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서 온 나의 11살 아빠>

제21화 개운산 너머, 빛의 문이 열리다

by Wren

개운산 쪽 하늘이 이상하게 깜빡이던 그 밤, 조운은 솜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집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저 빛이 기다리고 있었다. 발이 먼저 알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발이 개운산 방향으로 향했다. 왜 그런지 몰랐다. 다만 멈출 수 없었다.
산길은 좁고 가팔랐다. 얼어붙은 흙이 신발 밑에서 바스락거렸다. 낮에는 봄 햇살이 비치는 길이었는데, 밤이 되면 다시 겨울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건강했던 시절, 가족이 함께 도시락을 싸서 올라왔던 그 길이었다. 지금 그 기억은 너무 멀었다. 같은 길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었다.
조운은 걸으면서 이면 계약서를 생각했다. 명함을 생각했다. 라이터를 생각했다. 아버지의 손을 생각했다. 따뜻했다. 차갑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오늘 밤은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었는데 발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위로 향했다. 마치 무언가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때였다.
손끝이 저릿했다.
처음에는 정전기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심장 박동과 같은 리듬으로 손끝에서 시작된 파동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조운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태양빛이 아니었다. 가로등의 빛도 아니었다. 푸르스름한, 공책의 페이지 사이에서 보았던 그 빛이었다. 스텔스의 눈에서 번지던 바로 그 빛이었다. 그 빛이 지금 산 위에 있었다. 나무들 사이를 뚫고, 3월의 밤공기를 흔들며, 점점 커지고 있었다.
허공에서 무언가가 찢기는 것 같았다.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느껴졌다. 세상의 어떤 막이 아주 얇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빛의 가장자리가 흔들렸다. 일렁이는 불꽃처럼, 그러나 뜨겁지 않게.
조운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무서웠다. 분명히 무서웠다. 하지만 그 빛은 이상하게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지난 몇 달간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한 온기가 그 빛 안에 있었다. 손끝의 저릿함이 심장까지 내려왔다. 가슴 안주머니에 넣어둔 공책이 뜨거워졌다. 스텔스의 마지막 조각이 손바닥 안에서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빛의 경계선에 다가설수록 3월의 밤바람이 사라졌다. 연탄가스 냄새가 사라졌다. 낮은 지붕들의 그림자가 흐릿해졌다. 낯설고 건조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태어나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마침내 조운의 발이 그 선을 넘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소거되었다.
깊은 물속에 잠긴 것 같았다. 눈을 똑바로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섬광이 쏟아졌다. 그 속에서 계절이 지나갔다. 벚꽃이 피고, 비가 쏟아지고, 단풍이 지고, 눈이 쌓였다. 한 번이 아니었다. 수십 번이었다. 서른일곱 번의 봄과 겨울이 조운의 앙상한 몸을 관통해 지나갔다. 그 계절들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작고 따뜻한 손이. 하온의 손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발이 바닥에 닿았다.
딱딱하고 매끄러운 바닥이었다. 흙이 아니었다. 돌도 아니었다.
눈을 떴다.
제기동이 없었다.
낮은 지붕들이 없었다. 울퉁불퉁한 골목이 없었다. 대신 하늘을 찌를 듯한 유리 빌딩들이 사방에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도로 위를 소음도 없이 달리는 거대한 자동차들. 저마다 손에 빛나는 직사각형 물건을 쥔 채 걷는 사람들. 머리 위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빌딩의 빛이 너무 밝아서였다.
조운은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낡은 솜점퍼를 입고. 해진 운동화를 신고. 손에 스텔스의 마지막 조각을 쥔 채.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 세상의 공기가 폐를 채웠다. 차갑고 건조했다. 하지만 그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이.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이 조운을 스쳐 지나갔다. 어깨를 부딪히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이 작은 소년을 주목하지 않았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손바닥을 펼쳤다. 레고 블록이 거기 있었다. 뾰족한 모서리가 손살을 파고들었다. 아팠다. 아프다는 것은 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낯선 언어로 방송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발밑의 바닥이 가볍게 진동했다. 연탄가스 냄새 대신 낯선 공기가 폐를 채웠다. 제기동의 소리 대신 이 거대한 도시의 소음이 귀를 채웠다.
길 건너 빌딩 유리에 조운의 모습이 비쳤다. 낡은 솜점퍼를 입은 작은 소년. 그 뒤로 휘황한 빛들이 넘실댔다. 낯설고, 작고, 혼자였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1988년의 3월 밤공기는 이제 막 풀리기 시작했는데, 이곳의 3월에는 아직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 하나가 조운의 뺨 위에 내려앉았다. 차가웠다. 그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눈은 차가운 것이었다.
조운은 고개를 들었다. 눈송이가 얼굴을 적셨다. 눈을 깜박였다.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하온이 어딘가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 알았다.
돌아갈 문은 이미 닫혔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아주 멀리서, 누군가가 조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낯설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를 닮은 목소리였다. 조운 자신도 몰랐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 세상이 언제인지. 다만 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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