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엄마의 열여섯 번째 일기
아무리 인생사의 한 부분이라 해도, 시간 사이에 깊고 두꺼운 경계가 생겨버리면 그 일은 어느새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멀어져 간다. 네 살의 세계를 가늠하기엔 나는 이미 그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다.
수증기로 휘발될 물의 결말처럼 흩어질 듯 위태롭던 그 세계. 순간을 오래도록 붙들 힘이 미약했고, 견고함과는 거리가 멀며,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듯한 가벼움으로 존재하던 시간.
안타깝게도 딸이 간직하길 바랐던 그 추억은, 시간이 흐른 뒤 성숙해진 기억력 안에서 보기 좋게 가공되고 말았으니, 이제 그때를 이야기하려면, 또 다른 세상을 제삼자의 눈으로 들여다보듯 멀리에서부터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딸이 떠올리는 과거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추억이 아니라, 이랬겠지, 저랬겠지 하고 역으로 상상하며 재창조한, 말하자면 인조(人造)에 가까운 추억에 가까운 것이리라.
재창조된 과거는, 시간이 흘러 파편화되는 일반적인 기억의 형태와는 다른, 어떠한 간극을 품고 있다. 그때의 구체적인 상황도, 마주했던 사람의 얼굴도, 어느 것 하나 선명하게 그려지지도 잡히지도 않게 된 상태에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와는 다른 기억의 이미지이지만, 그 주위를 가만가만 맴돌며 머물다 보면, 이상하게도 그 속에 스며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든든한 것.
윤곽은 사라졌지만 지탱해주고 있는 감각.
옛 사진을 들여다보듯 지금껏 멀어진 것들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과, 앞으로 놓치는 것들이 더 빠른 속도로 쌓이겠구나 싶은 씁쓸한 예감이 오묘하게 섞일 때, 나는 은은히 밀려오는 감각의 곁에 가만히 앉아본다.
끝내 증발한 세계가 만들어낸 빈 공간은 그에 걸맞은 생각과 말마저 함께 데려가 버리는 하고, 좋은 추억도 순간 머물다 떠나는 뜨내기들을 위한 자리 같은 것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며. 내 안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이.
어쩌면 나를 키운 건 어쩌면 그런 좋은 감정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깊어가는 가을 무렵, 단풍잎 두 장만한 발로 경사가 있는 산길을 사박사박 오르던 때. 아버지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산을 오르던 순간. 잠든 나를 엎고 하산하던 어른들의 속 깊은 배려. 산 중턱 바위에 앉아 이름도 모르는 오빠와 격없이 해맑게 장난치던 천진무구한 행동들. 천천히 녹아 사라진 달콤한 나날이지만,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그 감정들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붙잡아주는 보이지 않는 뼈대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기억에 없는 과거라 할지라도 단지 없는 것으로 치부될 수는 없을 것이다.
[스물여섯 엄마의 열여섯 번째 일기 전문]
1999. 10. 31. (일)
남편 회사 산악회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지리산에 간다고 했다. 가족동반 가능하다고 해서 단풍이나 구경하고 올까? 하고 가볍게 따라나섰는데 코스가 ‘피아골 코스’였다. 그리 힘들지 않은 코스라고 하더니 어린아이를 데리고 올라갈 코스는 아니었던 거 같다. 우리 딸은 출발할 때 아빠 손잡고 신나게 걷더니, 일행들이랑 거리가 자꾸 벌어지니까 결국 남편이 목마를 태워서 올라가기도 했다.
거제도에는 아직 단풍이 그리 예쁘게 물들지 않았는데 지리산에는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제각기 색을 자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너무너무 예뻐서 눈에 다 담아가려고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초롱초롱 아현이의 맑은 눈에도 예쁘게 물들어 있는 단풍들이 다 담아질지 모르겠다.
초등학생이 한 명 더 있는 우리 가족팀은 더 이상 올라가는 게 무리라 생각되어 계곡에서 쉬면서 놀기로 했다. 계곡물에 손 담그고 모여있는 낙엽들을 하나 둘 물에 띄워 보내면서 즐거워하는 아현이를 보니까 힘들어도 데리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같이 간 초등학생 오빠가 아현이를 잘 데리고 놀아줘서 아현이는 더 즐거워 보였다.
하산할 때 아현이는 피곤했는지 잠들어버렸고, 엄마의 등에 업혀서 내려오다가, 아빠가 안아서 내려오고, 같이 간 아저씨가 도와줘서 안아서 내려오기도 했다. 잠든 아이를 데리고 하산하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1박 2일 동안 모르는 사람들이긴 했지만 산악회 회원분들이 다 좋으신 분들이라 아현이도 이뻐해 주시고 배려를 많이 해 주셔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당풍구경도 실컷 하면서 즐거운 주말을 보낸 거 같다. 우리 아현이 기억 속에도 오랫동안 추억으로 머물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