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척이냐 330척이냐, 명량대첩 적선 수의 진실

by 권경률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12척 대 330척의 대결 구도로 홍보했다. <명량>이 176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위에 오르며, 12척 대 330척의 대결을 역사적 사실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명량대첩의 공식 기록은 영화가 제시한 숫자와 꽤 차이가 난다.


“신이 전선 13척, 정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 해로의 중요한 물목을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왔습니다. 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습니다.”(<선조실록> 1597년 11월 10일)


<선조실록>은 조선 국왕이 명나라 제독에게 전과(戰果)를 통보하는 기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승전 장계를 인용했다. 여기서 ‘해남현 해로의 중요한 물목’이 바로 명량, 곧 울돌목이다. (정탐선을 빼고) 맞붙은 조선 수군과 일본군의 전선은 13척 대 130여 척이었다. 이순신이 직접 보고한 내용이므로 객관적인 사실로 봐야 할 것이다.


아군 전선 수가 12척이 아니라 13척인 것은 시간의 흐름에 비춰보면 별로 문제 될 게 없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파멸한 뒤로 이순신은 계속 남은 배와 무기, 병력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선조는 수군이 망가졌으니 육군과 합류해 왜적을 막으라는 명을 내렸고, 이순신은 바다가 뚫리면 조선은 끝장이라며 장계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습니다.”(이분, <행록>)


명량해전은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벌어졌다. 보름이든, 한 달이든 그 사이에 전선을 한 척 더 수습했다면 13척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적선의 숫자다. 130여 척과 330척의 간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화 <명량>은 무슨 근거로 적선이 330척이라고 한 것일까?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대적한 왜선의 숫자는 문헌마다 제각각으로 나온다.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200척이라 하였고, 이항복의 <백사집>에선 오륙백 척이라고 했다. 330척은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본’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난중일기>, 전집본과 친필본의 차이


<이충무공전서>는 임진왜란 200년 후인 1795년에 정조 임금의 명으로 규장각에서 편찬한 ‘이순신 전집’이다. 정조는 이순신의 ‘왕팬’이었다. 왕실 금고의 내탕전(內帑錢)을 하사해 경비를 충당하게 할 만큼 <이충무공전서>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이 전집에는 이순신의 일기, 장계, 전기, 시문, 비문, 제문, 국내외 기록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연도별로 된 장군의 일기를 모아 <난중일기>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여기에 수록할 때의 일이다.


다만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본’에는 장군이 직접 쓴 국보 <난중일기> ‘친필본’(이순신 종가 소장)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백의종군할 때의 일기가 빠졌으며, 다른 날짜들도 더러 누락되었다. 충무공을 숭상해 왕명으로 편찬하는 전집이니 장군이나 나라에 누가 될 것 같은 내용은 편집 과정에서 손봤을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이순신이 죄인으로 살았던 대목이나 일기 특유의 감정적인 표현 등이 도마에 올랐을 것이다.


명량해전의 적선 숫자도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다. <난중일기> ‘친필본’의 명량대첩 당일(1597년 9월 16일) 일기에는 적선 숫자가 130여 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른 아침에 높은 곳에서 적을 감시하던 군사가 와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 들어와 진을 친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곧바로 여러 배에 명을 내려 나무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둘러쌌다.”


그런데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본’에서는 적선 130여 척이 330여 척으로 바뀌었다. 영화 <명량>에서 근거로 삼은 숫자다. 뜬금없이 330여 척이라니 어떻게 된 일일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130여 척을 오기한 것일까? 아니면 기적 같은 승리를 강조하려고 임의로 부풀린 것일까?


나는 330여 척의 단서가 ‘이충무공전서본’의 초고인 ‘친필본’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의 친필 일기는 임진왜란 기간의 연도별 간지를 써서 7권으로 묶었다. 1595년의 <을미일기>가 빠진 대신 1597년은 <정유일기>와 <속정유일기> 두 권이다.


여기서 <정유일기>는 1597년 4월 1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기록이고, <속정유일기>는 1597년 8월 4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의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8월부터 10월까지 두 달 정도가 겹치는데 같은 날짜의 일기가 서로 다르게 쓰이기도 했다. 대체로 먼저 쓴 <정유일기>의 내용을 뒤에 쓴 <속정유일기>가 보충하고 정리하는 식이다. 두 달이 워낙 위중한 시기였기에 일단 생각나는 대로 써놓고 한숨 돌렸을 때 더하고 바로잡은 것이다.


친필 <정유일기>에 330척 단서 있다


명량대첩 당일(9월 16일) 일기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인용한 ‘친필본’은 <속정유일기>에서 뽑은 것이다. 이와 달리 <정유일기>는 명량해전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른 아침에 높은 곳에서 적을 감시하던 군사가 와서 보고하길, ‘적선 자그마치 200여 척이 명량으로 들어와 진을 친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거듭 명확히 약속하고, 나무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3척이 우리 배를 둘러쌌다.”


요약하면 ‘친필본’ <정유일기>에서는 “적선 200여 척이 명량으로 들어와 133척이 우리 배를 둘러쌌다”고 했고, <속정유일기>는 “셀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 들어와 130여 척이 우리 배를 둘러쌌다”고 했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은 <정유일기>의 부정확한 숫자를 배제하고 승전 장계를 작성한 다음 이를 <속정유일기>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충무공전서본’에선 <정유일기>에 나온 200여 척과 133척을 합쳐 적선 숫자를 모두 330여 척으로 봤을 것이라 짐작된다. 승전 장계는 조정의 신뢰를 얻어야 하므로 보수적으로 썼을 테고, 전집은 이순신의 위엄을 드높여야 하므로 진취적으로 썼을 것이다.


따라서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물리친 적선은 130여 척이 맞지만 330여 척이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감시병의 보고대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이 명량에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의 조류와 지형을 십분 활용하면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투지로 부하들을 독려하여 적선 31척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뒤에 늘어서 있던 수많은 적선은 이순신에게 좌절하며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을 제거하고 서해를 돌아 서울로 진격하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 구상도 무산되었다. 압도적인 군세로 조선을 치고 명나라까지 넘본 그의 미친 야망은 이순신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조어진_수원화령전2.jpg 정조는 1795년 규장각에 명해 이순신 전집인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도록 했다. / 사진 : 수원 화령전 정조 어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리나라 이름은 어째서 ‘대한민국’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