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걱정하지 않게 된 시점

스물여섯 살 엄마의 열여덟 번째 일기

by 김아현

좋아하지만 딱히 걱정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으면서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는 관계는 과연 가능할까. 전제부터 모순처럼 느껴져서 생각해 놓고서도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겠나 싶지만, 겉으로만 가깝고 속 깊은 감정적 교류는 미비한 우정을 일컫는, 이른바 '겉친(겉만 친구)'이란 신조어를 떠올리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살면서 친구 하나쯤은 곁에 두어야 될 것 같은 느낌으로 맺어진 듯한 관계라고나 할까. 없어서 허전한 것보다는 있어서 좋은 것이 낫다는 식으로 형성된 겉친은, 즐거움을 목적에 두고 형성된 암묵적인 우정에 가깝고, 외형적으로만 단단해 보이는 우정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주고받는 희로애락의 감당 임계치가 대체로 낮은 편이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가 조금만 깊은 곳으로 닿으려 하거나, 혹은 각자의 삶에서 겪는 어려움과 힘겨운 일을 토로할 일이 생기면 그런 대화로 인해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껴 대화 주제를 회피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관계도 과연 우정이라 불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확실히 이와 반대되는 '찐친(진짜 친구)'과 보통의 가족 관계와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물론 아무리 얕은 관계라 할지라도 있어서 나쁠 건 없다고, 모든 관계가 다 깊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장 내 상황이 어려워져서 이에 대해 말할 사람 한 명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어떨까. 해결책을 말해준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꽉 막힌 듯한 힘듦을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줄 수 있기를 바라지 않을까.

마음과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냥 행복한 얼굴만 볼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음울한 웅덩이를 마주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여러 관계를 통해 익히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이유는 단순히 쾌락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 힘들 때 쥐구멍만 한 틈이라도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조금이나마 힘듦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마냥 재밌고 즐거운 관계도 좋지만, 상황이 바뀌고 내 마음이 달라지면 그것도 잠시 뿐이다. 관계는 길게 유지될수록 어쩔 수 없이 걱정을 나눠야 하는 관문 앞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살기 바쁜 우리들은 어느 순간 서로를 걱정해 주는 것을 감정 낭비라 여기는 경향이 짙은데, 그것은 생각과 감정을 교류하는 일이 타인을 향한 집중을 요구하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사회에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이해받길 원하고, 인정받길 원하는 인간은 열에 열 명이라는 것이다. 남에게 관심은 없으면서 자신은 관심받길 원하는, 걱정하는 마음이 일종의 사치처럼 여기면서 자신을 걱정해 주는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라는 모순의 시대. 이런 시대가 올 줄을, 예전에는 알고 있었을까.

이제는 안다. 걱정과 경청이 빠진 사이는 결국 유령처럼 흐물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외적으로 풍기는 친한 분위기가 개인의 진짜 속마음을 가리고 있을 뿐, 그런 관계는 달달한 각설탕처럼 어느 순간 바스러진다는 것을.

이 사람의 삶을, 이 사람의 무게를, 어디까지 함께 견딜 수 있는가. 서로를 걱정하지 않게 된 시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스물여섯 살 엄마의 열여덟 번째 일기 전문]


2000.10.3.(화) 개천절


그동안 둘째 입덧을 하느라고 너무 힘들었다. 입원을 하고 싶었지만 아현이를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견디어 냈다. 그동안 엄마 귀찮게도 안 하고 어린이집 갔다 오면 알아서 손 씻고 간식 먹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블록놀이 하면서 잘 지내준 딸이 고맙다.


어린이집 갈 때는 “아가야~~ 엄마랑 잘 놀고 있어.” 하면서 배를 만지고 가고, 돌아오면 또 배를 만지며 “아가야~ 잘 있었니? 잠자니? ” 태어날 동생한테 어찌나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입덧이 끝나고 오징어가 너무 먹고 싶어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아현이가 달려와 오징어를 뺏어 버린다.

“엄마. 이런 걸 먹으면 아기가 목에 걸리잖아”
“엄마가 꼭꼭 씹어서 아기 목에 안 걸리게 할게”
“아기가 이빨이 없어서 목이 걸린단 말이야”
고집불통 딸이 엄마한테 뺏은 오징어를 자기가 먹는다.

“아현아 동생이 분홍색 좋아할 거 같아? 아님 파란색 좋아할 거 같아?”

“파란색 좋아할 거 같아”

산부인과에서 성별을 알려주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딸한테 물어봤더니 파란색?이라고 답한다.


이전 18화새해에는 아프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