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롓날 새벽, 세오는 석연치 않은 꿈을 떨치고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삼족오가 까마귀 무리를 이끌고 수평선 위를 비행하는데 하늘의 해가 검붉게 변하며 의문의 방울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삼족오를 에워싼 까마귀들이 날개를 접고 바다로 떨어지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방울 소리는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놀란 마음을 달래면서 그 심상을 되짚어보았다. 늘 그랬듯이 심상 속에서 계시의 씨앗을 찾는다.
방울을 울리는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바다 건너에서 부르는 소리인 건 확실하다. 태고의 심연에서 뭔가 꿈틀꿈틀 기어 나와 연오에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검붉은 해와 까마귀 떼의 추락은 아마도 어둠이 들이닥쳐 연오의 사람들을 해칠 것이라는 계시가 아닐까.
이윽고 먼동이 트고 얇고 고운 비단 창이 서서히 옥색으로 물들었다. 세오는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며 생각의 갈피를 잡아나갔다.
천군 준오는 뒷마당에서 새벽이슬에 젖은 채로 산을 내려온 전사들을 맞이했다. 수비대장 활보가 의식 참가 명목으로 천군에게 충성하는 병력을 추려 보내준 것이다.
전사들은 며칠 전 왜의 천반선 상단이 갖고 온 곡옥을 하나씩 받아쥐고 맡은 바 임무를 숙지했다. 준오는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맞잡으며 안부를 묻고 사담을 나눴다.
지난 10년 간 일군 천군의 무력이다. 2백여 명의 전사가 준오에게 넘어왔다. 이 병력으로 무슨 일인들 못할까. 준오의 광대가 승천하며 득의에 찬 미소가 절로 나왔다.
어흠, 하고 장로들이 쪽문을 지나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까마귀철막의 야철장 무쇠 할배를 제외하고 네 사람이 천군에게 붙었다.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짓고 점잖게 걸어들어왔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오랜 세월 부족을 이끌어온 마루치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날이다. 장로들에게는 야철과 농사, 산림과 어로의 이권을 부락별로 다시 나누는 날이기도 하다.
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드는 광경을 준오는 흡족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혼례와 계승식은 큰까막골의 이목을 한데 모으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그가 진짜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자신의 마루치 추대식이요, 자기 시대의 출정식이다.
몽돌의 아내 달래 부인은 천군당 부엌에 들렀다가 뒷마당을 내다보고 기겁했다.
달래는 치소에서 술과 음식을 바리바리 챙겨 꼭두새벽에 읍성 안으로 들어왔다. 천군당 마님을 만나 부엌일도 살피고 혼례 준비도 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천군당 분위기는 생각했던 것과 딴판이었다. 아낙네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딴 데 정신 팔린 남정네들만 득실거렸다. 혼례를 준비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부엌에서 뒷마당 쪽을 보는 순간 달래 부인은 알아차렸다. 무장을 한 전사들이 대오를 이루었고 준오가 그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부인의 육감이 소리쳤다.
“연오의 목숨이 위험하다!”
달래는 술과 음식을 내려놓고 황급히 부엌을 빠져나왔다. 얼른 치소로 돌아가서 알려야 한다. 혼례 준비는 없고 무장한 전사들이 우글거린다는 걸 알려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나 천군당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몽돌의 아내를 보았다는 귀띔을 받고 준오가 잡아 오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천군의 수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자 달래 부인은 안쪽의 내문으로 들어가 별당에 몸을 숨겼다. 바깥의 어수선한 분위기와는 달리 별당은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달래는 천군당을 빠져나가야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발만 동동 굴렸다. 이때 별당의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리며 세오가 나왔다. 이곳은 그녀의 거처였다.
“아버님이 그예…….”
달래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세오는 낯빛을 흐리며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갈아입고 눈앞에 버젓이 등장한 것이다.
어쨌든 연오를 구하는 게 먼저다. 그녀는 부인의 손을 잡고 별당을 나섰다. 안채를 지나 사뿐사뿐 걸어가더니 벽돌로 쌓은 담장 앞에 선다.
세오가 벽돌 세 개를 차례로 누르자 담장이 돌아가며 입구가 나타났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니 밀실이었다. 준오가 사로국에서 온 손님들을 몰래 만나는 곳이다.
천군의 딸은 밀실을 가로질러 맞은편 통로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어둠 속을 더듬어 한 식경 정도 나아가자 어슴푸레한 빛이 비쳤다. 그리로 나가보니 읍성 밖이다.
달래 부인이 고개를 돌려 애틋한 눈길로 세오를 바라보았다. 축복받아야 할 혼사가 아비의 탐욕으로 깨졌다. 이 아이의 운명은 어찌 될까?
세오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부인을 마주보며 생긋 웃기만 했다. 밭두렁에 피어난 하얀 찔레꽃 무리가 한들거리며 진한 향기를 품어냈다.
두 사람은 들판으로 달려 나갔다. 결연한 눈빛, 한마음이었다. 일각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가슴으로 낳은 아들을, 적승으로 묶은 정인을 구해야 한다.
치소에서는 신행길 채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몽돌이 의장과 깃발을 점검하며 대열을 맞추고 있었다. 신바람 난 대장장이들로 마당이 떠들썩했다.
달래 부인이 사립문을 왈칵 열고 뛰어들자 모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이어서 세오가 마당에 들어섰다. 몽돌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뭔가 잘못됐다.
예복을 입은 새신랑이 문을 열고 나오다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세오는 왈칵 눈물을 터뜨리며 정인에게 달려가 안겼다.
연오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줬다. 품속에 있는 세오의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연오야, 미안해. 어서 도망가!”
그 시각, 귀신탈을 쓴 무시무시한 전사들이 구름산을 넘어 까마귀철막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사로국 최강군단 두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