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팔찌 스무 개가 채우지 못한 밤에 대하여

몰입과 고독

by ice

드라마 속 노년의 주인공이 팔찌 스무 개를 만들었지만 밤은 끝없이 길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순간 멈칫했다.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몰이바는 행위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실존적인 공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힘겨운 갱년기를 지나고 있지 않았다면, 이 대사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을 것이다.


고요한 작업실에서 흙과 손이 하나가 되어 작은 컵을 만든다. 문득, 지금 빚는 이 컵을 방금 전의 작품보다 더 잘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스며든다. 멈춤은 곧 뒤처짐처럼 느껴지고, 여유는 게으름처럼 나를 찔러댄다.

세상의 속도와 끊임없이 나를 비교하며, 내가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묻는 순간 울컥함이 밀려온다. 비우려고 왔건만, 고요함 속에서 나를 만나려 했건만, 오히려 욕망은 한가득 피어난다.

그러나 흙과 마주하며 깨달았다. 잘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나를 가장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고독이라는 이름의 선물


나는 이 시간을 '꼭 필요한 고독의 시간'으로 정의하고 싶다. 결과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드는 행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시간. 세상의 시계는 잠시 멈추고, 오직 손끝과 흙의 호흡만이 흐르는 순간. 이 서툰 시작으로 만든 작은 컵 하나면 충분하다.

노년의 밤은 다른 결의 몰입으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시간을 죽이기 위한 행위가 아닌, 시간을 되살리는 행위로. 나는 도자기를 빚으며 성취가 아닌 평온을, 결과가 아닌 과정의 온기를 배운다. 흙의 결을 느끼며 손끝으로 형태를 찾아가는 이 순간은,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한 시간을 스스에게 선물하는 일이다.

고독은 관계가 줄고 세상의 소음에서 멀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고독은 나를 텅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세상과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깊이 연결되는 일이다. 아무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좋은 시간, 스스로를 돌보는 이 시간이 바로 고독의 선물이다.


서툰 컵 하나의 의미


도자기 컵을 굽고, 핑크색으로 색칠한 커피잔에 봉지 커피를 타 마셨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컵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이 서툰 컵하나는 나의 노년에 시간을 되살리는 몰입의 씨앗이 될 것이다.

나는 노년에 도자기를 빚고, 라탄 공예로 바구니를 엮고, 20대에 행복하게 읽었던 판타지 소설을 다시 읽을 것이다. 나만의 다른 세계를 만나며, 그 모든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낼 것이다.

고독 속에서도 몰입을 통해 스스로를 채워가는 사람이 되어, 나이 듦이 두렵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팔찌 스무 개로도 채우지 못한 그 밤이, 나에게는 흙 한 줌의 온기로 채워지는 밤이기를 바란다.



"팔찌 스무 개로도 채워지지 않던 밤, 나는 흙 한 줌의 온기로 나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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