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에 깃든 역사의 기억
한민족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는 <삼국유사>를 필두로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문헌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고려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한 이야기가 가장 오래되고 원형에도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인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하였다.”
환인은 제석환인(帝釋桓因)의 약자로 불교에서 도리천을 주재하는 임금을 가리킨다. 원형은 인도 베다신화의 최고신 인드라(Indra)이며 천신이자 광명신의 성격을 갖고 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승려였기 때문에 단군신화의 신적 존재를 불교식 용어로 윤색했다. 환인(桓因)은 ‘한님’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한님은 곧 ‘하느님’을 뜻한다. 환인은 또 ‘환하다’와도 통한다. 광명을 주재하는 태양신이다.
환웅은 하늘나라의 최고신, 환인의 아들이다. 그런 고귀한 존재가 하늘 아래 인간 세상에 뜻을 두었다. 그가 서자라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아버지는 이를 승낙하고 아들이 내려가 뜻을 펼칠 곳을 알아본다. 환인은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며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다고 했다. 환웅의 뜻이 ‘홍익인간(弘益人間)’임을 알 수 있다. 삼위태백은 뒤에 나오는 태백산을 가리키는데 일연은 그곳이 묘향산이라고 봤다.
환인은 아들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했다. 천부인은 신의 위력과 영험한 힘의 표상이다. 부인(符印)은 조정과 관리가 나눠서 신표로 삼는 물건인데, 여기서는 하늘나라의 부인이므로 천부인이라고 한 것이다. 하늘로부터 정당한 통치권을 위임받은 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하늘과 인간 세상을 잇는 신시(神市)를 연 것이다. 그를 ‘환웅천왕’이라고 불렀다.
신단수는 고대 샤머니즘에서 신성시한 세계목을 의미한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솟아 있다. 세계목은 우주의 중심이자 생명의 근원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신이 강림하고, 땅에서 하늘로 인간이 승천하는 통로다.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하는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상징이다. 신목 아래에서 샤먼은 차원을 넘나들며 하늘의 신령한 뜻을 실현한다. 환웅천왕도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의 뜻을 펼쳤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한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이들은 각각 바람, 비, 구름을 다루는 환웅의 가신들이다. 농사짓는 데 필수적인 기상현상을 주관하여 농경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환웅천왕은 곡식, 목숨, 질병, 형벌, 선악 등 360여 가지 일을 두루 살펴 사람들을 다스렸다.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신령한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금기를 지켰다. 삼칠일(三七日)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삼가지 못해)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늘 신단수 아래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그녀와 혼인하고 아들을 낳았으니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신화는 환웅의 강림 서사에 웅녀의 변신 이야기를 결합시킨다. 옛날에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범이 같은 굴에 살았다. 고대에는 종족을 가리킬 때 동물을 상징으로 썼다.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 “헌원이 곰, 호랑이 등 맹수들을 훈련하여 판천 들판에서 염제와 세 번 싸운 끝에 뜻을 이뤘다”는 구절이 있다. 이 맹수들은 헌원의 편에 선 종족들이다. 단군신화의 곰과 범도 환웅의 신시 집단과 관계하려는 종족을 은유하고 있다.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까? 곰과 범이 굴에 살았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굴속은 어둡다. 생명의 근원인 빛이 간절하다. 사람이 되고자 함은 어둠에서 벗어나 광명 세계로 나가려는 것이다. 종족 차원에서 보면 원래의 신앙을 내려놓고 광명신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고대에 신앙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복속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곰과 호랑이를 신성하게 여겨온 종족들이 하늘을 받들고 태양을 숭배하는 신시 집단에 복속해 합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단이나 종족이 통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 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인류학적 관점으로 보면 이것은 입문 의례에 해당한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들어갈 때 시험을 거치는 것이다. 고대의 입문 의례는 격리와 정화, 그리고 재탄생의 과정을 밟았다. 곰과 호랑이가 백 일간 햇빛을 보지 않고 굴속에 있는 것은 격리를 뜻한다. 쑥과 마늘은 삼키기 힘든 맛이지만, 나쁜 기운을 씻어주는 정화 식품이다.
이윽고 결과가 나왔다. 곰은 인내하고 절제해 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으로 재탄생했다. 반면 호랑이는 금기를 어겨 사람의 형상을 얻지 못한다. 해석해 보면 곰족은 입문 의례를 통과해 신시 집단과 합치게 되었지만, 범족은 실패하고 축출된 것이다. 여자로 거듭난 웅녀는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고,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해 그녀와 혼인한다. 신시 집단과 곰족의 ‘혼인동맹’이다.
고대 신화에는 역사적 사실의 파편이 박혀있다. 단군신화에는 먼 옛날 아사달에 새롭게 등장한 천신 숭배 집단이 토착 세력인 곰 토템 종족을 통합해 더 큰 정치적 공동체로 재탄생한 기억이 들어있다. 환웅과 웅녀의 소생인 단군왕검은 나라를 세우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의 시작, 고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