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치 암살과 또 다른 음모

by 권경률

석벌휴와 친분을 튼 준오는 사로국 신궁에 드나들며 요인들과 어울렸다.


큰까막골에서는 천군이 서라벌과 야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루치의 치소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사로국과 선을 긋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마루치를 천군이 거스른다는 것이었다.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자 금오가 준오를 불러들였다.

“세간에 말들이 많네. 자네가 서라벌과 손잡았다는 걸세. 사실이 아니겠지만 이런 오해가 굳어지면 사실처럼 보일 테지. 자중하는 게 좋겠네.”


준오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삐딱하게 받아쳤다.

“무조건 사로국을 적대하는 게 우리 근오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금오는 죽마고우였던 천군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누가 적대한다는 말인가? 내 뜻을 곡해하지 말게나.”


마루치는 친구가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지만 준오는 뾰족한 말을 이어갔다.

“큰까막골을 보존하려면 화전(和戰) 양면책을 구사하는 게 좋네. 한 손으로는 칼을 잡고 싸우더라도, 다른 손은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이 강국을 상대하는 지혜일세.”


얼음장같이 차가운 준오의 태도에도 금오는 실망하지 않고 거듭 당부했다.

“저들은 까마귀철막을 손에 넣으려고 하네. 어정쩡하게 상대하다가는 다른 부족들처럼 잡아먹히고 말 걸세. 지금은 선을 그어야 할 때야. 부디 내 뜻을 따라주게.”


천군이 볼 때 마루치는 너무도 순진했다. 강성한 사로국에 정면으로 맞서 국력이 약한 근오지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또 삼족오 철정은 삼한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지만 외국 상인들과 거래하여 이득을 취하고 부를 쌓을 줄도 모른다.


큰까막골을 번성하게 하고 부족민을 먹여 살리려면 자신이 마루치가 되어 다스려야 한다고 준오는 믿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는 권력욕은 자기 최면 속에서 부족을 위한 고뇌와 결단으로 포장되었다. 무능력한 금오는 제거돼야 마땅하다.


준오는 사로국 대신관 석벌휴와 내통하여 마루치 암살 음모를 꾸몄다.


어린 연오와 세오가 처음 만날 날 천군은 뒷산에 기도하러 가서 은밀히 구름산 요새의 전사 활보를 만났다.


활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활 솜씨가 뛰어난 자였다. 원래 요새 수비대장이었으나 술 취해서 부하들을 두들겨 패는 바람에 마루치에게 혼쭐이 나고 대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이에게 마루치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천군은 꿰뚫어 보았다. 이에 대장 복귀와 어촌의 이권을 약속하며 감언이설로 활보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광대싸리와 청석으로 화살을 만들고 협죽도에서 짜낸 독을 발라 구름산 골짜기로 향했다. 사냥으로 독화살을 시험해 보고 마루치에게 활을 쏠 지점을 물색했다.


한편 사로국 대신관 석벌휴는 일성이사금을 구워삶아 근오지에 터무니없는 공물을 요구하게 했다.


마루치가 거부하자 군사를 일으켰는데 최정예 군단 두두리를 빼고 속국에서 차출한 병력을 앞장세웠다. 그러고는 호위무사 귀섬을 보내 군의 이동 경로를 준오에게 알려줬다.


천군은 사로국 군대를 맞아 싸우기로 결정한 마루치에게 구름산 골짜기 매복 작전을 제안했다. 마루치 금오는 고심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준오가 예측한 적군 이동 경로는 서라벌에 심어둔 세작의 보고와 일치했다. 구름산 골짜기에 매복한다면 적의 예봉을 꺾고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아울러 천군이자 죽마고우인 준오에게 신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랜 벗과의 불화를 씻고 합심하여 큰까막골을 잘 다스리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우정을 소중히 여긴 금오와 달리 준오는 시기심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기어이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다.


10년 전 구름산 골짜기에서 근오지 전사들은 사로국 군대를 격파했지만 그들은 속국에서 데려온 오합지졸들이었다. 승리에 들떠 방심하고 있던 마루치의 목을 관통한 것은 수풀에 숨어서 쏜 활보의 독화살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금오가 치소에 실려와 숨을 거두는 동안 천군 준오는 미리 준비해 둔 마루치 유고 대책을 가지고 장로들을 한 사람씩 만나 동의를 얻어냈다.


마침내 준오는 후계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근오지의 통치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세력을 키우고 민심을 얻어 마루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지난 10년 간 사로국과 잘 지내고 삼족오 철정 또한 불티나게 팔려 큰까막골은 전에 없이 평안하고 번성했다. 임시 군장으로서 장로회를 장악했고 전사들도 대부분 그를 따랐다. 준오의 야망은 머지않아 이뤄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둘러선 안 된다. 권력의 승계는 순리대로 하는 것이 좋다. 명분을 잃게 되면 후환이 생기기 마련이다. 입지가 불안해져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준오는 비결을 얻지 못한 후계자에게 압박을 가해 스스로 물러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서 추대를 통해 마루치 자리를 승계하는 게 가장 모양이 좋다.


문제는 연오가 의외로 강단 있게 버틴다는 것이었다. 금오의 유업을 지키려는 몽돌 일파와 대장장이들도 만만치 않다. 철과 불을 다루는 자들이라 억세고 폭발력이 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코다칠 게 뻔하였다.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손에 피까지 묻혀가며 어렵사리 얻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는 없다.


가장 확실한 승부수는 무엇일까? 준오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외부의 힘을 빌려 후환을 싹 도려내고 뒷일을 잘 수습하여 추대를 받으면 될 일이다.


연초에 장로회를 움직여 연오와 세오의 혼례와 마루치 계승식을 준비하도록 한 것은 그 첫걸음이었다.


사흘 후면 마루치 후계자와 천군의 딸이 읍성에서 혼례를 올린다. 곧이어 10년 간 공석이었던 마루치의 계승식도 열린다.


부족의 큰 경사다. 구름산 요새의 전사들도 최소 인원만 남기고 참석하게 할 수 있다. 활보가 재량껏 수비 병력을 뺀다는 말이다.


그 공백을 틈타 사로국 군대가 치고 들어와 까마귀철막을 친다. 대신관 석벌휴가 최강군단 두두리를 보낼 것이다.


연오가 마루치의 치소에서 청사초롱을 앞세우고 신행길에 오르기 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 연오와 몽돌 일파를 척살하여 금오가 남긴 화근을 단번에 잘라내리라.


천군 준오는 읍성에서 의식을 준비하다가 급보가 들어오면 전사들을 이끌고 나가 반격할 것이다. 두두리는 싸우는 척하다가 퇴각하고 천군은 근오지를 지켜낸 영웅이 된다.


이것이 준오가 세워둔 책략이다. 계획대로 된다면 그는 정당한 자격을 갖추고 마루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짜릿한 전율이 준오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런 천군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귀섬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돌아가서 주인님께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전한 세오 아가씨 건은 어떻게 말씀 올릴까요?”


준오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대신관의 뜻대로 하겠네. 일이 잘 끝나면 내 딸아이는 지밀 공자의 배필이 될 걸세.”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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