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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융 Aug 12. 2020

다시 시작하는 그림 그리기

내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

 저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엄마는 제가 만 3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그렸던 호랑이 그림을 보고 제가 화가가 될 줄 알았다며 아직도 말씀하세요. 호랑이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애가 대략 이렇게 그리고 이게 뭐냐고 물으니 "호야이!"라고 외쳤었대요.

엄마의 기억 속 설명을 토대로 제가 직접 그려 본 겁니다.


 전 항상 표현하고 싶은 게 있었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게 어려운 일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런 수단을 사용하여 나를 표현하는 게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았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 수록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느낌에 따라 색감이나 구도가 촤르르 하고 펼쳐지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럴 당시 저는 많이 우울했었고, 이유도 모르고 울기도 했었습니다. 무기력했고, 먹고 싶은 게 뭔지 하고 싶은 게 뭔지도 잘 모르던 시기였어요. 전 이 시기를 부끄럽지만 책으로 이겨냈습니다. 책 속에는 나하고 비슷한 사람들도 많았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알려주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요. 이럴 땐 나보다 힘들다고 외치는 사람보단 나와 같은 걸 경험했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이 훨씬 위로가 된다는 것도 깨달았었어요. 위로가 될 수 있는 건 같은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의 공감이라는 것을요.


 그렇게 아무것도 되지 않던 시절을 지나오면서 점차 저라는 사람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안정되어 간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쇠락 중이던 싸이월드 게시판에 내 감정이나 일기, 사진 같은 것들을 업로드하면서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이라기에는 좀 거창하기도 하고, 그냥 일기나 메모 정도로 이야기하면 적당할 것 같아요. 친한 사람들 외엔 보는 친구들도 몇 없었어요. 몇 안되는 일촌인 친구들이 싸이월드를 모두 떠나가던 시기였거든요. 그렇게 자유롭게 글을 끄적일 수 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머리 또는 가슴에서 손 끝까지 말들이 전달되어 화면에 표시되는 간격이, 굉장히 짧았거든요. 생각하는 즉시, 느끼는 대로 곧바로 게시판에 올라갔습니다.


 전 원래 날것의 어떤 모습을 공유하는 걸 조금 거리끼는 편인데, 그때는 그렇게 하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었어요. 공감해주던 친구들도 있었고, 어떤 선배는 저에게 '팬이야'라는 표현을 해 주면서 계속 이렇게 이런 걸 끄적이라고 동기부여를 해주기도 했었어요. 심지어 위로가 된다고 이야기해 준 사람도 있었고요.


 내가 장고 없이 나 좋자고 끄적인 글들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이고, 공감할 거리이고, 위로가 될 수 있구나! 가슴속에 숨어있던 불씨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순간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나는 열심히 즐겁게 뭔갈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지금까지처럼 공감받고 위로받기만 할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내가 그것을 줄 수도 있다고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손으로 끄적이는 걸 좋아합니다. 낙서를 하기도 하고, 노래 가사를 베껴 쓰기도 하고, 지금 순간적으로 느끼는 아주 단편적인 감정을 손으로 꼭 쓰고 싶어 해서 펜과 종이를 항상 가지고 다녔어요.


# 혹시 그림일기 썼던 것 기억나시나요?


 그림일기도 어린 시절의 저에게 가장 간단했던 숙제 중 하나인데,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장 친한 친구의 어머니께서 그림일기장을 들고 저희 집으로 오셔서는 "아 한테 오늘 뭐했는지 물어보고 그림 좀 그려 줄 수 있겠나, 글은 내가 쓰라고 할게"라고 하셨고 전 흔쾌히 인터뷰 후에 그림을 그렸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과제 대행인데, 그때 그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되어서 웃음이 납니다. 숙제는 해야 하는데, 아이가 숙제할 생각을 안 하니까 얼마나 절박하셨을까요.


 하루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그림으로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설명이나 느낌을 덧붙이는 것. 어릴 땐 이게 그렇게 특별한 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만큼 어려운 작업도 없고 반면에 하루를 기록하기 좋은 일도 없더라고요. 왜 어려운가 잘 생각해 봤는데, 직장인의 하루는 그렇게 특별하지가 않아서요. 특별할 수도 있지만, 제가 특별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들이 많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그림일기를 조금씩 그리기 시작했어요. 사무실에 독야청청한 화분에 물을 주었던 일도 그때의 감정들을 잘 떠올려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덧붙였어요. 그리고 그림이 몇 개 모였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살짝 보여주었어요. 이런 걸 누구에게 보여주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걱정도 되고 부끄럽기도 했는데, 엄마, 아빠, 동생, 남자 친구, 친구들,... 이 그림을 본 주변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그림일기는 지금도 꾸준히 그리고 있습니다. 이걸 해 보니 어떤 긍정적인 효과가 있어요. 부정적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루하루 매 순간 '그림으로 그릴 만 한 상황 없나?' 하며 상황을 살피고, 제 감정을 살펴요.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도 유심히 보고 기억합니다. 그렇다고 중요한 순간까지도 너무 그림일기 소재 찾기에 치중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하고요.

 

 이제는 한 컷의 그림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과정이나, 내가 어떤 것을 보거나 읽고서 느낀 감상도 다 그림으로 남길 수 있게 그림에 적극적으로 도전해서 꾸준히 연습을 해 보려고 합니다. 창의력이라는 게 뭔지 정확히 와 닿지 않았었는데, 생각 속에 있는 걸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창의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창의력에 더해 활력이 없던 생활에 활력이 생기는 것도 같고, 방관하고 생각만 하던 제게 무언가를 도전하고 시도해보는 자세도 생긴 것 같아요. 그림 그리기가 여러모로 정말 좋은 활동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림이 많이 모이면 언젠가 여기에도 공개를 해 보려고 합니다.

 그때까지 그 그림을 봐주실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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