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점묘(東京点描)4

제1편 리쿠기엔3경-바람의 길목, 철쭉 기둥이 지은 쉼표 하나-쓰쓰지차야

by 소요유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 말의 리쿠기엔(六義園)은 아직 겨울의 마른 빛을 다 벗어내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그 황량함 속에 홀연히 서 있는 ‘쓰쓰지차야(つつじ茶屋, 철쭉 다실)’는 오히려 그 결핍 덕분에 더 선명한 철학의 형상으로 다가왔다.


단풍나무들이 아직 잎을 틔우지 못한 채 빈 가지로 하늘을 그리는 언덕길. 그 길 끝에 정자는 마치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고목처럼 고요히 앉아 있다. 지붕은 억새와 짚을 겹겹이 얹어 거칠고 투박하다. 훗날 가을이 깊어지면 불타오를 단풍잎들이 이 지붕 위를 수놓겠지만, 지금은 그저 숲의 앙상한 실루엣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을 뿐이다.

이 집의 진정한 주인공은 지붕을 받치고 선 기둥들이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대들보나 하늘로 곧게 뻗은 위용은 어디에도 없다. 대신 껍질만 겨우 벗겨낸 철쭉나무가 제멋대로 휜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서 있다. 100여 년이라는 성실한 시간을 견디고도 어른 팔뚝보다 가느다란 그 나무들은, 세월의 비바람에 씻겨 은회색의 고결한 빛을 띤다. 마치 마른 노인의 손등처럼 거칠지만 단단한 표면은, 인공의 자로 잰 듯한 직선보다 훨씬 깊은 생(生)의 굴곡을 증명한다. 벽체도 장식도 없는 이 빈 공간에 앉으면, 계곡의 물소리가 발밑까지 차오르고 3월의 서늘한 공기가 내 폐부로 고스란히 흘러든다. 꾸미지 않아 비로소 풍경이 주인으로 들어앉는, 지극히 투명한 쉼터다.



일본은 곧게 뻗은 삼나무와 단단한 편백나무가 지천인 나라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위엄 있는 목재로 세상을 호령할 법한 전각을 지을 수도 있었을 터다. 그런데 왜 이 거대한 낙원의 주인은 굳이 빼빼 마른 철쭉나무를 집의 뼈대로 삼았을까?


여기에는 결핍 속에서 정신의 충만함을 발견하는 ‘와비(侘)’의 미학이 서려 있다.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광활한 정원을 가꾸고서도, 그 심장부에 가장 초라한 찻집을 지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비움의 철학이다.

또한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낡아가는 것에서 숭고함을 찾는 ‘사비(寂)’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곧은 나무는 부러지기 쉽지만, 뒤틀리고 마른 철쭉나무는 척박한 바위틈을 견뎌낸 흉터 자체로 아름다움이 된다. 인간의 의지로 나무를 펴지 않고, 자연이 부여한 그 굽은 본성을 기둥으로 삼은 겸손함. 그것은 우리가 완벽이라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인위(人爲)인지를 조용히 일깨워준다.


이 이름 없는 나무 기둥들이 건네는 위로는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Every Day a Good Day)>의 한 장면과 닮아있다. 다도 스승은 서툰 제자에게 나직이 읊조린다.

"무거운 것은 가볍게 다루고, 가벼운 것은 무겁게 다루렴."

이 대사는 쓰쓰지차야의 심장과 맞닿아 있다. 집을 지탱하기엔 너무나 가벼워 보이는 철쭉 가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기둥'이라는 무거운 운명을 맡긴 그 마음. 그것은 세상이 가치 없다고 밀어낸 작고 초라한 것들을 우리 삶의 가장 소중한 중심부로 모시는 정성이다.


쓰쓰지차야의 기둥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조금 굽어 있어도 괜찮다고, 가늘고 마른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삶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고. 3월의 마른 숲을 내려오며 자문해 본다. 내 안의 결핍과 상처마저도 나라는 존재를 지탱하는 귀한 철쭉 기둥으로 받아들일 순 없을까. 비어있는 다실이 건네는 이 묵직한 고요가, 오늘을 견디는 나의 마음 한구석에 작고 단단한 쉼표 하나를 찍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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