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은 어떻게 숙종의 마음을 훔쳤을까?

논픽션 책략과 술수 (1)

by 권경률

사랑은 사소한 개인사 같지만, 알고 보면 대단히 사회적인 관심사다. 세상을 뒤집고 역사를 바꾸는 극적인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랑을 얻기 위해 책략을 쓰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숙종과 장희빈, 인현왕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뜨거운 사랑과 잔인한 배신은 가장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권력의 비정함에 눈물 짓는 인간의 운명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 희로애락의 표정 속에 감춰진 책략을 짚어보자.


왕비가 죽자 궁녀를 침전에 불러들인 임금


장희빈의 본명은 ‘옥정(玉貞)’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여성의 이름은 기록이 별로 없어서 알기 어렵거나 낭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장희빈의 이름은 출처가 분명하고 비교적 믿을 만하다.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에 나오기 때문이다.


1680년 10월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스무 살 임금 숙종은 두 살 연상의 궁녀 ‘장가 옥정’을 침전으로 불러들였다. 옥정은 대왕대비 장렬왕후(인조의 계비)를 받들던 지밀나인으로 실록에 얼굴이 아름다웠다는 기사가 나올 만큼 미모가 출중했다.


숙종의 어머니인 왕대비 명성왕후(현종의 정비)는 승은 궁녀가 누군지 알아보고는 질색했다. 장옥정의 당숙이 바로 조선의 대부호 장현이었기 때문이다.


장현은 과거 효종의 신임을 받던 역관이었는데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 남인과 종친들에게 정치자금을 댔다. 그의 종질녀가 임금의 승은을 입었다면 우연일 리가 없다.


서인 집안 출신으로 당색(黨色)이 강했던 왕대비는 저들이 미인계로 임금을 현혹한 것이라고 여겨 노여워했다. 만약 옥정이 후궁 첩지를 받고 왕자라도 낳으면 큰일이다. 왕실의 후사 문제로 남인과 종친들이 서인 정권을 흔들 가능성이 컸다.


대왕대비 문고리 잡고 국왕의 마음을 훔치다


조선 시대에 궁녀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왕실의 일원이 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장옥정은 어떤 나인이었을까? 숙종을 만나기 전까지 궁에서 무엇을 했을까?


궁녀는 구중궁궐, 국왕 일족이 거처하는 액정(掖庭)에서 시중을 들고 일상사를 도맡은 여인들이다. 조선에서는 궁녀를 ‘나인(內人)’이라고 불렀다. 오래 근무하면 ‘상궁(尙宮)’이 된다. 내명부 품계도 받았는데 상궁은 4~5품, 나인은 7~9품이었다.


액정에는 국왕, 중전, 대비, 세자, 세자빈, 후궁 등의 처소가 있었다. 처소마다 궁녀들이 배치되었는데, 처소의 주인이 뽑을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회사 공채가 아니라 부서별 특채였다.


17세기 궁녀 가운데는 공노비 출신이 많았다. 예컨대 대전과 동궁에는 왕실 재산을 관장하는 내수사의 여종들이 큰 줄기를 이뤘다. 또 왕비와 세자빈의 처소에는 ‘본방나인’이라 하여 친정에서 데려온 몸종과 유모들이 근무하기도 했다.


장옥정은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을 지낸 중인 집안 출신이었다. 당시에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인 궁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801년 공노비 해방 이후였다.


장현이 종질녀 옥정을 궁에 들인 데는 필시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왕대비의 짐작대로 미인계였을 수도 있지만 정보 수집을 노렸을 가능성도 크다. 액정의 귀중한 정보는 대부호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친딸도 궁녀로 집어넣었다.


옥정은 어린 나이에 입궁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를 땋아 올릴 무렵 궁에 들어왔다고 한다. (훗날 희빈을 왕비로 삼는다는 숙종의 전지에 나온 말이다.) 장옥정은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당숙 장현의 보살핌을 받았다. 궁녀로 입궁하기 딱 좋은 나이였다.


궁녀는 ‘왕의 여자’다. 그렇다고 모든 궁녀가 임금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뜻은 아니다.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궁녀의 업무는 크게 지밀(시중), 침방(의상), 수방(자수), 소주방(음식), 생것방(다례), 세수간(목욕), 세답방(세탁) 등으로 나뉘었다.


실세는 지밀나인이었다. 하인의 힘은 주인과의 거리에서 나온다. 주인 곁에서 문고리를 잡아야 실세다. 지밀나인은 주인의 시중을 들고 심기까지 관리하는 측근들이었다.


장옥정은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지밀나인이었다.


장렬왕후는 인조의 계비로 들어와 자손도 없이 외롭게 늙어가는 여인이었다. 아무 실권도 없는 뒷방 늙은이지만 임금과 세자가 반드시 문안 인사를 챙겨야 하는 궁중의 큰 어른이다. 숙종은 세자 시절부터 대왕대비의 처소에 드나들며 예쁜 나인을 마음에 뒀을 것이다.


궁녀가 왕실의 일원으로 벼락출세할 기회는 바로 이 문안 인사의 동선에서 나왔다.


세자의 경우 국왕의 처소보다 대비들의 처소에서 나인을 점찍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궁녀는 말 그대로 ‘왕의 여자’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하지만 어머니나 할머니의 나인은 달랐다. 사춘기에 접어들고 이성에 눈뜨면 그 여인들이 밤마다 어른거리지 않았을까?


승은 궁녀를 궁밖으로 쫓아내면 생기는 일


숙종이 장옥정에게 푹 빠지자 왕대비 명성왕후는 그녀를 궁 밖으로 내치고 계비 간택령을 내리게 했다. 그리하여 1681년 5월 서인 민유중의 딸이 15세 나이로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되었다. 인현왕후 민씨다.


하지만 승은 궁녀를 출궁시킨 것은 대비의 실수였다. 오빠 장희재의 집에 거처하는 옥정을 바라보고 남인과 종친 세력이 다시 결집했다. 정권을 빼앗기고 지리멸렬했던 그들에게 재기의 구심점을 만들어준 셈이다.


1683년 12월 왕대비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숙종과 장옥정의 사랑을 가로막던 걸림돌이 사라진 것이다.


대비의 삼년상이 끝나자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임금에게 “옥정을 다시 입궁시켜 후사를 얻으시라”고 권유했다. 종친과 남인들이 입김을 불어 넣은 것이다.


1686년 봄 28세의 나이로 궁에 돌아온 장옥정을 숙종은 열정적으로 맞이했다. 그리움이 컸던 만큼 사랑도 뜨겁게 타올랐다.


“장씨를 숙원(淑媛, 종4품 후궁)으로 삼았다. 어느 날 임금이 희롱하려 하자 장씨가 달아나 내전으로 뛰어들었다.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이는 중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창경궁은 청춘남녀의 놀이터였다. 임금이 수작을 걸면 옥정은 나 잡아 봐라, 하면서 궁을 헤집고 다녔다. 인현왕후에게 달려가 남편 좀 말려달라고 짐짓 읍소하기도 했다. 사랑을 못 받는 어린 왕비를 약 올리고 조롱한 것이다.


숙종은 사랑에 눈이 멀었고, 옥정은 눈에 뵈는 게 없었고, 왕비는 이를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임금은 창경궁에 아름다운 별당을 짓도록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특별한 처소, 취선당(就善堂)이었다. 인현왕후는 속절없이 뒷전으로 밀려났다.


명성왕후는 생전에 아들 숙종에 대해 “기뻐하고 노하는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서 만약 꾐을 받게 되면 나라에 화가 닥칠 것”이라고 걱정한 바 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 나랏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숙종의 사랑이 그러했다.


바야흐로 피의 숙청과 왕비 교체라는 태풍이 조선을 덮쳐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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