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서 온 나의 11살 아빠>

제22화 2025년의 하늘에 생긴 희미한 균열

by Wren

​그날 밤 하온은 잠들지 못했다.
​공책이 뜨거웠다. 아까부터 계속 뜨거웠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이불속에 누워 있었는데, 방 안에서도 그 온기가 느껴졌다. 공책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것처럼 박동하는 것 같았다.
​하온은 이불을 걷어냈다. 일어났다. 공책을 펼쳤다.
​아무것도 없었다. 새 페이지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온기는 멈추지 않았다. 아빠가 쓰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 어딘가에서 번지고 있었다. 아니면 쓰려다 멈추고 있었다.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기다렸다.
​10분. 20분. 연필을 쥐고 앉아 있었다. 공책이 뜨거워지다가 식기를 반복했다. 아빠가 무언가를 결심하려다 망설이는 것 같았다. 하온은 연필을 내려놓지 않았다. 손이 저렸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책상 한편에 세워진 스텔스 로봇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깜박이고 있었다. 하온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빠도 지금 이 신호를 보고 있을까.
​새벽 1시가 넘었다. 안방에서 엄마의 숨소리가 들렸다. 고른 숨소리였다. 오늘 밤은 잠들어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창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댔다. 아차산 방향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웠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눈이 그쳐 있었다. 빌딩의 불빛들이 구름 아랫면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도 이렇게 서 있었다. 개운산 쪽 하늘이 깜빡이던 그 밤. 아빠가 두 번째 메시지를 보내왔던 그 밤. 그 이후로 하루가 지났는데 아빠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 하루가 얼마나 길었는지.
​오늘 학교에서는 수업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이름을 불렀다. 일어섰다. 무슨 질문이었는지 몰랐다. 그냥 모르겠다고 했다. 저녁에 엄마가 밥을 차려두고 잠들었다. 식탁 위에 랩을 씌운 반찬들. 먹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공책을 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스텔스의 붉은 눈만 조용히 깜박이고 있었다. 저녁을 먹었다. 다시 앉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불 속에 들어갔다. 잠들려 했다. 잠들 수 없었다.
​아빠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잘 있는지 몰랐다. 1988년의 그 밤이 어떻게 끝났는지 몰랐다. 공책은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연결되어 있는데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는 것은, 연결이 끊어진 것보다 더 이상한 공포였다. 이불속에서 공책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뜨거웠다. 그 온기만이 아빠가 아직 어딘가에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것으로 버텼다.
​그때 공책이 다시 뜨거워졌다. 아니, 이미 뜨거웠다. 더 뜨거워졌다. 스텔스의 붉은 눈이 미친 듯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하온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책상으로 뛰었다.
​새 페이지 위로 글씨가 번지고 있었다. 아주 느리게. 힘겹게. 마치 아주 멀리서 오는 전파처럼, 도중에 끊길 것 같은 글씨였다.
​'나 지금.'
​거기서 멈췄다.
​하온은 숨을 참았다. 연필을 잡았다.
​"아빠? 어디 있어요?"
​공책이 더 뜨거워졌다. 대답이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글씨가 번지지 않았다. 온기만 있었다. 마치 말하려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마치 여기 있는데 닿지 않는 것처럼.
​하온은 손바닥으로 공책의 표지를 감쌌다. 뜨거웠다. 손이 데일 것 같았다. 그래도 손을 떼지 않았다.
​"아빠, 나 여기 있어요. 들려요?"
​그때였다.
​창밖에서 빛이 번쩍였다.
​번개가 아니었다. 번개는 저렇게 천천히 번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어떤 부분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주 얇은 종이를 뒤에서 누군가 손가락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빛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하온은 숨을 참았다. 눈을 비볐다. 다시 보았다. 그래도 그 빛은 거기 있었다.
​하온은 창가로 뛰었다.
​아차산 방향이었다. 구름 아랫면 어딘가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었다. 아주 희미했다. 하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하온은 알았다. 저 빛이 아빠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순간 공책이 손에서 뜨거워졌다. 하온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페이지에 글씨가 완성되어 있었다.
​'나 지금 거기 있어.'
​하온은 그 문장을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세 번 읽었다.
​나 지금 거기 있어.
​2025년. 여기. 지금. 아빠가 여기 있었다. 이 도시의 어딘가에. 이 밤의 어딘가에. 서른일곱 해를 건너서, 마침내. 하온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참았다. 지금 울 시간이 없었다.
​창밖의 균열이 아직 거기 있었다.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구름을 밀어내며. 빌딩의 불빛을 뚫고. 마치 37년의 시간이 갈라지며 만들어낸 작은 문처럼. 저 낯선 도시의 한가운데. 열한 살의 아빠가. 빌딩들 사이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눈이.
​하온은 신발을 신었다. 가방을 집었다. 공책을 가방에 넣었다. 손이 떨렸다.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온아."
​엄마의 목소리였다. 조용하고 낮았다. 아직 반쯤 잠든 목소리였다. 하지만 하온의 손이 손잡이 위에서 굳었다.
​"지금 어디 가려고."
​질문이 아니었다. 문장 끝에 물음표가 없었다. 아직 반쯤 잠든 것 같았는데, 엄마는 알고 있었다. 하온이 지금 이 새벽에 밖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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