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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절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by 마음벗

명절이 다가오면 집안 곳곳에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어떤 며느리들은 명절 전부터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한다고도 한다.

단순한 피로나 과로가 아니라, 마음 한편에서 계속 쌓이는 긴장과 걱정이 몸으로 드러나는 신호다.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는 ‘눈치껏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며느리들의 일상 속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어차피 잔소리와 핀잔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지만 괜한 걱정을 그렇게 또 한다.

기대와 설렘보다는 ‘해야 할 일’이 머릿속을 먼저 채운다.


며느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명절은 축제가 아니라, 끝없는 인내심의 시험대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명절 전날, 딸과 사위가 부모님 댁에 오고 사위는 장모님 곁에서 음식 준비를 돕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명절 당일, 사위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그곳에 장모님의 아들 내외가 도착했다고 해보자.

그때 사위가 아내의 오빠인 형님과 그의 아내, 즉 처남댁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낯설고 어색한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며느리가 시댁의 사위인 사람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 지점부터가 이미 비정상이다.

그 집의 주인이 직접 차려주던가, 아니면 각자 차려 먹으면 된다.

왜 남의 집에서, 또 다른 남을 위해 밥상을 차려야 하는가.

“관계에는 예의가 필요하지만, 예의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말한다.

“관습이니까.”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오래된 풍습이니까, 어른들이 살아온 방식이니까.


하지만 그 말은 부당함을 감싸는 가장 편리한 포장지다.

그 관습의 부당함을 느끼는 순간조차 ‘예의 없음’으로 몰아가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며느리들을 더 깊이 옥죄는 보이지 않는 족쇄다.


어느 며느리는 명절 전날 아침부터 명절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침, 점심, 저녁까지 식구들의 식사까지 챙기며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었다. 연로하신 시어머니도 함께 도왔지만, 오래 앉아 있기가 불편하셨는지 수시로 방으로 가서 쉬거나 주무시기도 하셨다.


며느리가 모든 일을 마친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다. 뒷정리와 마무리를 끝내고 집에 도착하니 시계는 이미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며느리에게 이렇게 한마디 했다.

"푹 자고 새벽 6시까지 오거라."


푹 자고 오라니, 어떻게 그렇게 하라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구였다. 결국 며느리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시어머니의 요구대로 새벽 6시까지 시댁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며느리는 몸이 지쳐 있었지만, 그녀를 진정으로 힘들게 한 것은 단지 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 자체가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또한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이다’라는 자기 검열이 내면의 자유를 빼앗고, 알지 못하는 사이 죄책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며느리들은 오랫동안 ‘참음’을 미덕으로 배워왔다.

그러나 그것은 불평등을 지속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참음은 관계를 유지시킬 수는 있어도, 정의를 세우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차라리 명절이라는 제도가 조용히 사라지는 게 더 평화로울지도 모른다.

“관습은 익숙함의 옷을 입지만, 그 안에 불공정이 숨어 있다면 벗어야 한다. 진짜 전통은 누군가를 억누르지 않는다.”

같은 결혼을 했지만, 다른 대접을 받는다.

사위는 ‘귀한 손님’으로 불리고, 며느리는 ‘식구’라 불리지만 사실 노비에 가깝다.

그 한 단어의 차이 속에 성역할의 불균형과 관계의 불공정이 드러난다.

사위는 예의를 지키면 칭찬받지만, 며느리는 예의를 넘어 헌신해야 칭찬받는다.

그 차이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사회, 그곳에서 며느리의 인내는 언제나 시험대 위에 놓인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맺는 약속이지만, 그 약속을 평가하는 시선은 여전히 한쪽만을 향한다.

대부분의 시댁에서 이 불균형의 무게를 며느리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한다면, 그건 더 이상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만약 친정의 달과 시댁의 달이 1년에 두 번씩 있다면 어떨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예를 들어 시댁의 달은 1월과 6월, 친정의 달은 2월과 7월로 정한다면, 정해진 날짜에 꼭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줄어들고, 교통체증 또한 크게 완화될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부모를 향한 자식들의 마음을 ‘명절 연휴’라는 특정한 날에 가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친정과 시댁 중 어디를 먼저 찾아가야 하는지 매번 협의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져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솔직히 말해, 협의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시댁을 먼저 방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관습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정의 화목을 이끌어내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엉뚱한 상상일지 모르지만, 명절이 여러 면에서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명절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편한 마음으로 진짜 가족의 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을 뿐이다.

며느리는 명절에 친정집을 방문하는 것조차 시댁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허락이 필요한 삶, 그것이 며느리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