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점묘(東京点描)9

제1장 리쿠기엔 8경 - 시(詩)가 내려앉은 풍경, 후지시로토게(藤代峠)

by 소요유


리쿠기엔의 가장 높은 점, ‘후지시로토게(藤代峠, 등대고개)’에 오른다. 해발 35미터에 불과한 인공의 언덕이지만, 사방이 평탄한 도심 정원 안에서 이 고개는 하늘과 가장 맞닿은 성소(聖所)가 된다.후지시로'라는 이름은 야나기사와 요시야스가 태어나 자란 고향 기슈(紀州)의 명승지에서 따온 것이다.


천하를 쥔 권력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고향의 부드러운 산등성이를 그리워했을 요시야스. 흙을 쌓아 고개를 만들고 그 위에 고향의 이름을 붙인 이 곳은 살얼음 같은 에도살이를 버텨낼 수 있는 마음의 지지대였으리라. 에도 시대에는 이곳에서 멀리 후지산의 설경이 손에 잡힐 듯 보여 '후지미야마(富士見山)'라고도 불렸으니, 그에게 이 고개는 현실의 에도를 넘어 와카(和歌)의 이상향으로 향하는 창(窓)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숨을 고르며 고개 정상에 서면, 방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정원이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가 되어 발아래 펼쳐진다.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연못의 온전한 형상과 섬들의 배치가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다. 300년 전 요시야스가 88개의 점으로 엮어낸 이 정원은, 이곳에 이르러서야 낱개의 풍경이 아닌 하나의 조화로운 선율로 흐르기 시작한다.


입구에서 나를 압도했던 시다레자쿠라의 검게 뒤틀린 둥치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 배경으로 겸허히 잦아든다. 철쭉 기둥이 받치고 있던 산차야의 소박한 지붕과, 낮게 엎드려 나를 반기던 후키아게 소나무의 다정함, 그리고 신화의 비극을 품고 마주 보던 이모야마와 세야마의 작은 섬들까지. 아래에서 마주한 그 모든 분절된 풍경이 이제는 연못의 은빛 윤슬 속에 녹아들어 지극한 아취의 한 조각으로 수놓아진다.


요시야스는 이 고개 위에 올라 무엇을 사유했을까?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움의 편린들을 모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려 했던 예술적 의지가 아니었을까. 칼을 든 무사였으나 시를 사랑했던 그는, 거친 세상의 풍파를 견뎌낸 끝에 다다를 종착지가 이처럼 고요하고 조화로운 풍경이기를 간절히 기원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후지시로토게는 세상의 풍경을 아로새긴 88편의 시집을 한눈에 읽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페이지였다.


나는 이제 고개를 내려가며 정원 곳곳에 숨겨져 있던 석주와 나무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담는다. 점묘(點描)하듯 써 내려간 나의 이 기록들이 누군가의 삶에 잠시 머무는 따뜻한 정취가 되기를 소망한다. 300년 전 요시야스가 찍어놓은 점들이 오늘 나에게 시적 영감을 주었듯, 나의 문장 또한 누군가의 찰나를 붙잡는 작은 쉼표가 되기를 바란다.


멀리 도심의 빌딩 숲이 정원의 숲 너머로 아스라이 신기루처럼 걸려 있지만, 후지시로토게에서 내려다본 이 서정적인 정적은 세상의 소란함을 지우기에 충분하다. 리쿠기엔의 평온을 뒤로하고 대문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이제 막 한 권의 아름다운 시집을 덮은 독자의 그것처럼 가볍고도 충만하다.


출처: 公益財団法人東京都道路整備保全公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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