수 없는 빛이 일렁였다.
처음에는 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마른번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그것은 자연의 빛이 아니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맥박처럼 규칙적인 깜박임. 백열등이 수명을 다하기 직전 파르르 떨며 남은 빛을 토해내듯, 밤하늘의 한 귀퉁이가 조용히 점멸하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착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먼 곳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조명을 켜고 끄는 것 같았다. 말 대신 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숨을 죽이고 응시했다. 스텔스의 눈이 깜박이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박자였다. 1988년과 2025년의 밤하늘이 맞닿은 경계선에서, 시간의 틈새가 벌어지며 새어 나오는 빛 같았다. 나는 유리창에 손을 댔다. 차가웠다. 하지만 저 빛이 있는 쪽은 따뜻할 것 같았다. 아빠가 있는 쪽이니까.
그런데 네 번째 깜박임이 없었다. 멈춰 있었다.
나는 숨을 참고 기다렸다. 10초. 20초. 유리창에 댄 이마가 차가워졌다. 30초. 혹시 내가 잘못 본 걸까. 혹시 그냥 별빛이었을까. 아니면 저 하늘이 내게 보내는 신호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걸까. 기다려야 할지, 먼저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공책이 다시 뜨거워졌다.
아직 아빠가 쓰고 있었다. 이미 답장을 받았는데. 이미 할아버지가 눈을 뜨셨는데. 그런데 왜. 지금. 다시. 손이 가방을 향했다. 공책을 꺼낼 생각이 몸보다 먼저였다.
나는 창가에서 책상으로 뛰었다. 공책을 펼쳤다.
새 페이지 위로 글씨가 번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이전보다 훨씬 크고 또렷했다. 떨림이 없었다. 결심한 사람의 글씨였다.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병원 복도에 웅크려 앉았던 그 아이의 글씨가 아니었다. 마치 이것 하나를 쓰기 위해 오늘 하루 전부를 버텨온 사람의 글씨 같았다.
하온아. 하늘이 깜빡이고 있어. 너야?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세 번 읽었다. 그리고 연필을 잡았다. 손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