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으면 평화롭다고
"4퍼센트 정도의 확률입니다."
2월 19일, 일주일 전 촬영한 CT 결과를 듣기 위해 서울대학교 호흡기내과에 갔어.
보통의 사람(비흡연자를 말해)과 달리 아빠의 폐는 작은 결절들이 다수 보였고, 어떤 것은 있다가 사라지고 또 어떤 것은 작아지거나 커진다는 설명을 들었는데, 이번에 발견된 결절 하나가 문제라는 거야. 20년 가까이 담배를 가까이 한 아빠는 암 가능성이 4%라는 말을 하기 전까진 예전과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했지.
"암일 확률이 4%정도 됩니다. 3개월 후에 CT 촬영하시고 그때 뵙겠습니다."
일상에서 겪는 우발적인 사건과 너무 다른 느낌. 이런 걸 뭘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가 멈추더라.
"그렇다면 암이 아닐 확률은 96%죠?"
되물어볼 수 있었지만, 아무 말도 못했어. 진공상태에 고통과 불안이 가득찬 느낌이었어. 교수님 앞에서 질문이 많던 엄마도 이 순간만큼은 고단하고 쓸쓸한채 입을 열지 않았지.
충격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순간, 슬픔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고, 질병 너머 우리를 지배하는 뭔가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고 할까.
다음 검사 일정은 5월 20일이야. 본관 1층에서 폐 기능검사를 하고, 영상의학과에서 가슴 PA를 검사해. 어린이병원 1층 소아영상의학과에서 CT 촬영을 한 다음에 일주일 뒤 진료 일정을 잡고 집으로 왔어.
이날 밤, 불을 끄고 누웠는데 눈물이 쏟아지더라.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목격하고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두려웠어. 현실을 똑바로 볼수록 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정신을 차릴수록 밤은 너무 길었어.
눈물의 반 이상은 나를 보호하는 '자기 보호 작용'이었다는 것은 이틀이 지나서 알게 되었어. 내 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가 살고 있고, 순식간에 아빠 없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집어삼키는데 속수무책 당해낼 수가 없었어.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 내면에는 유아기에 형성된 사랑의 플롯, 갈등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작동한다고 김형경 작가의 글「좋은 이별,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에서 읽었어. 아빠 없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아 일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고, 슬프고 우울한 감정을 어떻게 나 혼자 감당해야 할지 두렵기 시작했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지 머리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다음 날 안부전화를 드렸는데 아빠도 나처럼 잠들기 힘들었다고 하셨어. 그래! 96%의 희망의 가능성을 믿고, 알 수 없는 미래를 추측하며 슬퍼하지 않기로 했어. 우리는 우리 각자의 힘으로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일상을 살아가기로 했고, 그렇게 수많은 시간을 반복하며 잘 지낼 것을 믿기로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