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한 바퀴

스물여섯 엄마의 열다섯 번째 일기

by 김아현

한 두 달에 한 번 내려가는 본가에서, 모녀끼리 놀다 귀가하는 길이면 나는 그 동네 주변을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엄마한테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딸의 부탁을 들은 엄마는 곧장 "그러자" 외에는 별 다른 말없이 운전대를 돌려 가벼운 드라이브를 해준다.

그 아파트는 내가 태어나기 이 년 전에 사용 승인을 받은 건물이자, 부모님께서 부부의 연을 맺고 정착한 제대로 된 첫 보금자리이며, 나와 동생의 짧고 굵은 유년 시절이 새겨진 추억 깊은 장소다. 간혹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막막한 기분이 들거나, 아무 이유 없이 과거가 그리워지는 날이면 열 살이던 그 해 봄까지 살았던 그곳을 한 번씩 돌곤 한다.

그렇게 마을을 돌듯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마치 하루를 의미 있게 마무리한 것 같은 이상한 평안함이 찾아온다. 잠깐의 아련함이 스치기도 하지만, 잠시나마 산 것 같은 시간으로 충만해지는 감각 덕분에, 만약 마음의 중심이 기울어 있는 상태라면 그 흐트러진 균형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경사진 아스팔트를 달리는 차의 속력이 조금씩 느려진다. 세상의 중심이 되어 살던 잠깐의 시절이 점점 선명해지며, 순식간에 이십 년 이상을 찰나에 훌쩍 뛰어넘는다. 회상은 자연스럽게 기체처럼 피어오른다. 모녀는 각자의 시간에 누워서 옛 공간의 기억을 붙들고 있던 고삐의 힘이 풀리는 감각 속에 머무른다. 같은 공간을 두고도 서로 다른 결로 스며드는 기억의 감각은, 그렇게 풀린 고삐를 따라 불쑥 떠오른다.

단지 바로 밑에서였다. 초등학교와 문방구 사잇길을 지나기 직전, 아파트 드라이브를 흔쾌히 해주겠다고 하면서도, 엄마는 이곳에 오면 별로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고 조용히 털어놓았다. 엄마다운 솔직한 직설이었다. 젊은 엄마로서 겪어야 할 불가피한 어려움과 고충으로 점철된 시절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공간이니 마냥 달갑지만은 않으리라. 그러므로 그녀에게 이 낡은 아파트에 대한 기억은 딸이 가진 것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같은 공간에서 서로 떨어져 있는 감정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하려 했다. 그러나 어차피 읽을 수 없는 간극의 한계를 받아들였고, 대신 기꺼이 드라이브를 부탁하는 딸의 마음을 읽어준 엄마의 선택을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적어도 그녀의 선택과 행동에는 그럴듯한 포장 기술이 없으므로 이 드라이브만큼은 분명한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육아일기가 쓰인 장소가 지금의 오래된 아파트였고, 첫 딸을 키우고, 자라나는 아이와 함께한 10년의 시공간이 다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당시에 비록 서툴고 부족한 점 투성이 엄마로 산 세월의 흔적이 녹록하게 남아있다 해도, 그 공간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리게 한 이유가 되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때의 엄마보다 나이를 먹은 딸은, 이제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언젠가 아파트 단지를 차로 삥 돌며 예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의 놀이터를 차창을 밖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 모래바닥과 그 위에 적절히 거리를 두고 박혀 있던 철제 놀이기구 대신, 안전과 심미성을 고려한 플라스틱 놀이기구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아파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 건재했다. 문득 그 공간 자체가 켜켜이 쌓여 굳어진 하나의 기록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하나의 작고 아담한 마을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한 거리에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합기도 도장과 피아노 학원이 자리했던 기억도 이상하게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있다. 땅속에 박힌 씨앗이 웅크린 채 기다리다 작은 나무로 자라 새로운 가지를 뻗듯, 사소한 이야기들이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힘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스물여섯 엄마의 열다섯 번째 일기 전문]


1999. 1. 4. (32개월)


우리 아현이가 삐아제 어린이집에 입학하는 날이다. 새로운 친구들이랑 잘 놀지, 혹시나 엄마를 찾지나 않을지, 뭐든 천천히 먹는 아현이가 친구들 속도에 맞춰서 간식이랑 점심을 잘 먹을지 걱정이 되었다. 색종이 접기도 하고, 미끄럼도 타도 즐겁게 친구들이라 잘 어울려서 노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지만 역시나 간식을 먹을 때 아주 천천히 조금씩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천천히 먹는 아이한테 빨리 먹으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다가 급체라도 하면 큰일이니, 일단 원장 선생님한테 뭐든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먹은 식성이지만 좀 늦게 먹는 편이기에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드렸다.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집에 들고 온 노란 가방을 잠잘 때까지 메고 다니는 걸 보면 어린이집 가는 게 싫지는 않은가 보다. 그나마 다행이다. 남편이 물었다. “우리 아현이 집에서 엄마랑 노는 게 좋아? 어린이집 가는 게 좋아?”

“음~~ 나 어린이집 가꼬야.”

아현이가 벌써 이만큼 자라서 어린이집에 간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고. 여하튼 감정이 묘해진다.


1999. 10. 27. (41개월째)


어린이집에서 고구마 밭에 체험학습 가는 날이다. 고구마 캐러 간다고 마냥 들떠 밥도 후딱 먹고 혼자 어린이집에 간다고 엄마는 따라오지 말라고 한다. 혼자 할 수 있다면서 인사하고 가버린다. 다른 엄마들은 다 따라 나가는데 얘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어린이집에서 ‘혼자서도 잘해요’를 너무 열심히 배웠나? 어린이집이 아파트 앞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들어가는 거 보고 와야 마음이 놓여서 거리를 두고 따라가 봤다. 오늘은 안전하게 잘 들어갔지만 내일부터가 걱정이다. 그렇지만 혼자 할 수 있는 자립심이 강한 우리 딸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체험학습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간에 맞춰 엄마들이 어린이집 입구에서 기다렸다. 차에서 내리는 딸을 보고 빵 터져버렸다. 옷이랑 신발에는 흙이 가득 묻어 있었고, 며칠 전부터 시작된 콧물감기 때문에 콧물은 입까지 줄줄 내려오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아현이 성격으로 고구마를 얼마나 열심히 캤을지 상상이 되는 몰골이었다. 가방 한가득 캐논 고구마를 자기가 캤다고 자랑하느라 정신없다.


“와~~ 고구마 맛있겠다. 아현이 고생했어~ 대단하네~ 내일은 이 고구다 다 삶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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