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십 년째 이해를 연습 중입니다

스물여섯 엄마의 열아홉 번째 일기

by 김아현

그때보다 더 잘해줄 테니까 다시 태어나보라는, 불가능한 농담을 능청스럽게 던지며 내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던 엄마는 언젠가 혼내면서 키운 지난날의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과거의 부족했던 자신을 고백하는 부모의 말을 들은 자식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뻔한 말일지라도 어쨌든 고마운 표현으로 반응을 해야 맞겠지만, 그때 나는 무슨 마음에서 그런 건지 오히려 정당하게 사과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은밀하게 하고 있었다.

엄마가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출산하여 육아에 미숙한 부분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고 - 엄마는 당신 스스로 철이 없던 시절이라고 일관된 회상을 하신다 -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부모로서 따끔하게 훈육할 책임에서 비롯된 행동이란 것 또한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은 발톱처럼 피해자 마인드가 마음 한 구석에 잠자코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 억울함에 까까운 마음의 원형이었던 것 같다. 성격 차이에서 비롯된 감정적 소통의 어긋남 속에서 내 생각이 엄마한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늘 따라다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뭐,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사춘기 때에 비하면 그나마 많이 나아진 편이다. 그러나 한 때는 의견 차이가 심해서 스스로 자식이 맞나 의심이 들던 시절도 있었다. 그만큼 모녀의 성격은 삼십 년을 함께 살아도, 갱년기란 새 산을 넘어도 여전히 '극단적'이라는 범주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 좀 나아질 줄 알았으나, 그 기대는 보기 좋게 한 줌의 오로라에 불과했다.

이 모녀는 떨어져 있으면 만나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르면서, 막상 만나면 소규모 냉전 갈등이 펼쳐지는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설명이지 싶다. 사람 간의 의견 충돌의 원인을 성격 차이로 볼 수는 없다지만, 솔직히 엄마나 나나 상황에 대한 반응이 너무 달라서 성격 차이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모녀를 비교했을 때 서로에게 어울리는 용어를 나열해 보면 대략 이러하다.


엄마 = 사교적, 충동적, 강함, 약간의 억척스러움, 활동적, 외향적, 에너자이저, 요구 잘함

나 = 느림, 조용함, 공상, 생각, 깊은 대화, 걱정에 다소 취약함, 내향적, 기 빨림, 눈치 봄


공통점을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용어. 이렇듯 개인을 설명하는 용어가 확연하게 대비되니, 극단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가족이라는 틀 아래서 30년을 둥글게 모여 살아왔다는 사실이 지금도 놀랍고 한편으로는 낯설기까지 하다. 그런데 낯섦에 빠질 새도 없이 또 돌아서면 좋다가 또 투닥거려서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부모와의 소통 불화로 인해 고민을 하는 나 자신이 어떤 때는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는데 그 한심함도 잠시, 또 투닥거리고야 만다.

서로의 다름을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음에도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이 관계는 도대체 뭔지 자식 된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해 부족이 원인이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나의 느림과 깊이 빠지는 생각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엄마의 빨리 식 행동 방식에 버거움을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하나는 나름 신경 써서 평소처럼 입는 옷임에도 지저분하게 입고 다니지 말라는 말을 주야장천 늘어놓는 엄마의 집요함은, 가끔씩 나를 구석 어딘가로 몰고 가는 것 같아 나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게 만들기도 한다.


알았어, 알았다고.


유행에 둔감하다 못해 관심이 없는 내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스캔하는 엄마의 눈길에 평가받는 듯한 껄끄러운 기분을 겨우 억누르며 말을 내뱉으면, 그 대답은 엄마에게 무미건조하고 성의 없이 들려서 되려 잔소리에 가속도가 붙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면 나는 또 그 잔소리를 그날의 정신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참고 듣다가 한계치를 넘어서 분노하는 엔딩을 맞이하는 것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성격 차이. 오은영 박사님이 있었나, 누가 있었나. 어떻게 이해하면 될는지, 그렇다고 이야기 안 하고 살 수도 없지 않은가. 이해는 이미 한참 물 건너간 것 같고, 이제는 어쩔 수 없으니까 엄마는 이렇게 이상하고도 불가능한 농담을 하신 것 같다. 다시 태어나면 더 잘해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말이다.

옳은 말만 했을 때는 싸움으로 결말을 맺던 것이, 이 말도 안 되는 농담에 녹아내린다. 얼었다가 따뜻해지는 사계절이 여전히 살아있는 관계로 봐도 무방할까. 그러면 이전의 일은 아무 문제없는 것이 될 테니.


[스물여섯 엄마의 열아홉 번째 일기 전문]


2000. 10. 25. (수)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하다. 저녁을 먹고 뒷정리하는 동안 아현이가 조용하길래 책을 읽고 있나 싶었는데 아이 앞에 껌종이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정작 껌은 하나도 없고, 낮에 마트 가서 풍선껌을 쥐고는 사달라고 조르길래 하나 사주고는 껌 씹는 법만 가르쳐줬지 뱉는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쪼그만 애가 풍선껌 한통을 씹어서 다 삼켜버린 것이다. 당황스럽고 놀란 마음이 두렵기까지 했다.

‘괜찮을까?’

아현이는 엄마가 너무 놀라서 허둥지둥하니까 본인도 놀래서 눈만 껌뻑거리고 있고 혹시나 목에 걸려있나 목구멍까지 확인하고, 배가 아픈지 안 아픈지도 물어보고 했는데 멀쩡하게 보였다. 분명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은 엄마 잘못인데 손이 벌써 아현이 등을 향하고 있었다.
미안해, 딸.
급한 대로 아는 간호사 지인한테 사정을 말해보니 자기 아이도 어릴 때 그랬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했다.
“내일 아침 응가로 다 나올 거야. 걱정하지 마.”
에효, 십년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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