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있다!"
18평의 30년 가까이 된 오래된 낡은 전셋집에서 아내와 딸과 셋이 살았다. 아내와 둘이 살기에는 그래도 살만했는데 어느새 딸이 태어나고 육아를 하다 보니 벽 구석구석에 곰팡이부터 방음문제까지 불편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매일 청소를 하고
살림을 최대한 줄여가며 살았다.
나는 퇴근 후 밤이 되면 18개월 딸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다. 책의 제목은 '우리 집' 이다. 집에 있을 법한 단어들을 그림과 함께 낱말을 적어놓은 책이다.
'창문', '냉장고', '선풍기'그림을 보여주고 단어를 소리 내 읽어주면 아직 말을 제대로 못 하는 딸아이는 손으로 책에 나오는 것을 가리키며 혀 짧은 소리로 "여(기)있다" 라고 외친다. 창문을 말하면 창문을 가리키고 냉장고를 말하면 냉장고를 가리키며 "여있다.!" 소리친다. 책을 뒷장으로 넘겨보니 욕조도 나오고 커다란 책장도 나온다. 딸아이는 처음 보는 그림에 잠시 고민하다가 집의 안방쪽을 가리키며 "여있다!"를 외친다. 또 우리집에 없는게 나오면 안방쪽을 가리키며 "여있다!"를 외친다.
우리 집에는 욕조도 없고 커다란 책장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 집에는 뭐든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딸아이게 우리집은 없는게 없는 보물상자다. 그런 아이가 귀여우면서도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언젠가 아이도 알게 되겠지.. 우리 집에는 욕조도 책장도 없다는 걸. 우리 집에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다는 걸..
아이의 보물상자를 평생 지켜주고 싶다.
아가야 "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