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관을 쓰고 임금이 된 연오 (1부 끝)

by 권경률

연오와 하루카는 아차포의 머리를 주머니에 담아 산채로 돌아갔다.


산채에서는 에미시 전사들과 이즈모 결사대가 한 차례 격전을 치르고 나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수적으론 에미시 쪽이 훨씬 많았지만 우타리가 감금된 것을 알고 족장의 수하들이 물러서는 바람에 양측이 팽팽한 상황이었다.


“싸움을 멈추시오!”


낮고 굵은 음성이 산채에 울려 퍼졌다. 대치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벽 여명을 뚫고 연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침노을에 벌겋게 물든 하늘이 신령한 후광을 발하고 있었다. 낮게 드리운 구름은 마치 그를 따르는 군대처럼 보였다. 여기저기서 경탄이 터져 나오며 산채가 술렁거렸다.


연오는 하루카의 안내를 받아 족장의 장막 곁에 서있는 당나무 아래로 나아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에미시 부족의 당나무는 150년 전 북해도에서 온 선조들이 큰산에 산채를 세울 때 산꼭대기에서 옮겨 심은 박달나무다.


굳세고 단단한 회갈색 몸통을 거칠게 갈라진 껍질이 덮고 있고, 뿌리는 땅 위로 드러나 돌과 흙을 움켜쥔 채 서로 얽혀 있다. 키는 크지 않으나 가지가 옆으로 뻗어 부족을 감싸는 모습이다.


연오가 잎을 떨구고 벌거벗은 당나무 앞에 서자, 하루카는 주머니에서 아차포의 머리를 끄집어내 번쩍 치켜들었다.


“주술사는 이미 죽었다. 배신자들은 무릎을 꿇어라. 저항하는 자들은 연오 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에미시 장로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반란을 이끈 쿠아리를 쳐다봤다.


물러나 있던 족장의 수하들은 하루카의 주위로 모여들었고, 장로 측 전사들은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았다.


쿠아리는 야망이 크지만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이미 판세가 기운 이상 무의미한 저항은 이득이 되지 않음을 잘 알았다.


“우리가 졌다.”


쿠아리가 패배를 인정하고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연오가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을 꺾으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에미시의 분란을 중재하고 서로 돕는 길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


연오는 태산과 이자기에게 우타리 족장을 데려오라고 했다.


창고에 갇혀 있던 대족장은 태산이 문을 열고 나타나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번에 눈치챘다. 딸이 이즈모에 가서 구원을 청한 것이다.


노카이를 비롯한 족장의 심복들도 풀려났다. 삼밭에서 머리만 내놓고 땅에 파묻혀 죽어가고 있었는데 이자기가 찾아내 목숨을 구하였다.


우타리 족장이 당나무 앞에 이르자 하루카가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족장의 측근들은 쿠아리와 장로들을 보고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연오는 대족장을 위로하고 그의 측근들을 타일렀다.


“동족상잔을 하고 선조들을 무슨 낯으로 볼 겁니까?”


우타리와 심복들은 감히 연오를 거스를 수 없었다. 이즈모에서 그의 경이로운 신력을 두 눈에 생생히 담은 사람들이다. 황홀하면서도 참담했던 기억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고 힘이 쪽 빠졌다.


그들은 하루카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연오가 기꺼이 대족장을 돕기로 하고 신력으로 큰산의 불곰들을 움직였다는 설명을 듣고 우타리는 깊은 경외심을 느꼈다.


에미시 전사들에게 곰은 신의 세계에 속한 영물이다. 곰과 영적으로 소통한다는 건 연오가 신의 반열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아차포의 정체는 예상치 못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에미시 주술사가 무녀왕 히미코의 명을 받는 간자였다니… 그럴 수가….


오우관(烏羽冠)은 먼 옛날 ‘하늘 사람’이 에미시 부족에게 맡긴 신물이다.


그는 하늘 임금의 아들이었는데 바다를 건너 북해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늘 사람은 눈보라를 맞으며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살아가는 에미시의 선조들을 긍휼히 여겼다.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 않도록 여러 씨족을 모아 사냥과 길쌈을 가르쳐 살길을 열어줬다.


북해도를 떠날 때가 되자 그는 에미시 선조들에게 신물을 맡기며 언약을 남겼다.


“오우관은 하늘 임금을 나타내는 증표입니다. 먼 훗날 나의 후예가 바다를 건너와 세 발 까마귀의 나라를 세울 때, 이 관을 전해주고 새 임금을 힘껏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그때부터 에미시는 부족을 이루고 서해도로 이주하여 산악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에미시 부족이 전투종족으로 세력을 떨치게 되자 한 족장이 스스로 오우관을 쓰고 임금이 되려고 했다. 얼마 후에 그는 손발이 뒤틀리는 병을 얻어 명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오우관은 족장과 장로들만 은밀히 공유하는 비밀로 남았고, 부족 사람들에게는 에미시를 도와준 하늘 사람의 전설만 전해져 내려왔다.


우타리 족장은 부족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되짚으며 연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때마침 해가 떠오르고 당나무에 서광이 비쳤다. 박달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연오를 포근하게 감싸며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지상에 아롱지는 삼족오의 모습이었다.


“하늘 사람이다! 천인(天人)이 내려오셨다!”


그 황홀한 광경에 감응한 전사가 흥분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산채의 공기가 금세 열기를 띠고 달아올랐다. 전설의 하늘 사람이 현신했다며 에미시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태산과 이자기, 이즈모 결사대도 연오에게 부복했다.


에미시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쿠아리는 연오의 신성한 풍모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서광을 받으며 당나무 앞에 선 연오는 신계의 문을 열고 인간계로 들어선 하늘 사람이 분명해 보였다. 찌릿찌릿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에미시 대족장 우타리는 비로소 결심했다. 삼족오의 화신 연오에게 하늘 임금의 오우관을 바치리라. 이 젊은이를 새 임금으로 만들리라.




이윽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이즈모 궁에서 성대한 즉위식이 열렸다. 에미시와 이즈모가 힘을 합쳐 새 나라를 세우고 근오지 마루치 연오를 임금으로 추대한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에미시 전사들과 이즈모 주민들, 그리고 바다를 건너온 대장장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젊은 임금을 경배하고 축복했다.


연오의 머리에 오우관을 씌워준 사람은 에미시 족장 우타리였다. 관을 두른 삼족오의 황금 깃털이 햇빛을 받아 성스러운 광채를 내뿜었다.


오우관을 쓰고 보좌로 나아가는 길에는 호공, 이자미, 쿠아리, 태산, 이자기, 무쇠할배, 추수지가 도열해 경의를 표하였다. 이자미와 쿠아리는 연오를 도와 각각 내정과 외정을 총괄하기로 하였다.


연오가 보좌 앞에 서자 풍악이 울리며 왕비의 입장을 알렸다. 에미시 여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루카가 궁문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색 가죽옷 위에 황금빛 망토를 두르고 묶어 올린 머리에 산호 옥잠을 꽂은 도도한 모습이다.


번데기가 탈피하여 나비로 변신하듯이, 그녀는 몇 달 사이에 앳된 소녀 티를 벗고 어엿한 여인이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하루카를 보다가 연오는 문득 가슴이 아렸다. 달빛 아래 수줍게 다가서던 세오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연오는 마음을 다잡고 신하와 백성들에게 새 나라의 국호를 선포했다.


“새 나라는 ‘화(和)’를 가장 귀한 가치로 삼는다. 이즈모와 에미시는 각자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조화를 이룰 것이다. ‘화’는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다름이 만나 힘을 얻고 더욱 커지는 것이다. 하여 나라 이름을 ‘화(和)’로 한다. ‘화’가 세상의 질서가 될 것이다.”


(1부 끝)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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