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먹여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낭독한국사 (4)

by 권경률

‘평생 친구’는 인간관계의 꽃입니다. 평생 친구는 단순히 평생 가는 친구가 아닙니다. 얼마나 오래됐느냐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함께했느냐입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 기꺼이 곁을 내주고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친구가 평생 친구입니다.


우리 역사에도 평생 친구의 좋은 예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저는 이 분들이 참 멋진 우정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이거든요. 그들은 어떻게 평생의 우정을 가꾸고 함께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낭독 >> 이덕무, 간본 <아정유고> ‘이서구에게 주는 편지’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맹자> 한 질을 돈 2백 닢에 팔아버렸소. 그 돈으로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泠齋, 유득공의 호)에게 달려가 자랑했다오. 그런데 이 친구도 굶주린 지 오랜 터라, 내 말을 듣고는 즉시 <좌씨전>을 팔아 남은 돈으로 술을 사더군요. 이는 자여씨(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먹여주고 좌씨(좌구명)가 손수 술을 따라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청장관(靑莊館) 이덕무(1741~1793)는 유득공(1748~1807)과 박제가(1750~1805)보다 나이가 꽤 많았지만, 허물없이 친구로 지냈습니다. 세 사람은 한양 도성의 백탑 근처에 모여 살던 서얼 문인들이었습니다.


백탑은 현재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2호)을 말합니다. 원각사는 조선 세조가 도성 안에 창건한 사찰이었으나 연산군 때 폐사되어 18세기에는 탑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탑이 멀리서 보면 하얗게 빛나 ‘백탑(白塔)’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백탑 인근 동네를 ‘대사동’ 또는 ‘탑골’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양반, 중인 서리와 함께 서얼이 많이 살던 동네였죠.


조선에선 양반 핏줄이라도 서얼(庶孼), 곧 첩의 자식이나 그 후손들은 벼슬길을 막았습니다. 학식과 재능이 있어도 나라의 녹을 먹을 수 없습니다. 농사지으려고 해도 경작할 땅이 없고, 장사하려고 하면 본가에서 체통 상한다고 난리 칩니다.


이덕무의 별명은 ‘간서치(看書癡)’, 책만 보는 바보였습니다.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삼고, 못 본 책을 보면 환장하는 광적인 독서가였죠.


그는 스스로 ‘매미 허물’이나 ‘귤 껍데기’ 같다고 묘사한 작은 집에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집에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날이 띄엄띄엄했습니다. 배고픔을 독서로 달래는 고달픈 삶이었죠. 하지만 외롭지는 않았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덕무는 이웃집 양반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식 없는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유자(儒者)의 경전인 <맹자>를 팔아 주린 배를 채웠다는 것입니다. 간서치에게는 무척 괴로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 친구의 마음을 헤아린 유득공입니다. 그는 <춘추좌씨전>을 술로 바꿔 이덕무에게 권합니다. 삶의 곤궁함과 괴로움을 나누고 해학으로 승화하는 ‘찐’우정입니다.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먹여주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이덕무와 유득공의 해학에는 역설적으로 자조와 서글픔이 배어 있습니다. 비극적인 삶의 조건을 희극적으로 풀어내는 블랙코미디입니다. 세상의 모순과 삶의 부조리 속에서도 서로를 다독이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럼 이덕무와 박제가는 어땠을까요?


이덕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반면 박제가는 땅딸막하고 다부진 체구였습니다. 성품도 이덕무가 섬세하고 신중하다면 박제가는 고집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습니다. 나이도 9살이나 차이가 났습니다.


그럼에도 이덕무는 “너무 마음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다”고 할 만큼 박제가를 좋아했습니다. 박제가도 한겨울 밤에 해금 연주를 듣다가 문득 이덕무가 그리워 눈길을 헤치고 찾아가곤 했습니다.


낭독 >> 이덕무, <선귤당농소>


“마음에 맞는 계절에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 맞는 시문(詩文)을 읽으면, 이는 지극한 즐거움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지극히 드문 것이어서 일생을 통틀어도 모두 몇 번에 불과하다.”


‘지락(至樂)’, 지극한 즐거움에 대한 청장관의 생각입니다. 그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지락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우정을 키웠습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그리고 이웃집 양반 이서구는 ‘사가시인(四家詩人)’으로 불렸습니다. 시풍(詩風)을 일으켜 세상의 명성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의 시집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은 1776년 북경 문단에 알려지며 청나라 문인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개혁군주 정조는 그들의 학식과 재능을 알아보았습니다. 왕은 즉위 이듬해(1777) ‘서얼허통절목’을 공표해 서얼의 문관 임용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1779년에는 서얼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그리고 서이수를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채용했습니다.


규장각은 정조가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고 통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개혁의 심장부였습니다. 검서관은 왕명을 받들어 도서와 문서를 찬술·교정·간행하고, 국내외 주요 서적을 수집·보관하며, 문예 정책을 보좌·자문하는 일을 맡은 임금의 측근이었습니다.


탑골 출신 서얼 문인들이 개혁의 편집자가 되어 정조 재위기의 문예부흥을 이끈 것입니다. 불우한 삶을 해학으로 승화하며 서로를 다독이던 평생지기들이 함께 성장하여 뜻을 펼친 것입니다. 시대의 어둠을 뚫고 끝내 세상에 빛을 발한 우정의 힘입니다.


당신에게는 평생 친구가 있습니까? 그런 벗을 둘 기회는 지극히 드뭅니다. 학창 시절에 친하게 지낸 친구들도 졸업하고 10년이 지나면 연락하지 않는 이가 절반이 넘습니다. 남은 친구들도 절반 이상은 그저 연락처를 유지하는 정도의 친분에 그칩니다.


그러니 힘들고 외로울 때 기꺼이 곁을 내주고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친구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운 좋게도 제게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메마른 인생의 단비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에게 넌 평생 친구야,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눈빛과 태도로 경의를 표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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