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똑바로 차려

호기심을 더 잃기 전에

by Wiggle

"엄마, 이게 뭐야. 다 날아갔잖아. 매번 말하는데 계속 이상하게 찍고..."

사진 앨범을 확인하고 표정이 굳어진다. 엄마가 찍은 사진들은 하나같이 각도며 빛이며 엉망이다. 구도에 신경을 쓰기는커녕 기본마저 모르는 것 같다. 정확한 초점과 배경이 되는 피사체는 항상 흔들리고 노출 밝기를 조절하는 것은 아예 마음에 없나 보다. 앵글을 자유자재로 바꿔달라는 요청은 꺼내지도 못한다.


하나라도 건질 수 있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이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손가락으로 직접 하이 앵글을 맞춰드린다. 그리고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이번에는 어떤지 피드백해 줘. 마음에 들 때까지 찍을게."


이쯤이면 매번 똑같은 엄마의 말이 변명처럼 들린다. '최선'을 다 했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더 속상한 건 나는 엄마를 이쁘게 잘 찍어주는데 엄마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엄마는 환승연애에서 어떤 커플 응원해?"

"나는 응원하고 싶은 커플이 없어. 너는?"

"아니야."

"왜 ~ 넌 어떤 커플이 좋은데?"

"응원하고 싶은 커플이 없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 의미 없이."

"사람의 생각이 다 다를 수 있다고 네가 말했잖아. 엄마는 없지만 너는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물어본 거 같은데..."


오늘도 똑같다. 하려는 말이 막히고, 안 통해서 답답하고 결국엔 입을 닫는다. 서로의 생각은 늘 다른 곳을 바라보고 문장이 꼬이고 꼬여서 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다. 감정의 온도는 바닥을 뚫고 매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려니 복잡함을 넘어 통증을 느낀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일까. 엄마랑 뭔가를 하려면 계속 브레이크가 걸린다. 굴러가는 공도 엄마 손에 잡히면 걸려 넘어진다.


"최근에 외할아버지랑 얘기하다가 맞을 뻔했잖아. ㅎㅎ 3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소통이 어려운 게 정상이지. 가족끼리는 대화가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나는 더 이상하더라. 불통이 정상이고 그래서 노력해야 한다고 엄마는 생각해."


종교와 정치이야기를 하면 외할아버지의 언성은 하늘을 뚫는다. 엄마 나이에도 맞을 뻔했다고 하니 웃음이 났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 안에 숨겨진 마음을 읽으려는 자세는 바람직해 보인다. 전쟁을 겪고 가난을 피부처럼 달고 살아온 외할아버지의 인생을 가엾고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았을 텐데, 여든이 넘은 고집불통 할아버지도 엄마랑 대화할 때가 가장 솔직하고 진지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불통모드의 최고봉을 지나고 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대화의 본질은 도착점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고, '대화'라는 내비게이션은 언제나 지름길을 안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운다. 하루에도 수십 장의 사진이 갤러리에 채워지는 나와 달리 엄마의 사진첩은 아주 미세하게 변화한다. 생동감 있는 인물촬영을 못하는 이유는 능력부족이라기보다는 관심 없음의 반복이 낳은 결과물일지 모른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 세상을 이해하려는 엄마는 호기심, 이것이 예전만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신 인생이 정답인 양 새로운 것을 흡수하기 꺼려하고 나를 설득하려는 눈빛으로 조종하기 바쁘다. 엄마가 외할아버지의 신발을 신고 걷듯이 나도 엄마의 신발을 신고 엄마가 걸어온 길을 걷는다. 나와 엄마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의 대화가 설득이 아닌 이해와 존중의 과정을 돕는 내비게이션이 되길 희망한다면 욕심일까. 오늘 밤은 욕심꾸러기가 되고 싶다.


이 글은 딸의 입장에서 써본 엄마의 고백문이다. 쓰지 않았으면 몰랐을 아이의 말에 진심으로 경청하지 않는 나는 보았고,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어린 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타인에게는 호기심이라는 렌즈가 불편하지 않으면서 왜 우리 아이에게는 뭐든 주입하려고 애쓰는지 각별히 노력해야 할 지점을 사색하고 쓰기로 정리할 수 있어 다행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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