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슬픔과 함께 걷는다는 것

푸른빛 속으로 돌아가다.

by ice

오래된 엽서 속 슬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엽서 한 장을 발견했다. 가장자리는 햇빛에 바래 희미한 회색빛이 돌았고, 모서리는 살짝 말려 있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손끝에 스며들었다. 30년 전, 팬시 전문점에서 구입했던 만화 <블루>의 엽서였다. 푸른빛으로 물든 거리 풍경과 함께 적인 짧은 문구를 읽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20대의 나로 되돌아갔다. 묘하게 먹먹한 감각, 잊고 있던 공기가 다시 숨결을 불어넣듯 밀려왔다.


슬픔과 함께 걷는다는 것


만화 속 이야기는 이렇다.

"비우고 싶은 슬픔이나 절망을 종이에 쓴 다음 마법의 유리통에 넣으면 깨끗이 잊힐 거예요."

카페 주인의 말에, 남자 주인공은 백지를 넣는다.

"쉬어 갈 뿐이라면 달라지는 건 없어요, 내가 일어서면 슬픔도 일어서고, 내가 걸으면 슬픔도 따라 걸을 테니까."

그 대목에서 나는 책을 덮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20대의 나는 일을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이란 늘 서툴렀고, 미숙한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조차 어려웠다. 자식감과 의욕은 있었지만, 매일은 실수투성이였다.


레벨업은 오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직장에 발을 들였지만, 기대했던 '레벨업'은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본사에서 일의 효율성을 위해서 직원이 왔다. 아무 일도 아닌 실수였지만, 그날 나는 점심을 먹지 못했다. 점점 자신이 작아지고, '나는 재능이 없어'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 엽서를 서랍 깊은 곳에 넣고, 꺼내지 않았다. 푸른빛이 아니라, 내 마음은 회색빛이었다.


어느 날, 작은 균열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본사에 교육받으러 갔는데 첫 교육인 듯했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20대의 나를 떠올렸다.

"괜찮아요. 지금 공정에서 정정 가능해요. 저도 예전에 비슷한 실수 했었거든요." 그녀가 조금씩 안도하는 표정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언제부턴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날 밤, 나는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푸른빛 엽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작은 등불이 된 일상


지금의 나는 성인이 되어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간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여전히 내 안의 '재능'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재능이란 찰나의 번뜩임이 아니라, 매일 무너지고도 다시 일어나는 힘 아닐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매일 일어나 무언가를 한다는 것. 그건 분명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작은 등불이었다.


버틴다는 것의 의미


이제는 안다. 슬픔은 완전히 떠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일어서고, 슬픔도 따라 일어난다. 하지만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함께 걸을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슬픔과 동행하는 것이 나약함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용기라는 것을.

30년 전 엽서를 고이 간직해 둔 나에게, 그리고 오늘 다시 그것을 발견한 나에게, 나는 조용히 속삭인다.

"버티는 것도 재능이야. 잘 버텨줘서 고마워."

푸른빛은 회색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걸 다시 발견하기까지 30년이 걸렸을 뿐.




"슬픔은 여전히 내 곁에서 걷지만, 재능은 몰라도 오늘도 살아내는 내가 내 등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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