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서 온 나의 11살 아빠>

제23화 낯선 집, 서른일곱 번의 계절을 건너

by Wren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운은 그것만큼은 알았다. 눈은 1988년에도 차가웠고, 2025년에도 차가웠다. 뺨 위에 내려앉는 눈송이의 감각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빛의 문을 통과한 뒤 발이 땅에 닿았고, 그 이후로 그냥 걸었다. 방향도 몰랐다. 사람들이 밀려드는 쪽을 피해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에서 다시 골목으로. 이 도시의 골목은 제기동의 골목과 달리 넓고 밝았다. 어둡고 냄새나는 곳이 없었다. 연탄가스도 없었다. 김치 냄새도 없었다. 그냥 낯설고 건조했다. 그 건조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조운은 솜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레고 블록의 뾰족한 모서리가 손실을 찔렀다. 아팠다. 아직 여기 있다는 뜻이었다.
공책이 뜨거웠다. 가슴 안주머니에 넣어둔 공책이 계속 뜨거웠다. 이 낯선 도시에서도 뜨거웠다. 하온이 뭔가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꺼내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길 한복판에서 공책을 펼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빛나는 직사각형 물건을 들고 걸었다. 그것에 눈을 고정한 채. 조운의 낡은 공책은 그 사이에서 너무 작고 낡아 보일 것 같았다.
길 한쪽에 멈춰 서서 처음으로 주변을 제대로 살폈다.
간판들이 보였다. 읽을 수 있는 글자였다. 한글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언어를 쓰는 도시였다. 다만 서른일곱 해가 지난 도시였다. 그 서른일곱 해 사이에 이 도시는 이렇게 변해 있었다. 낮은 지붕들이 사라졌다. 좁은 골목들이 사라졌다. 연탄 냄새가 사라졌다.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유리와 빛과 건조한 공기가 들어찼다. 조운은 그 빈자리들이 아팠다. 사라진 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그냥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로 숨어든 것인지.
조운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낡은 솜점퍼. 해진 운동화. 이 도시에서 조운은 유령이었다. 과거에서 온 유령이었다.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이 도시는 유령 하나쯤 걷고 있어도 모르는 도시였다. 사람들이 너무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1988년의 제기동에서는 골목 어귀에 앉아 있는 어른들이 조운의 얼굴을 알았다. 이름도 알았다. 여기서는 아무도 몰랐다. 그 모름이 이상하게 외롭지 않았다.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책이 뜨거웠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직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다시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다만 발이 어딘가를 향해 계속 움직였다. 빛의 문을 통과할 때, 그 찰나에 느꼈던 것. 작고 따뜻한 손의 감각. 하온의 손이,라는 생각이 스쳤던 그 순간. 그 방향을 향해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골목과 골목이 이어졌다. 아파트 단지를 지났다. 계단을 올랐다.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눈이 계속 내렸다. 신발 속으로 눈이 스며들었다. 발이 차가워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조운은 걸으면서 이 도시의 냄새를 맡았다. 음식 냄새가 없었다. 사람 냄새가 없었다. 도시 전체가 세탁된 것처럼 냄새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냄새 없는 공기 속에서 조운은 뭔가를 맡는 것 같았다. 아주 희미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냄새를. 익숙한데 처음인 냄새를.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닿지 않는 것 같은 냄새를. 뭔지 몰랐다. 계속 걸었다.
그리고 어떤 건물 앞에 서게 되었다.
높지 않은 건물이었다. 사방이 유리 빌딩인 이 도시에서 유독 낮고 오래된 건물이었다. 창문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다. 2층이었다. 노란빛이 새어 나왔다.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 사람의 실루엣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조운은 그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발이 멈춰 있었다. 멈추라고 결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멈춰 버렸다. 공책이 뜨거워졌다. 더 뜨거워졌다.
그때 커튼 안의 실루엣이 창가로 다가왔다.
커튼이 조금 걷혔다. 빛이 조운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조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유리창 너머로 얼굴이 보였다.
열한 살이었다. 조운과 똑같은 열한 살이었다. 하지만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낯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에.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딘가에서.
그 얼굴이 조운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커졌다. 입이 벌어졌다. 아, 하는 표정이 되었다.
조운은 그제야 알았다.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코의 모양이. 눈썹의 각도가. 귀의 위치가. 자신의 얼굴과 너무 달랐는데, 너무 같았다.
저 아이가 하온이 었다. 저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었다. 조운은 그 문장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다시 말해보았다. 자신의. 자식. 37년 뒤에 자신이 낳게 될 아이. 자신이 아직 만나지도 못한 사람과 낳게 될 아이. 그 아이가 지금 저 창문 너머에서 조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직 울 수 없었다. 저 아이가 문을 열고 나와야 했다. 아니면 조운이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전에 무너지면 안 됐다.
발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멈추라고 결심하지 않았는데, 또 움직이고 있었다.
조운은 숨을 참았다. 눈이 내렸다. 손이 떨렸다. 이 도시의 3월에, 서른일곱 해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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