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한국사 (5)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입니다.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도 좋아하지만 묘비명 또한 제 마음에 쏙 듭니다.
묘비명은 자기 인생을 정리하여 카피로 뽑아낸 것입니다.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문장처럼 유명한 묘비명이 많습니다.
꼭 죽을 때가 아니더라도 자기 삶을 돌아보고 한 줄 카피를 뽑는 일은 꽤 유익합니다.
인생이란 게 앞만 보면서 살다 보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입니다. 그럴 때 묘비명을 쓰는 마음가짐으로 인생 카피를 뽑아보세요. 흐트러진 삶을 정비하고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는 길잡이가 된답니다.
낭독 >> 이황, 자작 묘비명
“나면서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서는 병치레가 많았다(生而大癡 壯而多疾). / 중간에 학문을 즐기게 되었고 뒤늦게 벼슬길에 들어섰다(中何嗜學 晩何叨爵). / 학문은 구해도 더욱 아득하고 벼슬은 사양해도 더욱 얽혔다(學求愈邈 爵辭愈嬰). / 조정에 나아가 헛디디니 물러나 은거하기로 마음먹었다(進行之跲 退藏之貞). / 나라의 은혜 생각하면 심히 부끄럽지만 진실로 성현의 말씀이 두려웠다(深慚國恩 亶畏聖言). / 산은 높디높고 물은 끊임없이 흐른다(有山嶷嶷 有水源源). / 관복을 벗어던지고 가벼워지니 뭇사람들의 비방도 사라졌다(婆娑初服 脫略衆訕). / 나의 회포 여기서 막히니 누가 내 패옥(학문)을 즐겨하리오(我懷伊阻 我佩誰玩). / 옛사람을 생각하니 실로 이런 나의 마음을 먼저 얻었구나(我思古人 實獲我心). / 앞으로 올 세상에서 어찌 오늘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겠는가(寧知來世 不獲今兮). / 근심 속에도 즐거움이 있었고, 즐거움 속에도 근심이 있었다(憂中有樂 樂中有憂). / 조화를 따라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구하겠는가(乘化歸盡 復何求兮).”
조선을 도덕의 나라로 이끈 퇴계 이황(1501~1570)의 묘비명입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 성리학의 큰 스승이라 하여 묘비명을 거창하게 꾸밀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애를 직접 4언, 24구, 96자로 압축해 작은 비석에 남기게 했습니다. 소탈하면서도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묘비명입니다.
그 가운데 “근심 속에도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속에도 근심이 있다”라는 구절이 저는 무척 와닿았습니다. 살아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나이 사십 언저리에 큰 변화를 맞았습니다. 그 무렵 훌륭한 분들의 추천을 받아 정부 기관과 유명 대기업의 경력직 면접을 봤는데 두 군데 다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따 놓은 당상인 줄 알았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추천한 분들께 면목이 없었습니다. 쪽팔리고 속상해서 한동안 집 밖에 나다니지 않았습니다. 백수가 되어 칩거에 들어간 겁니다.
누가 봐도 근심스러운 상황이었는데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대학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미인과 눈이 맞았습니다. 지금 제 아내입니다. 결혼하고 곧장 아들까지 얻었죠.
동창들은 저보고 팔자 고쳤다고 합니다. 특별채용 면접에서 연달아 떨어지지 않았으면 잡을 수 없었던 행운입니다. 정말로 근심 가운데 낙(樂)이 있었습니다.
즐거움 속에도 근심이 있습니다. 동서양의 영웅 신화를 보면 괴물을 물리치고 칭송을 받던 영웅이 오만해진 나머지 그 힘을 남용해 파멸을 자초하는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돼 온 사례들이 상징 체계를 이룬 것입니다.
성공은 파멸의 출발선이기도 합니다. 잘 나갈수록 호랑이 꼬리를 밟은 듯이, 봄날의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삼가야죠. 퇴계 이황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평이하고 명백한 것으로써 ‘도(道)’를 삼았지만 사람들이 미처 알 수 없는 묘리가 있었고, 겸허하고 사양하는 것으로써 ‘덕(德)’을 삼았지만 사람들이 어길 수 없는 실상이 있었다.”
퇴계의 제자 김성일이 바라본 스승의 진면목입니다. 그 평이하고 명백한 도와 겸허하고 사양하는 덕이 조선 선비들이 추구해야 할 도덕이 되었습니다.
퇴계는 늘 ‘평이하고 명백한 도’에 힘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평범한 일상사에서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황급한 일이 생겨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또 색다르거나 파격적인 주장을 배척했습니다. 남의 이목을 끌려는 욕심의 산물이라고 본 것입니다.
도학의 또 다른 스승이자 동갑내기인 남명 조식과 대립각을 세운 것도 그래서입니다. 남명이 을묘사직소에서 대비 문정왕후를 ‘궁중의 일개 과부’로 과격하게 깎아내린 걸 퇴계는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황이 조식을 ‘일개 기이한 선비’라고 비난했던 건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조식도 만만치 않았죠. ‘허위의 우두머리’라며 이황을 비웃었으니까요.
‘겸허하고 사양하는 덕’은 후학들을 대하는 자세에 잘 드러났습니다.
퇴계는 제자의 나이가 어려도 함부로 하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선비를 맞이하거나 전송할 때는 반드시 섬돌 아래에 내려와서 했습니다. 멀리서 찾아온 문인은 비록 거친 밥에 나물국이라도 함께 숟가락을 떴습니다. 스승을 자처하지 않고 학우의 예를 다한 겁니다.
그가 조선 선비들의 큰 스승으로 자리매김한 데는 나이와 지위와 지역을 뛰어넘은 소통의 힘이 컸습니다.
특히 후학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에서 퇴계는 아들뻘인 기대승의 견해를 너그럽게 포용하고 성심성의껏 답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젊은 선비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이황은 주자학의 권능을 높이고 도덕정치를 널리 설파하여 사림이 집권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동방의 주자’로 추앙받았지만 일신의 영달을 쫓지는 않았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저 평범한 일상사에 정성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1570년 음력 12월 8일 아침 퇴계는 누워있던 침상을 정돈시키고 평소 아끼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한 다음, 일으켜 달라고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영면했습니다.
“조화를 따라 사라짐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그가 생전에 지은 묘비명의 끝구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깊은 여운이 흘러나오지 않습니까? 퇴계 철학의 정수를 한 구절에 담아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은 것입니다.
천원 권 지폐 뒷면에는 겸재 정선의 그림 <계상정거도>가 실려 있습니다. 도산서원 주위의 풍광을 담은 진경산수 속에 퇴계 선생이 고요히 서당에 앉아 책을 읽고 있네요.
이황은 인간의 마음속에 우주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우주를 품은 어마어마한 존재입니다. 가르침을 새겨 구방심(求放心),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