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엄마의 열일곱 번째 일기
솔직히 살면서 크게 아픈 적도 없었다. 해봤자 겨울에 좀 피곤하면 단순 감기와 몸살을 잠깐 앓는 것이 전부였으니, 그간 내가 얼마나 내 몸을 안일하게 여겨왔는지는 결국 앓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나아서 지금은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는 몸이 무너지면 벌어지는 일을 어떻게든 통과하려 애쓰는 시간이었다.
느닷없는 병(病)의 급습은 왼쪽 팔뚝이 은근히 욱신거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동네 병원에 갔지만 면역계 문제를 의심했을 뿐 정확한 병명을 들을 수 없었다. 금방 가라앉을 거라고 여긴 나의 무지한 예측과는 달리, 2주에서 3주가 다 되어가도록 좀처럼 멎지 않는 통증 앞에서 삶의 질은 수직으로 가파르게 추락했다.
걷거나 몸을 일으키는 일상적인 움직임이 사지 통증으로 방해를 받자, 불쾌감과 더불어 평소 무던한 편이었던 감각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한파가 몰아치는 차가운 날씨에 혼자 원룸에서 누워있으니 고립감까지 밀려와 심신을 죄여왔다. 걷고, 뛰고, 먹고, 말하고, 가고픈 방향대로 스스럼없이 향하는 모든 움직임이 생경했다.
세상에 당연한 것 하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무시하면, 하루 종일, 그것도 아픈 채로 누워 있다 보면, 일상의 움직임들은 자연스레 동경의 대상이 된다. 비록 번지듯 떨리는 형상처럼 느껴질지라도 침대에 누워 아픈 감각과 동침하며 물다 보면 그려진다. 아프지 않은 삶이 실은 보통 일이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새살처럼 돋아 오르고, 건강에 따라 세상은 한낱 종잇장처럼 쉽게 뒤집어지는 것 또한 깊이 깨닫게 된다.
새벽 네 시, 몰려온 오한에 종아리부터 손끝까지 차례로 덜덜 떨리던 몸을 지금도 기억한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진통제 포장지를 뜯는 일 같은, 그토록 사소한 일마저 어려움으로 전락해 버린 허약해진 몸을. 당장 아프면 삶의 무엇을 잃고 달라지는지 알게 된다. 무엇이 내 삶의 소중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그토록 고뇌했던 미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얼어붙은 불안도 물처럼 녹아버린다. 부족해서 골칫덩이인 자신의 역량에 관한 고민도, 통증 앞에서는 견고할 수 없다.
꿈과 노력만을 운운하는 통속적인 언사에 속고 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은 아프고 난 뒤의 일이다. 꿈도, 노력도, 온갖 생각에 빠져사는 것도 다 건강한 몸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제대로 산다는 느낌은 추구하는 행위로부터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버텨주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더 나아가 어쩌면 건강한 몸으로 살았으니 불안과 방황도 깃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간에 하늘 아니면 땅만 바라보던 시선을 이제는 거두고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아픈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그러니까 몸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제일 감사한 일이었다. 새해에 건강을 우선으로 빌던 그 소원은 단순히 자식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부모의 사랑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살아보니 건강만 한 것이 없더라고 말하는, 건강해야 내 삶을 삶답게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앞서 산 분들의 지혜였다.
이제야 진정으로 건강한 삶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알아가고 있는 듯하다. 아프지 말아요. 새해에는.
[스물여섯 엄마의 열일곱 번째 일기 전문]
2000.1.1.(0시 5분)
경진년 흰색 용띠의 해가 시작 되었다. 백룡이라니 뭔가 좀 더 신비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 같다. 백룡해에 우리 아현이는 5세, 엄마는 30세, 아빠는 36세. 결혼하고 아현이 가지고 낳고 키우느라 엄마는 벌써 30대에 접어들었네. 그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우리 딸 키우는 재미가 있었다. 많이 아프지도 않고, 아무거나 잘 먹고, 잘 웃고, 책을 정말 좋아하는 우리 딸. 쑥쑥 자라는 게 맞긴 하지만, 남편과 나는 매번 시간이 지금에서 멈추었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아현이와 남편은 똑 닮은 얼굴과 자세로 꿈나라 여행 중이다. 새해가 오기 몇 시간 전에 둘이 말타기 놀이하면서 신나게 놀더니 일찍 잠들어 버렸다. 해맞이는 우리 딸이 더 자라면 데리고 나가고, 올해는 베란다에서 해맞이를 해야겠다.
민혜경 가수의 ‘서기 2000년이 오면’이라는 노래가사를 조용히 읊어본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우주로 향하는 시대.
우리는 로켓 타고 멀리 저들 사이로 날으리.
그때는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
가사말대로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