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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월 Jul 28. 2021

<우리, 둘>-'우리'는 둘로 완성된다

사람과 사랑이 존중받을 권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사회를 통해 정식 개봉 하루 전 영화를 관람하고 왔다. 생각한 것과는 몹시 다른 영화였고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 영화의 스릴러적 분위기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듯한데, 미리 밝히자면 나는 이 영화의 분위기가 영화적 메시지와 아주 잘 부합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따라서 본 리뷰는 '이 영화가 왜 스릴러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변론이라 할 수도 있겠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영화 퀴어의 일상을 지배하는 공포와 불안을 영화적으로 몹시  구현해낸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방법은 크게  가지로 나눌  있다.




작은 소리도 커다란 굉음이 되는 폭력의 세계


까마귀 우는 소리, 세탁기 작동 소리, 문 소리와 노크소리, 음식이 익는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말소리까지도 전부 공포를 자아내는 소음과 굉음이 되는 퀴어의 세계. 공포를 작동시키는 건 다름 아닌 퀴어를 둘러싼 세계의 혐오이다. 목소리를 내려는 자들의 소리를 죽이고, 목을 꺾어버리는 혐오의 팽배. 그 안에서 수많은 퀴어는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말하되 들리지 않는 방식으로 말한다.

말할 수 없는 자의 얼굴. 숨김 당하는 자의 얼굴. 출처: 네이버 영화

세계의 소리에 의해 차단당하는 건 비단 퀴어뿐이 아니다. 니나와 마도의 관계를 눈치챈 앤(마도의 딸)이 동생 프레드릭에게 진실을 말하는 순간, 영화는 그 둘의 음성을 도로의 굉음으로 묻어버린다. 그리고 그 둘이 앤의 아들과 함께 식사하는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앤의 아들의 목소리만 들릴 뿐, 앤과 프레드릭의 음성은 여전히 거세된 상태이다. 니나와 마도의 소리를 죽여버린 혐오의 질서가 앤과 프레드릭의 세상에도 드리운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앤과 프레드릭의 음성을 차단시킨 대상은 앤과 프레드릭 스스로가 가진 혐오라는 것. 특히, 이 장면에서 니나는 앤의 집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깨는데 여기서 보여지는 전복도 매우 인상적이다. 니나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앤과 프레드릭의 무지를 욕하고, 있는 힘껏 돌을 던져 소음과 소란을 빚어낸다. 뮤트를 당하기만 하는 입장이던 니나가 비로소 균열의 음을 터뜨린다.


이 장면에서 니나는 자신이 마도의 비밀 연인임을 폭로함으로써 마도의 자식인 앤과 프레드릭의 일상을 파괴하는 가해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가진 혐오에 의한 피해자일 뿐, '사실'을 '불행'으로 만든 건 혐오를 답습한 시선이다. 또한 니나가 던진 돌에, 깨진 창문 조각에 맞거나 다친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 역시 대단히 상징적이다. 폭력을 저지르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폭력의 결과는 사뭇 달라진다. 뭐로 보나 사회적 약자에 가까운 사람이 범하는 폭력과 그 반대 위치에 놓인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은 위협도도, 파장 범위도 극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안전한 어둠과 불온한 그림자.


'우리', '둘'에 대한 영화답게 영화는 완벽한 대칭으로 포문을 연다. 찰랑이는 물결 위에 드리운 또 하나의 다리. 은은한 달빛은 다리를 한 쌍으로 만들어 하나를 둘로 만든다. 그리고 어둠이 가득한 둘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 어둠은 대칭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둘만의 세계가 타인에 의해 침범당하거나 위협당하지 않았던 시절의 안전한 어둠.

둘만의 밤, 둘만의 공간, 둘만의 사랑.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퀴어를 가리는 세계의 짙은 그림자를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니나와 마도가 동거하는 마도의 집은 전반적으로 채도가 낮은 반면 둘의 사랑을 비밀로 지키기 위한 공간인 니나의 방은 밝게 나타난다. (니나의 방은 니나와 마도가 세상을 속이기 위해 꾸며낸 거짓된 관계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보여지기 위한 공간이니 더욱 밝게 묘사할 수밖에). 그러나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니나와 마도의 사랑이 위태로워지고, 니나가 그 방으로 쫓겨나면서 화면 역시 점점 더 어두워진다. 이는 점차 탄로 나는 비밀에 대한 은유이자 니나와 마도가 함께일 때는 애써 모른 척할 수 있었던 폭력적 혐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굳건한 혐오는 세상의 편견과 폭력의 그림자를 몰아내기 위해 전등을 켜고, 노래를 틀었던 니나와 마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럼에도 니나와 마도는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말하고 싶었던 모든 순간에서 배제되고 내몰린 이들은 이제 스스로 문을 닫는다. 뒤늦게 대화를 요청한 이의 소리를 가뿐히 무시한 채 서로가 서로로 인해 안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공간에 기대어본다. 제 아무리 엉망진창인 공간일지라도, 지속될 수 없는 고요이자 행복일지라도, 발을 맞추어 춤을 추고 눈을 맞춘다. 나와 당신의 달콤한 목소리를 잡아먹는 세계에 지쳐 그만 입을 다물어버린 순간에도, 나는 당신과 같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되고, 단 둘만 남겨진다.


출처: 네이버 영화


세상의 소음과 폭력을 막아주던 유일의 방패, 노래가 사라진 이곳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춤을 춰. 노래 없이도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이 올까? 그때까지 이 춤을 계속할 수 있을까?

차단하거나 차단당하지 않는 세계가 오긴 올까. 날아오름으로써 자유를 찾았던 델마와 루이스의 결말에서 단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이 세계를 문득 원망하게 된다.


사랑도, 사람도 마땅히 존중받는 세상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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