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갱년기, 그리고 수확의 계절
아침의 빛이 조용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햇살은 손길처럼 따스했고, 그 부드러운 온기가 새로운 계절의 도착을 알려주었다.
여름의 열기가 물러나고,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찾아오듯 내 삶도 청춘의 불꽃에서 성숙의 결실로 옮겨가고 있었다. 나의 환절기 갱년기라는 낯설던 이름이 이제는 계절처럼 자연스러워졌다.
그 안에서 나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ㅡ 평온함, 감사, 잔잔한 충만함.
황금빛 아침의 발견
아침 눈뜨자마자 하는 루틴은 몸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일. 오랜만에 몸이 가벼웠다. 밤새 뒤척이던 시간도, 새벽의 불면도 사라졌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방 안 가득 번지며, 먼지 입자들이 천천히 춤추고 있었다. 나는 침대 끝에 앉아 손을 펼쳤다. 손등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따뜻하게 번져왔다.
그때 문득 행복은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라, 이미 내 손바닥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물론, 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뜨거운 열감에 잠을 설치고, 갑자기 눈물이 나고, 거울을 보며 "내가 언제 이렇게 됐지?"멍하니 서 있던 날들이 있었다. 혼자 "나만 이상한 건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이 모든 변화는 이상한 게 아니었다.
내 몸이 새로운 리듬을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20대와 지금, 그 차이
스무 살의 나는 늘 달리고 있었다. 사랑, 취업 ㅡ 놓치면 안 된다고 믿었다.
봄날 벚꽃이 눈처럼 흩날릴 때도 그 향기를 느끼기보단 사진 속 배경으로만 남겼다.
서른 살이 되어서도 부족함이 먼저였다. 나보다 먼저 승진한 동기, 결혼한 친구들을 보며 뒤처지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지금의 나는 다르다. 친한 사람의 승진 소식에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성취가 내 부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아침 혼자 마시는 커피 한잔이 화려한 저녁 약속보다 더 깊은 만족을 주는 이유도. 무엇을 증명할 필요도, 누군가와 겨룰 이유도 없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랜 시간 쌓인 지혜, 매 순간에 깃든 감사였다.
우리가 잃은 건 '젊음'이 아니다. 젊음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 집착이 사라니 지니까 비로소 보였다.
경쟁하지 않고도 내 속도로 가는 여유, 증명하지 않아도 내가 충분하다는 확신. 이건 20대에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선물이었다.
가을과 갱년기의 만남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있다. 예전엔 낙엽을 쓸어야 하는 귀찮은 일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안다. 잎을 떨구는 일은 포기가 아니라,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걸. 갱년기도 그렇다. 처음엔 무언가를 잃는 기분이었다. 불규칙한 몸의 리듬, 이유 없는 열감, 쉽게 피로해지는 하루. 처지는 피부, 가늘어지는 머리카락, 예전 같지 않는 체력. 뭔가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계절을 지나며 깨달았다. 이 변화는 상실이 아니라 전환이었다. 이 변화는 상실이 아니라 전환이었다.
몸이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가을의 햇살은 여름보다 덜 뜨겁지만, 그 빛은 더 깊고 오래 마음을 데운다.
갱년기의 햇살도 그렇다. 눈부시게 타오르지 않지만, 은은한 온기로 내 안을 감싼다.
힘들 때면 스스로에게 말했다."괜찮아, 천천히 가도 돼." 지금껏 충분히 빨리 달려왔다.
이제는 속도를 늧춰도 된다.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려보며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 갱년기라는 계절은 어쩌면 내게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는 자연의 신호인지도 모른다.
감사로 물드는 계절
자신이 만든 디저트를 보여주며 내가 만든 2개가 채택됐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내가 젊은 시절 그토록 바라던 인정과 성취를 이제 조카가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도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삶에는 언제나 빈자리가 있다.
이루지 못한 꿈, 가지 못한 길, 만나지 못한 사람들. 이제 나는 그 빈자리를 바라보기보다 이미 채워진 것들의 무게를 느끼고 싶다.
몬스테라 여름 내내 돌본 그것이 싱그러워 보였다. 아침에 물을 주며 확인하는 잎 내 손으로 키운 작은 생명에서 오는 기쁨이 있다.
누군가의 딸이었고, 일꾼이었다. 언제나 누군가를 위해 웃고, 참고, 양보하고, 챙겼다. 내 시간은 늘 다른 사람의 필요로 채워졌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이라도, 나 자신에게 하락하고 있다.
아무 계획 없이 하루를 보내도 괜찮다는 것.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도 이기적인 게 아니라는 것. 아침에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커피 한 잔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시간. 거창한 자기 계발이 아니어도 된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천천히 익어가는 삶
가을이 여름보다 덜 찬란하지 않듯, 갱년기도 청춘보다 덜 빛나지 않는다. 다만 빛깔이 다를 뿐이다. 초록의 여름이 눈부시다면, 가을의 황금빛은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내 아름다움은 이제 얼굴에만 있지 않다. 어려운 순간을 견뎌낸 눈빛에, 누군가를 위로할 줄 아는 마음에 내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 화장으로 만들 수 없고, 운동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시간을 견디며, 삶을 살아내며 얻어지는 빛이다.
오늘 아침,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햇살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하루를 시작했다. 커피를 내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것이 내가 찾은 수확이다.
거창한 성취나 화려한 결실이 아니라, 평범한 아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을 얻기까지 오십여 년이 걸렸지만, 이제 안다.
봄의 화사함도 좋고, 여름의 뜨거움도 좋지만 가을의 깊이만큼 마음을 울리는 계절은 없다는 것을.
지금은 가을이다.
잎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열매가 익어가는 계절. 무언가를 잃는 게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만 남기는 시간.
가장 달콤한 열매는, 천천히 익는다.
그리고 내 가을은 ,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