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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인포레스트 Jul 14. 2024

만 스물여섯의 단상

스탠드가 켜진 방 안에서

고요한 어둠 속에서 보이는 자극의 후유증 

ㄺ고요한 어둠 속에서 보이는 자극의 후유증고요한 어둠 속에서 보이는 

 '고요야, 내가 왔어' 가방을 집어던지며 속으로 외친다.


 여름이면 땀에 흥건히 젖은 흔적과 찝찝한 피곤함, 겨울이면 얼어서 움직임이 둔해진 턱 근육과 양털 옷 한 올 한 올마다 배인 타인의 향기. 이 모든 것을 옷장에 대충 개어 꾸깃꾸깃 쑤셔 넣는다. 옷을 벗을 때 잠깐 스치는 해방감이 반가울 시간을 기다리며 살던 어느 날, 방에 들어와서 불을 켜니 LED등 불빛이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고작 등 불빛이 이렇게 강렬했다고? 빛이 어깨와 머리 위로 툭툭 떨어지는 촉감이 점차 몸 전체를 휘감으며 누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고양이의 숨은 발톱이 드러나는 것 마냥 되도록 다가오는 무언가를 차단하고 방어하고픈 심리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여러 자극에 시달린 사람을 가장 편하게 만드는 일은 자극을 최소화하는 것이란 사실을. 

    

  불특정 다수의 인간을 만나고 나면 사방이 막힌 어둠이 참 편안하다. 마치 쥐가 쥐구멍을 본능적으로 찾는 오래된 포유류의 습성이 인간에게 있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싶다. 매일 전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공방을 벌이는 하루가 계속되면서, 온갖 자극에 휘둘리는 나에게 줄 선물을 본격적으로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퇴근 후 나에게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몇 평 되지 않은 작은 공간을 어둡게 만드는 일이었다. 공간과 사람이 분리되지 않은 느낌이 의외로 위로가 되었다. 온전히 나만의 공간과 냄새와 소리와 시간으로 충만한 세계에서 진행되는 자가치유가 확실한 휴식이다.

      

  스쳐 지나갔던 하루 8시간의 상황이 어두운 공간에 점점 흡수되어 가면 한 가지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이것은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글자와 단어와 문장으로 무장한 군대들을 최전선에서 입 하나로 방어하다 보면, 그 정신없는 와중에 심리적 타격을 받았는지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서 스탠드 불빛 하나만 의지한 고요한 어둠에 있으면 알게 된다. 나를 스친 자극이 빨갛게 부어오른 윤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마치 홍수에 불어난 강의 수면이 시간이 지나 다시 가라앉아서 강 밑 흙바닥과 돌, 이끼, 죽은 물고기와 살아있는 생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펼치는 기이한 신세계를 마주하는 일과 비슷하다. 다친 사실도 몰랐던 거지. 

      

   여태껏 내가 민감한 동물이라고 여긴 적은 거의 없었다. 남들의 잘못을 봐서도 이유가 있어서 그러겠거니 쉽게 넘어가는 성격에, 매운 음식과 상한 음식을 제외하곤 대체로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고, 요새는 속에 담아두는 말도 거의 없다. 그런 내가 파죽이 되는 날은 불특정 다수에게 빈틈없이 휩쓸릴 때다. 벅차다. 마음에 와닿지 않는 시답지도 않은 말을 꾸역꾸역 소화시킬 재간도 없고, 그런 시간을 보낼 마음의 여력 또한 점점 부족해짐을 절감한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일도 노동하는 것 같은 날에는 귀에 꽂는 노래마저 피곤한 나로, 맑은 경주 하늘이 누런 황달 증상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는 나로, 아침이 싫은 나로 변한다. 


당장 방 스위치에 손을 올려 방 안에 스탠드 빛만 남기고 주변을 어둡게 만든다.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와 식은땀에 시달린 긴장감과 막혔던 말문들이, 모든 자극들이 곧장 후유증으로 변모한다. 곳곳에서, 새벽에 돋아난 급성 알레르기처럼 돋아난다. 가라앉을 때까지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진통제가 몸속 혈관을 돌다가 통증이 서서히 완화될 시간이 필요하듯이. 


휴식에서 치유로, 스탠드가 켜진 방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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